소설리스트

파공검제-504화 (504/508)

504. 북극의 빙하처럼

총관의 표정이 전에 없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가씨, 철이 없는 것도 정도껏 해야 합니다. 자꾸 이러시면 혼납니다.”

총관의 전신에서 다시금 투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이번에 피어오르는 투기는 분명 빙설을 향한 것이었다.

궁주의 딸에게 투기를 드러내다니.

보통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우다.

하지만 빙설은 자신이 무리한 행위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총관을 이해했다.

“알아요. 말도 안 된다는 거. 하지만 이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요.”

“대체 뭘 알고 싶다는 겁니까?”

“그냥 전부 다요. 이 사람에 대해 모든 걸!”

“제가 답해 드리지요. 저놈은 벙어리입니다. 온갖 잔악한 짓을 저지른 대가로, 세 치 혀로 정의를 농락하고 몹쓸 짓을 한 대가로 혀가 잘린 벙어리지요. 이전에는 마인이었습니다. 혈마불이라는 녀석으로 각종 사술과 술법으로 수많은 인간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자죠. 끝으로 지금 저자는 죗값을 치르지 않고 빙궁을 벗어나려는 악질 탈옥범입니다. 당장 잡아 죽여도 모자랄 쓰레기죠.”

“…….”

“아시겠습니까? 저런 놈을 살려서 보내면 궁주님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

“이제 그만 철부지 짓은 관두고 정신 차리시지요.”

“하지만…….”

“……?”

“왜 그런 얘기를 하시면서…… 총관님은 웃고 계시는 건가요?”

총관이 미간을 푹 찡그렸다.

지금 이런 대화를 빙설과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에 짜증이 솟구친다는 표정이다.

“후우. 제가 웃는 건 하도 어이없어서 그런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렇게 웃지 않으면 제가 인내심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인내심을 잃는다고요?”

“예.”

“무엇으로부터?”

“아가씨.”

“……?”

“지금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저놈이 지금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습니다.”

총관의 날카로운 시선이 빙설의 등 뒤를 향했다.

빙설이 돌아보니, 정말 총관의 말대로 혈마불이 꽤나 뒷걸음질로 멀어진 상태였다.

혈마불의 표정을 보니 어딘지 겁에 질린 듯했다.

‘왜…… 저 모습에서 안쓰러움이 느껴지는 거지?’

마음 한편이 왠지 모르게 저릿하다.

이런 마음이 드는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아까 내가 저 사람을 보고 뭐라고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워낙 무심결에 말이 흘러나왔었기에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자신도 이해 안 될 이 보호본능이 하필이면 저런 혈마불 같은 인간에게 나오는 것일까?

겨우 찾아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저 사람…… 절 구해줬어요. 그것도 두 번씩이나.”

“실수였을 겁니다. 우리 쪽 무인으로 알고 살수를 펼쳤겠지요. 그게 아니면 저 미친놈이 그냥 마구잡이로 마공을 쓰면서 미쳐 날뛴 것이겠지요.”

“그게 아니라…….”

“아가씨. 저놈은 혈마불입니다. 혈마불이 아가씨를 왜 구합니까? 탈옥하다가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전부 제거한 겁니다. 뭐, 그 바람에 우리로서는 수고를 조금은 덜겠지만요.”

“아니에요. 확실히 절 구했어요. 저는 일절 공격하지 않았다고요.”

“그건 아가씨가 너무 약해빠져서 그런 게 아닐까요?”

“뭐라고요?”

순간 빙설은 진심으로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총관은 내내 빈정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니까요.”

“정말로 날 구했다니까!”

“아가씨!”

“총관!”

“아가씨. 미친 겁니까?”

순간 총관의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던 혈마불이 흠칫거리고는 멈춰 섰다.

두려움만 가득했던 그의 표정에 모종의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총관, 물러나세요. 만약 끝까지 절 따르지 않겠다면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이 사안을 엄중히 문책하겠어요.”

“문책이라…… 후후. 하하하하!”

“뭐가 웃기죠?”

“문책을 당해야 할 쪽은 아가씨지요.”

“뭐라고요?”

“지금 탈옥범을 돕는 중이잖아요. 아가씨, 마지막 경고입니다. 비켜서세요.”

“물러나지 못하겠다면? 난 날 구해준 사람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겠어요.”

“이런 철부지 같은…… 좋습니다. 만약 끝까지 물러나지 않으신다면 힘으로 제압하지요.”

사라라랑!

총관이 시퍼런 검을 뽑아 들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가느다란 연검이 바람결에 휘청이면서 나지막한 울음을 내지른다.

빙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언젠가 냉이겸에 물어본 적이 있다.

빙궁에서 누가 제일 강하냐고. 역시 아버지가 제일 강하지 않냐고.

그때 냉이겸은 모호한 대답을 했다.

“글쎄다. 누가 가장 강한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엇 때문에 누가 강한지 모르는 건데요?”

“그건…… 총관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란다.”

“피이, 그게 뭐예요? 총관님이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다고요. 행정 처리만 하느라 바쁘신 분이잖아요.”

빙설의 말에 냉이겸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냉이겸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깊이가 보이지 않는 물웅덩이를 보는 것만 같다.

얕은 줄 알고 뛰어들었다간 끝 모를 수심에 공포를 느끼게 하는.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아.’

스으윽.

총관이 검첨을 들어 올려 빙설을 가리켰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은 빙설 뒤에 선 혈마불에게 향했다.

하지만 말은 빙설에게 건넨다.

“이젠 경고 없습니다. 방해가 된다면 아가씨도 죄를 물어 빙옥에 처넣겠습니다.”

“궁주의 딸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크하하하! 그게 뭔데요? 아가씨가 뭔데요? 이제 보니 태생적으로 거머쥔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철부지 소녀로군. 그렇다면 역시 참교육이 뭔지 알려줘야겠군.”

“무례하군요!”

“미리 사과드리겠소. 지금부터는 더 무례해질 테니까!”

파아앙!

순간 총관이 바닥을 차면서 질풍처럼 내달렸다.

쉬파파파파파!

그가 박차는 바닥마다 살얼음이 끼었다가 터져 나간다.

“헉!”

너무나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총관을 보고 화들짝 놀란 빙설이 허리를 젖히면서 검신을 피했다.

쒜에에에엑! 츄핏!

강기가 빙설의 목 언저리를 스치면서 지나치자 핏방울이 솟구쳐 오른다.

하나 핏방울은 허공으로 튀어 오른 것과 동시에 그대로 얼어붙으면서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마치 하늘에서 일시적으로 붉은 우박이 떨어지는 것만 같다.

툭!

빙설이 바닥을 찍어 차면서 몸을 눕힌 상태로 빠르게 회전했다.

파라라라라!

무복이 공기와 부딪치면서 마구 파공성을 터뜨린다.

쉬리리리릿!

푸른 검신이 연신 춤을 춘다.

총관의 독문무공인 설원청사검(雪原靑蛇劍) 중에서 청사설원행(靑蛇雪原行)이라는 초식이었다.

그야말로 푸른 뱀이 눈밭을 기어가는 듯하다.

퍼퍼퍼퍼퍽!

순간적으로 검신이 뒤얽히면서 새하얀 결빙이 마구 터져 나왔다.

보통은 금속성이 울리겠지만, 두 사람 모두 빙공을 사용하다 보니 마치 얼음이 통째로 깨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연신 울린다.

푸른 뱀은 먹이를 쫓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날아들었고, 빙설은 뱀을 피하거나 막아내는 것에 급급했다.

취리리리리링!

어느 순간 푸른 뱀이 몸을 비트는가 싶더니 먹이를 물어뜯듯이 대가리를 쑥쑥 내밀었다.

피츗! 피츗! 피츗!

빙설의 전신 곳곳에서 피가 터지더니 허공에서 얼어붙으며 후드득 떨어졌다.

푸른 뱀이 물어뜯을 때마다 허공에서는 붉은 우박이 쏟아져 내렸다.

후드드득. 후드득!

파파파파팟!

연이어 뒷걸음질을 치던 빙설이 디딤 축에 공력을 실으면서 단전에서 솟구친 빙백신공을 왼손바닥으로 빠르게 뻗어냈다.

슈우우우욱!

회심의 일격이라 할 수 있는 빙백신장이었다.

검이 막아내기에는 가까운 위치!

하지만 그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총관이 피식 웃더니 몸을 팽이처럼 회전하면서 빙백신장을 흘려보내는 게 아닌가?

파라라라라!

곧이어 총관은 청사풍설상(靑蛇風雪翔)의 변초를 활용하여 빙설의 옆구리를 베어 들어갔다.

마치 청사가 눈보라를 헤치며 날아드는 듯하다.

쒜에에에엑!

‘살기까지……!’

빙설은 더 이상 이 싸움이 빙궁의 소공녀와 총관의 비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성을 잃은 것인지 총관은 자신을 향해 명백한 살심을 품고 있었다.

재빨리 검신을 회수하자, 푸른 연검이 그대로 부딪치면서 똬리를 틀듯이 감기는 것이 아닌가?

“헉!”

깜짝 놀란 빙설이 얼른 검을 빼내려고 했지만, 푸른 뱀의 힘이 만만치 않았다.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 총관이 공력을 한껏 끌어 올리면서 왼손으로 뻗어냈다.

‘빙백신장!’

빙설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꽈아아아아앙!

이번에도 귀를 찢을 듯한 폭음이 들렸지만 어떠한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또?’

천천히 눈을 떠보니 아니나 다를까 혈마불이 앞을 막아서면서 쌍장을 뻗어내고 있는 게 아닌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팔뚝을 따라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뚜두둑!

다음 순간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혈마불이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쿠웨에에엑!”

뜻하지 않게 공격이 막혀 버리자, 총관이 눈알을 희번덕였다.

“이 개 같은 놈이!”

쉬이이익, 퍼어억!

검파로 후두부를 내려찍자 혈마불이 그대로 고꾸라지면서 경련을 일으켰다.

“이 병신이 뒈지고 싶은 것이냐!”

퍽! 퍽! 퍽……!

총관이 막말을 쏟아내며 발로 마구 짓밟자, 보다 못한 빙설이 바닥을 차며 날아갔다.

“멈춰요!”

쉬따앙!

빙설이 휘두른 검신이 다시 푸른 뱀에게 막혔다.

그녀가 휘청거리는 틈을 타서 총관이 좌수를 불쑥 뻗더니 그대로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아악!”

빙설이 비명을 터뜨리자, 총관이 입매를 비틀고는 마구 머리채를 흔들었다.

“아가씨.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좀 듣지 그랬습니까? 이게 대체 뭡니까? 지저분하게. 상처 난 것 좀 봐.”

총관이 가소로운 표정으로 빙설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이렇게 여리여리한 몸으로 나를 막으려고 했소? 클클. 철부지 아가씨 같으니라고.”

“이것 놔!”

빙설이 거칠게 저항하며 검을 휘두르려고 하자, 총관이 검파로 다시 그녀의 복부를 올려쳤다.

퍼억!

“크어업!”

빙설은 두 눈을 부릅뜨고는 비명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창자가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통증이었다.

“하아, 쌍년이. 얼굴만 반반하면 뭐 하나? 오냐오냐 해주었더니 버르장머리가 없잖아. 확 뒈지려고.”

“총관…… 당신…….”

“닥쳐, 이년아.”

퍼억!

총관이 다시 검파를 들어 빙설의 머리를 때렸다.

빙설이 휘청거리는 걸 보면서도 그는 머리채를 놓지 않았다.

겨우 두어 대를 맞은 것이지만, 공력을 강하게 실은 탓에 빙설은 온몸이 굳어버릴 정도의 추위와 통증을 느꼈다.

“내가 뭐랬소? 참교육을 한다고 하지 않았소? 이제 좀 말하면 고분고분 처듣도록.”

다시 검파를 들어 올린 그가 빙설의 뺨을 후려치려고 할 때였다.

쒜에에에에엑!

시커먼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보고는 반사적으로 돌아서며 쌍장을 뻗어냈다.

콰아아아아아앙!

“크아아악!”

시커먼 그림자에게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총관의 눈자위가 꿈틀거렸다.

“궁주……?”

놀랍게도 자신에게 쌍장을 얻어맞고 날아가는 자는 빙하운이 아닌가?

‘설마 남궁천이……!’

고개를 휙 돌리는데, 마침 맞은편 전각 지붕 위에서 남궁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헤이, 그러는 거 아니야. 같은 편끼리 막 서로 때리고 죽이고 하는 거 아니야.”

달빛을 등진 남궁천이 입매를 비튼 채로 벽라검을 어깨에 척 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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