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 북극의 빙하처럼
“이보게, 진천랑. 나를 앞에 두고 찾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자, 자네가 찾는 내가 이렇게 앞에 서 있네.”
빙하운이 양손을 활짝 펼친 채 빙그레 미소 짓는다.
남궁천은 시종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빙하운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후회하지 마라.”
“어째서?”
“내가 빙하운을 만나면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거든.”
후우우우웅!
말을 마치자마자 남궁천의 전신에서 살벌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매서운지 여유만만하게 지켜보던 빙하운도 표정을 슬쩍 굳혔다.
남궁천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면서 말을 이었다.
“빙설이 찾아왔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내가 아는 빙하운은 결코 광증 따위에 걸릴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역시 인간이 변했다는 말인데. 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거든.”
“그래서?”
“결론은 뭐가 됐든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아끼던 딸을 저리 방치해 둔 죄를 치러야 하니까!”
파밧!
남궁천의 신형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쒸에에에에엣!
검붉은 기운이 달빛 아래에서 갈지자로 흔들리며 빙하운에게 날아간다.
꽈아아아앙!
두 자루의 검신이 부딪치면서 기파가 사방으로 불어 나갔다.
하나 두 사람 모두 막대한 강기를 실어 격돌한 것이었기에, 그 충격파는 상상 이상이었다.
쿠구구구구궁……!
주변 전각들이 앓는 소리를 냈고, 지붕의 기왓장이 어지럽게 날아갔다.
그야말로 태풍이 한차례 휩쓰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빙하운의 머리카락도 세차게 휘날렸다. 빙백신공 때문에 머리카락 끝에 맺힌 서리가 마구 흩뿌려지면서 은빛 가루가 흩날린다.
“오지랖이 넓군.”
빙하운의 차가운 반응에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면서 검을 다시 후려 왔다.
“오지랖이 아니라 의무였지!”
쉬이이이이익! 쩌어어어엉!
다시 한번 강기가 폭발하면서 또 한 번 기파가 원을 그리며 흩어진다.
후우우우웅!
쿠파파파파파!
연이은 검격에 두 사람이 선 자리가 분화구처럼 움푹움푹 파여 갔다.
쩡! 쩡! 쩌어엉!
마침내 검을 맞댄 빙하운이 빙백신공 때문에 백옥처럼 하얗게 변한 얼굴로 물었다.
“의무라?”
“기억이 듬성듬성한 모양이군. 아니면 기억까지는 흡수할 순 없었던 건가? 아, 총관이 한패인 것 같으니 내가 빙하운을 만났다는 사실을 대충 전해 들은 것인가?”
까아아앙!
“…….”
“뭐 씨불이고 싶지 않다면 그대로 닥치고 있어라. 나도 말을 듣는 것보다는 하는 쪽을 좋아해서.”
퍼퍼펑!
이번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장력이 연발된다. 단 한 번 일수를 뻗었지만, 세 번의 장력이 날아갔다.
하나 빙백신공은 그마저도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마치 빙하운의 전신을 둘러싸고 얇고 단단한 얼음막 하나가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쉬쉬이이이잇!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서로를 향해 검첨을 내질러 갔다.
콰작!
콰악!
서로의 요혈을 향해 날아든 검신을 맨손으로 낚아챘다.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손에 상처가 생기진 않았다.
우우우웅!
각자의 손에 사로잡힌 검신이 우는 소리를 내지른다.
남궁천이 입매를 비튼다.
“한심하군. 그새 내가 가르쳐 준 걸 다 잊은 모양이야. 빙백신공과 검법이 죄다 제멋대로잖아.”
“…….”
“빙하운은 내게 직접 말했다. 북극의 빙하처럼 자신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언제든 내 검으로 끝을 보라고. 특히 딸을 힘들게 하는 인간을 보면 반드시 응징해 달라고. 그게 설사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
“이제 설명이 됐나? 나는 약조를 했고, 이제 이행할 의무가 있다.”
“흐음.”
“어때? 들어보니까 아리송하지? 조금 전에 당한 게 있다 보니 내가 진짜로 하는 말인지, 거짓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
“…….”
“남의 인생을 산다는 게 바로 그런 거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르는 것들투성이로 둘러싸이는 것. 그래서 남이 규정한 대로 사는 것은 다 부질없는 거야. 그러니 너도 가면을 벗고 너답게 살아라.”
“대체 뭔 개소리를 하는 거냐?”
“닥쳐라. 내 의식의 흐름은 원래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너는 주둥이를 닥치기로 했고, 나는 떠들기로 했으니 반박은 듣지 않겠다.”
“미친놈이군.”
“네가 그렇게 보았다면 너에게 나는 그런 존재다. 하나 내가 규정한 나는 미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가 인정하는 나다.”
“그럼 넌 어떤 놈이지?”
“나는 나다. 네놈에게 깨달음을 주는 척하면서 살수를 펼치는 놈이고, 빙하운을 그리워하면서도 죽여 버리고 싶단 생각을 하는 놈이다. 알다시피 무림공적 제일호이자 강호대살성이다. 하나 마지막 두 개는 내가 인정한 내가 아니다. 세상이 규정한 나다. 지금의 나는…….”
“……?”
“그냥 널 죽일 저승사자지!”
콰아아아아아!
순간 검붉은 마기가 폭증하는가 싶더니 다시 한번 남궁천의 배후로 거대한 천마상이 나타났다.
어찌나 거대한지 빙궁의 어디에서나 그 천마상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꿀꺽……!
빙하운이 마른침을 삼켰다.
확실히 저 거대한 천마상은 볼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다.
남궁천의 목소리가 웅혼하게 울린다. 마치 천마상이 동시에 말을 쏟아내는 듯하다.
“오늘 내가 기분이 좋다. 좋은 실험 상대를 만난 것 같아서.”
쉬이이이이잇!
순간 남궁천이 검을 내지르자, 등 뒤의 천마상이 마치 남궁천과 함께 검을 쥔 것처럼 손을 내질렀다.
“헛!”
헛바람을 삼킨 빙하운이 재빨리 경신술을 펼치면서 물러갔다.
파바바밧!
하나 천마상과 함께 움직이는 남궁천은 눈으로 좇기도 힘들 만큼 빨랐다.
보기에는 한 걸음 움직이는 것도 몹시 느릴 것처럼 커다란 덩치였지만, 남궁천이 경신술을 펼칠 때만큼은 연기처럼 홀연히 움직였다.
쉬따아아앙!
“크읏!”
그대로 충격파를 견디지 못한 빙하운이 포탄처럼 튕겨 날아가더니 빙벽을 부수며 전각 안으로 들어가 나뒹굴었다.
쿠구구구궁……!
벽에 구멍이 뚫린 전각 한 채가 기우뚱거리며 앓는 소리를 낸다.
남궁천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니야. 이 정도로 쓰러져선 안 돼. 이걸론 실험이 되지 않는다. 좀 더 너다운 모습을 보여라.”
쉐에에에엑!
남궁천과 천마상이 함께 쥔 검신이 강기를 품은 채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다.
짜르르르르르르릉!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가 울리면서 강기가 전각에 작렬하자, 무가 썰리듯 건물이 통째로 절단되며 날아가는 게 아닌가?
콰아아아앙!
쿠르르르르르! 쿠쿠쿵!
그대로 무너진 기와지붕이 이제 막 일어서려던 빙하운을 다시 덮쳤다.
전각 전체가 얼어붙어 있었기에 하얀 결빙 파편이 사방으로 먼지 구름처럼 풀썩 일어났다.
남궁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딴 식으로 싸우면 너는 져. 너 답지 않으니까. 하지만 나는 나답게 싸우니 질 수가 없다. 그게 세상의 이치지.”
“쿨럭, 쿠웨에엑!”
무너진 잔해를 헤치며 빙하운이 비척거리며 일어나다가 피를 한 움큼 토했다.
쿠르르르!
파편 조각들이 빙하운의 몸에서 미끄러진다.
빙하운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소매로 훔쳐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개소리도 작작 해라.”
“못난 놈이군.”
“뭐?”
“원래 못난 놈은 진리를 말해줘도 개소리로 듣는다. 잘난 놈은 개소리 속에도 진리를 찾는 법이고.”
“확실히 넌 미친놈이다.”
“그건 진리다. 모처럼 정답이군.”
“미친…….”
“그래, 정답.”
남궁천이 히죽 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이번엔 천마상에도 검이 생겼다.
역시나 천마상은 남궁천의 행동과 똑같이 움직인다.
마치 든든한 우군이 등 뒤를 받쳐주는 느낌이다.
빙하운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천마상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모습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저건 가짜다!’
초견파공안으로 마공을 흉내내다가 저런 환영을 만들어낸 것이다. 놀랍도록 현실적이지만, 천마상 자체는 아무런 힘이 없을 것이다!
물론, 빙하운은 남궁천이 천마신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남궁천이 서서히 기수식을 취하며 중얼거렸다.
“미쳤다는 뜻은 좋은 거지. 어느 것 하나에 미쳤다는 말은 극에 달했다는 뜻이니까. 미치지 않고서는 진정한 대성이라고 할 수 없으니, 그런 의미에서 나는 확실히 미친놈이다.”
다음 순간.
파스스스스스!
남궁천의 검신이 새파랗게 얼어갔다. 동시에 천마상이 들고 있는 검영(劍影)도 살얼음이 낀 듯 하얗게 변했다.
빙하운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빙백신공?”
“너답지 않게 알아보는군. 그런데 빙백신공만 있지 않지.”
스스스스스슷!
이번엔 시퍼렇게 얼어버린 검신이 점점 붉은 기운에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잔뜩 얼어서 검붉게 빛나는 검신.
황홀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넋 놓고 구경만 했다간 저 붉은빛이 완전한 핏물로 변해 버리리라.
결국 빙하운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좀 더 나답게 싸우는 게 좋겠군. 안 어울리는 옷은 벗어두는 게 낫겠어.”
“진작 그래야지.”
“후회하지 마라.”
빙하운이 싸늘하게 읊조리고는 빙백신공을 풀어버렸다. 대신, 다음 순간 그의 단전에서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폭발하듯 일어나기 시작했다.
구오오오오오오!
“크으읍!”
어금니를 꽉 깨문 빙하운이 양손을 불끈 쥐었다.
손등을 타고 돋아난 핏줄이 팔뚝을 지나 목과 얼굴, 그리고 이마까지 이어졌다.
“크하아!”
짐승처럼 포효한 빙하운이 새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자, 이걸로 네놈을……!”
말을 뱉던 빙하운은 순간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어느새 남궁천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 히죽 웃는 게 아닌가?
게다가 전신을 음습해 오는 이 불길한 기운!
‘어, 언제……?’
생각을 이어갈 겨를도 없이 남궁천이 빙하운의 정수리를 잡더니 그대로 바닥에 찍어 눌렀다.
뚜콰아아앙!
“커억!”
바닥이 움푹 파이면서 파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빙하운은 충격으로 두 눈을 부릅뜬 채 터져 나가는 바닥을 보았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튀어 오른 파편이 느릿하게 허공으로 떠오른다.
뒤늦게 아찔한 고통이 찾아오면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쿠콰콰콰콰콰!
얼어붙은 바닥이 분화구 모양으로 움푹 파이면서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전각들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구구궁!’거리며 앓는 소리를 연신 내지른다.
“이익!”
바닥에 이마가 찍힌 채로 이를 꽉 깨문 빙하운이 공력의 흐름을 반대로 가져가면서 회오리치듯 다리부터 솟구쳐 올랐다.
파바바바바밧!
동시에 금나술을 펼쳐 남궁천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그대로 반격에 나섰다. 아니,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남궁천의 공력을 확인한 순간 그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조금 전에 느꼈던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이 다시 전신을 에워싼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남궁천이 무릎으로 빙하운의 명치를 찍어 올렸다.
퍼어억!
슈우우우우욱, 콰아앙!
이번에도 포탄처럼 튕겨 나간 빙하운이 궁주전 벽에 깊숙이 처박혔다.
쿠르르르……!
부스러기가 떨어지면서 빙하운도 천천히 벽에서 떨어져 나왔다.
털썩!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너…… 설마…… 진짜 천마냐?”
만약 그렇다면…… 자신은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뭐? 나다운 모습으로 싸우라고?
이런 새빨간 거짓말 같으니라고!
그 어떠한 마공도 천마신공에 대항할 수는 없는 것을!
* * *
총관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빙설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가씨. 무슨 짓입니까?”
“멈춰주세요. 뭔가 이상해요.”
빙설은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총관에게서 거친 투기를 읽은 순간, 왠지 눈앞의 이 마인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관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비켜주십시오, 아가씨.”
“그렇게는…… 못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