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 북국의 빙하처럼
‘혈마불이 어째서 여기에……!’
빙궁에서 적랑단 대주들을 풀어주면서 빙설도 함께 풀려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직 빙마옥의 상황을 전해 듣지는 못한 상태. 때문에 빙마옥에 갇혀 있어야 할 혈마불이 이런 곳에 나타났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설마 광풍사나 빙파위사단이 풀어준 건가?’
그렇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하필 사악한 마인을 풀어주다니.
혈마불은 빙마옥에서 가장 오래 갇혀 있던 죄수였다.
그만큼 죄가 크다는 뜻이기도 하고, 질긴 생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가만……! 어쩌면 혈마불도 나와 마주친 걸 원치 않을지도!’
만약 광풍사나 빙파위사단이 그를 풀어준 것이라면, 이 기회에 빙궁을 벗어날 생각이 우선하리라.
천우의 기회가 아닌가?
그런데 굳이 자신과 부딪쳐서 살수를 섞을 필요가 있을까?
무슨 까닭인지 지금의 혈마불은 어느 정도 마기를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랫동안 싸울 기력은 아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해.’
이런 아수라장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혈마불과 싸울 필요는 없다.
지금은 아버지의 안전을 확인하고, 빙궁을 지키는 게 우선이다.
광풍사와 빙파위사단이 추구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그녀는 빙하운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반역자들에게 죽는 것보단 최대한 설득해서 변화시키고 싶은 게 당연한 욕심이다.
‘그래, 우선은 빙궁을 지켜야 해. 혈마불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자.’
생각은 길었으나, 걸린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심호흡을 하고는 맞은편에 선 혈마불을 향해 외쳤다.
“현재 빙궁의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당신과 굳이 손을 섞을 생각은 없어요. 이대로 조용히 사라진다면 더 쫓진 않겠습니다!”
“……!”
순간 혈마불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통한 걸까?
아니면, 가소롭다고 여기는 걸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 빙설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물, 물론 당신이 무서워서 그러는 게 절대 아니라는 건 알아두세요.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는 척하면서 내 안전을 추구하는 것도 결코 아니에요!”
“…….”
혈마불의 입매가 묘하게 뒤틀린다.
오랫동안 표정을 잃어버렸던 사람처럼.
‘저건 대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하지만 그 표정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왜…… 왜 안 비키는 건데?’
빙설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혈마불을 응시했다.
성큼.
흠칫!
혈마불이 걸음을 내딛자, 빙설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다가 곧 자신이 주눅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껏 턱을 치켜들고는 어깨를 활짝 폈다.
“뭐, 뭐 하는 거죠? 혹시 여기로 지나가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요? 하지만 다른 곳으로 가세요! 내가 두 눈 부릅뜨고 있는데, 이곳으로 오는 건 너무 염치없지 않나요?”
“크크큭……!”
혈마불의 입에서 울음 같은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나 기괴해서 팔뚝을 타고 소름이 쫙 끼친다.
짧은 웃음이었지만, 그가 겪은 인생의 어두운 면이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듯한 소리다.
혈마불이 흐느끼듯 웃더니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다.
“어어? 그만 오라니까요?”
“…….”
혈마불은 말이 없다.
하긴 말을 할 수 없겠지.
오래전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다.
혈마불은 세 치 혀로 사술을 부릴 줄 알기 때문에 자칫 마교의 사악한 술법에 걸려들 수도 있다고.
그래서 아예 혀를 잘라 버렸다고.
“그어…….”
알아듣기 힘든 말이 혈마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번에도 짧은 한마디 음성이 폭풍과도 같은 울림을 준다.
어째서…… 어째서 저리도 강한 존재감을 풍긴단 말인가?
분명 기력이라곤 별로 없는데.
저 정도면 자신이 전력을 다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텐데.
감히 대항하기 힘든 존재감이 느껴진다.
‘이 사람은 대체 왜…… 당장에라도 쓰러져 죽을 것 같으면서도…… 나를 꼼짝 못 하게 만드는 거지?’
이게 정녕 마인의 사술인가?
그렇다면 정말로 무서운 능력이 아닌가?
육신을 옭아매는 것을 넘어 정신까지 아득하게 만든다.
그러던 어느 순간!
“헛!”
빙설이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키며 뒤로 성큼 물러났다.
혈마불의 표정이 소름 끼치도록 사납게 변한 탓이다.
모종의 분노를 담은 혈마불이 일순 바닥을 차면서 모든 힘을 쥐어짜듯 달려왔다.
동시에 혈마불의 전신에서 살기가 폭사했다. 그야말로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의 살기!
“윽!”
신음을 삼킨 빙설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만큼 지독한 살기였다. 마치 뱀 앞에 선 쥐새끼 신세가 따로 없었다.
‘아…… 여기서 죽을 수는 없는데!’
마침내 혈마불이 날아올랐다.
타앗!
치렁치렁 기른 머리카락이 달빛 아래에서 어지럽게 휘날린다.
길게 자란 손톱이 붉은빛으로 물든다. 마기와 살기가 형형하게 섞이면서 그대로 빙설을 향해 떨어져 내린다.
‘움직여야 해!’
빙설은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손발을 놀렸다.
하지만 이미 혈마불은 지척에 다다라 일수를 뻗어왔다.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채듯 손가락에 모든 마기를 실어 내려찍고 있다.
결국 빙설은 양팔을 들어 올리며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쉬콰아아악!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비명이 솟구쳤다.
“끄아아아악!”
촤아악! 촤촤아악!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린다. 뒤이어 비명이 연신 터져 나온다.
빙설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어떻게 된……?’
놀랍게도 자신의 주변으로 세 명의 무인이 쓰러져 있었다. 무복으로 보아서는 빙파위사단이 틀림없다.
“끄어억……!”
빙설이 화들짝 놀라면서 옆을 돌아보았다.
혈마불의 손이 빙파위사 한 명의 복부를 파고들어 등으로 튀어나온 상황.
결국 눈을 허옇게 뒤집은 빙파위사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촤아아아악!
피에 젖은 손을 뽑아낸 혈마불이 어깨를 씨근거리며 빙파위사들을 돌아보았다.
“궁주의 여식! 죽어라아앗!”
마침 또 다른 빙파위사가 빙설의 배후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빙설이 얼른 돌아섰지만, 혈마불의 존재감에 의식을 빼앗긴 탓인지 상당히 늦은 반응이었다.
촤아아악!
“으읏!”
빙파위사의 검신이 어깨를 베며 지나치자 허공으로 점점이 피가 흩뿌려졌다.
일순 눈을 치뜬 혈마불이 붉은 눈동자를 부라리더니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크아아아아!”
괴성을 터뜨리며 도약한 혈마불이 그대로 빙파위사가 휘두르는 검을 맨손으로 낚아챘다.
콰자악!
곧이어 혈마불이 이마로 상대의 머리를 들이받아 버렸다.
꽈앙!
“크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튕겨 나간 빙파위사가 한참이나 굴러가서 전각 벽에 처박혔다.
하지만 혈마불은 멈추지 않았다. 눈이 돌아간 것인지 개처럼 달려가더니 그대로 빙파위사의 몸에 올라타는 게 아닌가?
“크아아아!”
마치 짐승처럼 포효한 혈마불이 칼날 같은 다섯 손가락을 마구 휘두르며 쓰러진 무인을 난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잔인한지 빙설이 헛바람을 삼키며 주춤 물러났다.
무인이 숨을 거두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난도질을 멈춘 혈마불이 짐승 같은 소리를 흘리며 천천히 돌아섰다.
새빨갛게 물든 안광.
거친 숨소리.
그야말로 괴물이 따로 없다.
빙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혈마불도 그만큼 걸음을 내디딘다.
“오, 오지 마세요!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당신이 두렵지 않아요! 가까이 오면 다치는 건 당신이 될 거예요!”
협박 아닌 협박이 통한 걸까?
혈마불이 잠깐 멈칫거린다.
한데 그 표정이 묘하고 복잡하다.
‘대체…… 왜 그런 표정인 거야?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빙설이 입술을 꾹 깨물고는 혈마불을 노려보았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내딛던 혈마불이 어느 순간 무릎을 털썩 꿇더니 격하게 피를 토했다.
“쿠웨에에엑!”
검붉은 탁혈이 연신 쏟아져 나온다.
사람이 저렇게 많은 피를 토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괜, 괜찮으신가요?”
빙설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람? 내가 왜 저 사람을 걱정하는 거야?’
아까부터 빙설은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답지 않다고 여겼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혈마불에게서 도저히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지금이라도 저자를 피해서 달아나면 그만인데…….
‘왜 발이 떨어지지 않는 거지?’
오히려 빙설은 저도 모르게 혈마불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피를 모두 토해낸 혈마불이 기력이 쇠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빙설은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은 것처럼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혈마불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버렸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것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결정체가 입 밖으로 흘러나오려고 할 때.
“아버…….”
“후우. 한참을 찾았는데. 여기 있었군요.”
문득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돌아선 빙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총관님!”
“아가씨, 지금은 비상 상황입니다. 안전하게 가주전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리고 저자는 잔악무도한 마인입니다. 누구보다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대상입니다.”
“총관님, 뭔가 이상해요! 이 사람이…….”
“아가씨.”
“네?”
빙설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총관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물론 빙궁의 총관은 무공을 수준급으로 익힌다.
하지만 총관이 이렇게 기도를 드러내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보니 상당한 수준이 아닌가?
게다가 늘 온화한 품성이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칼바람처럼 싸늘한 태도다.
“물러나시지요. 저자는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총관님, 저 사람은 뭔가…….”
“설마 지금 마인을 동정하는 건 아니겠지요? 이 엄중한 시국에. 만약 그렇다면 빙파위사단과 광풍사는 더욱 명확한 명분을 얻고 미쳐 날뛸 겁니다.”
“……!”
“아버지를 도우셔야지요. 궁주님은 지금 외로운 싸움을 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가요?”
“예, 남궁천 단주가 결국 은혜를 원수로 갚은 모양이니까요.”
“그럴 리가……!”
“궁금하면 그리로 가보시지요.”
“그럼 저자는…….”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가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시니 죽이진 않겠습니다. 어차피 다 쓰러져 가는 마인이니. 목숨만은 붙여두겠습니다. 다만…… 다시는 이딴 짓을 하지 못하도록 다리 정도는 잘라야겠네요.”
* * *
퍼콰아아앙!
궁주전에 폭음이 터졌다.
동시에 얼음벽이 와르르 무너지더니 안에서 두 사람이 포탄처럼 튕겨 나왔다.
까라라라라라랑!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연신 검을 휘두르며 격돌했다.
검붉은 마기와 냉랭한 한기가 부딪치면서 결빙이 마구 터졌다.
달빛을 받은 결빙이 보석처럼 아름답게 흩뿌려지면서 사방에서 비산한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빙궁을 급습한 무인들도, 지키던 무인들도 잠시 사투마저 잊고 넋을 놓을 지경이다.
쩌어어어엉!
마침내 천지가 격동할 만한 금속성이 터지더니 두 사람이 서로 튕겨 나가며 멀어졌다.
촤츠츠츠츳!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중심을 잡은 두 사람.
빙하운이 입매를 슬쩍 비틀었다.
“이거 재미있군. 빙공과 마공의 싸움이라니. 어쩌면 이걸로 본좌의 명분이 살지도 모르겠군.”
“닥쳐라. 빙궁주는 본좌라는 말을 하지 않아.”
남궁천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빙궁주, 어디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