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 북극의 빙하처럼
남궁천과 빙하운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얽혔다.
동시에 빙하운이 들고 있는 검신에서는 살기가 넘실거린다.
여차하는 순간 검신이 춤을 추리라는 것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여민 채로 빙하운을 세밀하게 살폈다.
눈빛과 표정, 그리고 자세와 호흡, 마지막으로 단전에서 잔뜩 억눌려진 내공까지.
떠보는 느낌은 없다.
눈치 하나로 전생을 버텨온 자신이다.
한데 지금 빙하운은 분명 자신을 진천랑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어떻게?
과거의 인연으로 자신을 추측했나?
그게 가능한가?
물론 남궁천을 보고 진천랑을 떠올릴 수는 있다. 게다가 아들이니까.
하지만 상식적으로 남궁천을 보고 진천랑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과거의 친밀감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너무 초자연적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자신을 진천랑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한 번 발뺌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지금 빙하운의 눈빛을 보면 그것이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남궁천이 찻잔을 내려두며 조용히 대꾸했다.
“확실히. 좀 놀랐다. 제법이군.”
“의외로군.”
“뭐가?”
“한 번쯤은 발뺌할 줄 알았는데. 순순히 인정하니까.”
역시.
남궁천이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빙하운을 보며 대답했다.
“날 알아봤다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전생에 눈치 하나로 수십 년을 무림맹과 싸운 남자라는 걸.”
“대단했지. 초견파공안이라는 게 뭔지. 누구도 그 정도로 버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크크. 이거 알아봐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남궁천이 씨익 웃더니 찻잔을 채우면서 말했다.
“나는 확실히 놀랐는데, 너는 놀라지 않는군. 밖에서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남궁천의 말대로 밖이 어수선했다.
분주한 발걸음 소리와 고함 소리가 난무한다. 내공으로 청력을 키우면 아련하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도 들린다.
난리가 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빙하운은 시종 느긋했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뭐, 하루 이틀이어야지.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군.”
“그야말로 폭군이 다 됐군.”
“성군과 폭군은 종이 한 장 차이지.”
남궁천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차를 다시 마셨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런 중에도 빙하운의 기도는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단전에 담긴 공력이 여차하면 발출하기 위해 시종 넘실거린다.
남궁천이 잔을 내려두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
“너는 누구냐?”
빙하운이 아주 잠깐 움찔거렸지만, 정말이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눈치가 빠른 남궁천이라도 거의 낌새를 채지 못할 정도로.
빙하운이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이러나? 오랜 추억을 잊은 건 아닐 테지? 아니면 새 삶을 얻어서 전생을 기억에서 지운 것인가?”
“오랜 추억? 나를 기억한단 건가?”
“물론이지. 전생에 자네는 빙궁에 왔었잖나?”
빙하운이 옅은 미소를 짓는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역시 자네는 날 알아보는군.”
“그래서 옛정으로 날 기억하고 있던 것이군.”
“그렇다.”
“하긴. 우리가 서로 못 알아볼 사이는 아니지. 자네와 나는 각별했으니까.”
“당연하지.”
“아니, 각별하다 못해 특별한 사이였지.”
“…….”
“특별하다는 표현도 어쩌면 부족하겠지. 우리는 보다 더 애틋하고, 보다 더 끈적하고, 보다 더 뜨거운 사이였으니까.”
“……으응?”
“빙궁주.”
“……?”
“그 오래전 날 밤. 궁주전 지붕에서 나와 은밀하게 나눈 대화와 행위를 모두 기억하는가?”
“글쎄. 워낙 오래전…….”
“하긴 기억하지 못한다면 자네는 빙궁주가 아니란 소리지. 분명히 기억할 거야. 그렇지 않나?”
“흐음. 기억하고 있네.”
빙하운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살짝 사라진다. 남궁천이 그걸 놓치지 않고서는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몰아붙였다.
“그래, 절대로 잊을 수 없을 테니까. 그날 우리는 술 한잔과 함께 끈끈한 얘기들을 나눴지. 서로의 은밀한 취향에 대해서.”
“……은밀한 취향?”
“그래.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함께 정을 나눴지.”
“뭘 나눠?”
“왜? 새삼 부끄러운가? 자네도 많이 약해졌군.”
“…….”
“나는 그날 뜨겁게 나눈 몸의 대화를 잊을 수가 없네. 자네는 아주 달아올랐지. 나도 주체할 수 없었고. 그러니 당연히 자네가 기억할 수밖에 없겠지.”
“…….”
“그런데! 자네가 어찌 총관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단 말인가! 솔직히 실망했다. 내가 먼 곳에 있다고 해서 그새를 참지 못하고 총관과 그 짓을 벌여? 나는 자네에게 고작 그런 존재였나!”
쾅!
후우우우우웅!
남궁천이 탁자를 거칠게 내려치자 뜨거운 기운이 사방으로 훅 불어나갔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빙하운은 잠시 눈만 멀뚱멀뚱 뜬 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남궁천이 기세를 몰아 다시 다그쳤다.
“자네는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가! 대체 내가 알던 자네는 어디 있는가!”
쾅!
“기, 기억한다!”
빙하운이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에 얼음장 같은 침묵이 다시 찾아들었다.
“…….”
“…….”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
이윽고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뭘 기억하는데?”
“그러니까 자네와 나눈 뜨거운 밤.”
“그럼 누가 공격이고, 누가 수비였나?”
“그건 아마도…….”
빙하운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궁주실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마침 침상 아래의 혈흔이 보인다.
빙하운이 스스로를 가리키며 어정쩡하게 답했다.
“……나?”
“틀렸다.”
남궁천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 처연한 분위기에 휩쓸려 빙하운은 왠지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창가로 걸어간 남궁천이 창문을 열었다.
휘이이이잉!
싸늘한 바람이 훅 들어오자, 잠시 멍했던 빙하운의 의식이 깨어났다.
순간 그는 생각했다.
‘가만. 지금 뭐지?’
이상하게 자신이 남궁천의 대화에 휘말리지 않았나?
설마 환술?
빙하운이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남궁천을 휙 돌아보았다.
사실 그의 추측은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이었다.
조금 전 고도의 신경전을 통해서 대화를 나눌 때, 남궁천은 백무극이 사용하는 공력의 흐름을 이용해 환술을 펼쳤다.
빙하운의 공력이 상당한 만큼 눈앞에 환영이 보이고 환청이 들릴 정도는 아니지만, 적당한 연기와 섞었을 때 멍하니 대화에 빠져들게는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지금 공기가 환기되니 멍했던 정신이 각성한 것이다.
남궁천이 빙하운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누구냐? 넌.”
“난 빙하운…….”
“닥쳐라. 그날 밤 나는 빙하운과 전각 지붕에서 비무를 겨눴다.”
“뜨거운 밤이라는 건…….”
“그래, 네가 생각한 짓이 아니라, 단순한 비무였지. 그리고 공격은 빙하운이 했고, 내가 수비였다. 이유는 초견파공안으로 빙궁의 무공을 손봐주기 위해서였지.”
“아…….”
“너 이 새끼. 혹시 마교냐?”
남궁천의 질문에 빙하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곧 빙하운의 얼굴에 눈꽃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글쎄. 마인이 이런 걸 할 수 있을까?”
콰아아아아아아!
순간 빙하운의 전신에서 냉기가 폭사했다.
그러자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면서 얼음알갱이가 맺히는 게 아닌가?
곧이어 빙하운이 일장을 뻗어내자, 주변으로 얼어붙었던 얼음알갱이가 남궁천을 향해 일제히 쇄도했다.
투타타타타타앙!
남궁천이 반사적으로 호신강기를 끌어올리고는 쌍장을 뻗어 막아냈다.
부서진 알갱이 때문에 주변으로 희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피었다.
서늘한 기운과 함께 안개가 희미해지자, 남궁천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남궁천을 중심으로 검붉은 기운이 화사하게 피었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개새끼네. 말을 하다 말고 공격을 해?”
손을 뻗었던 빙하운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네놈이…… 어째서 마기를?”
“궁금하냐? 그런데 그 전에 내가 물었으니 대답부터 해야지? 넌 마인이냐고.”
“후후. 내가 누굴까?”
빙하운이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를 부린다.
남궁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튼 이렇다니까. 대답은 안 하면서 궁금한 건 또 많아요. 마인이면 대가리 숙여라. 내가 바로 천마니까.”
파아아아아아앙!
순간 남궁천의 전신에서 마기가 폭사하더니, 그의 등 뒤로 천마상이 나타났다.
그 웅혼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에 빙하운이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 * *
빙궁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 어느 때보다도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막앗!”
“저쪽이다! 젠장,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이번엔 광풍사 무인들도 작정을 하고 덤비는 것 같습니다!”
“광풍사와 빙파위사단이 손을 잡았다! 방심하지 마라!”
곳곳에서 거친 고함소리와 기합소리,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연신 터져 나온다.
난장 속에서 연신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냉이겸은 목청껏 빙설을 불렀다.
“설아! 설아! 어디에 있느냐!”
분명 남궁천 일행을 지객당으로 옮기면서 빙설 역시 석방되었을 터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보다 위험한 사람이 바로 빙설이다.
광풍사 무인들이야 남궁천이 알아서 잘 설득했을 테니 괜찮겠지만, 빙파위사단은 빙하운과 빙설의 죽음을 목표로 하는 조직이다.
때마침 등 뒤에서 섬뜩한 살기가 날아들며 무인 하나가 날아들었다.
“빙궁의 하수인! 죽어라앗!”
쉬이이잇!
찰나지간 냉이겸이 몸을 뒤틀면서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일장을 뻗어냈다.
쉬이잇, 퍼엉!
“크악!”
비명을 터뜨리며 날아간 무인이 그대로 벽에 부딪치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냉이겸이 혀를 차고는 돌아섰다.
일부러 장력을 조절했으니 죽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들면 언젠간 자신도 죽여야 하리라.
빙파위사단의 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
‘남궁천, 자네는 이걸로 무엇을 노리는 것인가?’
광풍사와 빙파위사단이 동시에 휘몰아쳐 왔다는 것은, 남궁천 쪽에서 지시가 떨어졌다는 말이다.
애초에 남궁천은 아룡을 끌고 오면서 광풍사 무인들에게 몇 가지 작전을 지시했으니까.
그런데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빠른 시점에 일이 벌어졌다.
“설아! 어디에 있느냐?”
다시 냉이겸이 목청껏 부르짖었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무인들이 달려들었다.
“북해의 이름으로 빙궁을 벌한다!”
파바바밧!
이번엔 두 사람이다.
“어리석은!”
냉이겸이 검집채로 휘두르며 두 사람에게 맞섰다.
쉬땅! 따앙!
“큿!”
“윽!”
공력이 담겨 있었기에 검집에 부딪쳤음에도 빙파위사단 무인들은 온몸에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대들의 간절함은 알겠으나, 조금 더 기다릴 수는 없겠는가!”
“닥치시오! 지금껏 기다리다가 죽은 자가 몇이나 되는지 아시오?”
“결국 빙궁주에게는 간신밖에 없는 것을!”
무인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다.
어쩔 수 없다.
냉이겸은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두 사람을 보면서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렸다.
“최대한 목숨은 남겨두고 싶으나, 운이 없으면 죽을 수도 있네.”
“어디 한 번 해보시지!”
타앗!
두 무인이 바닥을 차며 날아들었다.
* * *
‘냉 장로님…… 저 어쩌죠?’
빙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 냉이겸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가려던 빙설이었다.
한데 하필이면 전각과 전각 사이의 비좁은 길을 지나다가 낯선 그림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 그림자가 하필이면…….
‘혈마불일 줄이야!’
빙설은 눈앞의 상대를 빤히 보았다.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어디서 기운을 얻은 건지, 새파란 안광을 살벌하게 뿜어내는 혈마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