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 피어나는 혈향
“뭣이? 혈마불이 탈옥해?”
“예, 총관님.”
무인이 고개를 푹 숙이며 안절부절못했다.
총관이 얼른 시선을 옮겨 빙하운의 눈치를 살폈다.
빙하운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무인과 총관, 그리고 남궁천을 번갈아 보았다.
총관이 다시 반응했다.
“도대체 빙마옥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혈마불이 탈옥한 것이야! 하필이면 지금 같은 시기에!”
“죄, 죄송합니다!”
무인은 그저 보고를 올리는 전달책에 불과했음에도 당장에라도 목이 달아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한심한! 간수장은 뭐하고 있나?”
“그, 그것이…… 간수장과 간수가 모두 백묘가 투옥되었던 방에 갇혀 있던 상황인지라…….”
“허!”
총관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얼른 빙하운을 돌아보며 말했다.
“궁주님, 우선 제가 가서 탈옥자들의 행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오.”
“앞장서라.”
“예, 총관님.”
그렇게 총관이 다시 나가고 나자, 실내에는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남궁천은 빙하운을 찬찬히 뜯어 살폈다. 그 시선을 의식한 빙하운이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뇨. 그냥 신기해서요.”
“신기하다면 어떤 것이?”
“아, 그게 뭐랄까? 제가 듣기론 빙궁의 주인은 얼음장같이 차갑고 냉정하지만, 사리분별이 밝고 덕이 많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북해의 민심이 언제나 빙궁을 향한다고.”
“한데?”
“지금 보니 너무 개차반이라서 신기하잖아요. 어쩌면 이렇게 평판이 다릅니까?”
“어디서 그런 평판을 들었나?”
“음…… 책에서 봤습니다.”
“어디서 무슨 책을 사서 읽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려서 읽는 게 좋을 것 같군.”
“그게 자랑은 아니죠.”
“자네는 항상 당돌하군.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무슨 말씀이세요?”
“어려서부터 강호신룡이라 칭송받으며 승승장구했으니 안하무인한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군요.”
“왜? 다른 뜻이라도 있는 줄 알았나? 혹여 자네가 사실은…….”
빙하운이 뭐라고 말을 이으려고 할 때, 마침 시녀가 다기를 들고 들어왔다.
시녀가 차를 따라주려고 하자, 빙하운이 손을 저었다.
시녀가 뒷걸음질로 물러간 후에 빙하운은 손수 차를 따라주었다.
“들어라. 북해에서 차를 대접한다는 것은 꽤 정성을 들인다는 뜻이지.”
“그런 것치고는 꽤나 명령조이시군요.”
“자네는 목숨이 여벌로 몇 개는 더 있는 것처럼 구는군.”
“실제로 여벌의 목숨을 얻기도 했으니까요.”
빙하운이 희미하게 웃었다.
“들은 적이 있지.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실은 한 번 죽은 적이 있었다지.”
“운이 좋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다더군.”
“네. 제가 생각해도 꽤 바뀌었어요. 그런데 궁주님은 왜 그러십니까? 죽은 적도 없으면서.”
“……?”
“사람이 저승 강을 한 번 건넜다가 돌아오면 다른 사람이 된다잖아요? 저처럼. 그런데 궁주님은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사람이 이렇게 바뀐 거예요?”
“자네는 마치 날 원래 알았던 것처럼 말하는군. 흥미로워.”
“뭐, 처음 봐도 친숙한 사람이 있고, 날마다 봐도 영 어색한 사람이 있는 법이죠.”
“그래서 나는 어떤가? 제법 친숙한 모양인데.”
“친숙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불편합니다.”
“나도 그렇다.”
“왜요?”
남궁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자, 빙하운이 조용히 찻잔을 들며 대꾸했다.
“당연한 걸 묻는군.”
순간 빙하운의 전신에서 싸늘한 한기가 폭사하듯 뻗어왔다.
남궁천은 담담히 그 기운에 맞서며 찻잔을 들었다.
“뭐가 당연한 건지?”
“빙마옥에 갇혔던 두 죄수가 탈옥했다. 백묘는 그렇다 치고. 혈마불은 왜 탈옥시켰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남궁천이 시치미를 뚝 떼고는 먼 산을 보았다.
빙하운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을 이었다.
“빙옥에서 탈옥한 자네가 한 짓과 똑같은 방식인데.”
“저만큼 똑똑한 놈들이 있나 보죠.”
“자네는 여기가 어딘지 잊은 모양이군.”
후우우우웅!
다르르르르!
다시 한번 한기가 폭사하자 탁자 위의 다기들이 떠는 소리를 내질렀다.
남궁천은 이번에도 가만히 빙하운을 지켜보기만 했다.
빙하운이 피식 웃었다.
“그렇군. 자네는 내 공력을 관찰하려는 것이군.”
“이런, 들켰군요.”
남궁천이 배시시 웃는다.
빙하운이 차갑게 조소를 지으며 묻는다.
“그래서 뭔가를 좀 알아냈나?”
“아뇨.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조화인지. 공력도 이상 없고, 흐름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나 싶군요.”
“그래서 내린 결론은?”
“역시 궁주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사람은 바로…….”
“……?”
“총관님이 아닐까 싶군요.”
“……!”
“하긴.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요.”
“…….”
“그러고 보면 총관님도 많이 활발해지셨습니다.”
“활발해져?”
“예. 책에서는 분명히 조용하고 순종적인 인간으로 묘사되었거든요. 그런데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궁주님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서 그런지 굉장히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나서서 하시는군요? 게다가 말도 못 하게 강해지신 것 같고요. 뭐, 공력을 본격적으로 운기하지 않으셨으니 아직 정확히 파악은 안 되지만 대충 그런 것 같아서요.”
“어린 주제에 눈치가 빠르군.”
“제가 눈치 하나로 평생을 버텨 와서 좀 그렇습니다. 헤헤.”
남궁천이 찻잔을 비우고는 다시 찻주전자를 들어 잔을 채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빙하운이 손을 불쑥 뻗었다. 그러자 침상 옆에 세워둔 장검 한 자루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어 손에 척 잡혔다.
능공섭물의 수법이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의 내공이 얼마나 심후한지 알 수 있었다.
스르르릉.
빙하운이 천천히 검을 뽑아내자 하얗게 빛나는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할 정도로 빛나는 검신에 남궁천의 모습이 반사되어 비쳤다.
위이이잉.
검명이 울리면서 남궁천의 모습도 묘하게 일렁인다.
더 이상 남궁천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빙하운은 강하다.
만약 지금 빙하운이 작정하고 남궁천을 베려고 한다면 승부를 장담하기 어렵다.
“지금부터는 진지하게 대답해 주면 좋겠다.”
“…….”
“남궁천.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가?”
“궁주님을 치료하려고 왔습니다.”
남궁천이 이실직고했다.
빙하운이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고는 물었다.
“나를 치료한다고? 무엇으로부터?”
“광증이지요.”
“냉이겸이 그러던가? 내가 광증에 걸렸다고?”
빙하운이 피식 웃었다.
“그럴 지도 모르겠다더군요.”
“그래서 직접 보니 어떤가? 내가 광증에 걸렸나?”
이제 검첨이 남궁천을 가리켰다.
사람을 손님처럼 앞에 두고 대접하면서 검을 겨누다니.
게다가 미묘한 살기마저 섞여 있다.
남궁천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광증에 걸리진 않았습니다. 모든 공력의 흐름은 이상 없이 확실한 의지에 따라 흘러가고 있습니다.”
“듣기 좋은 소리군.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제 곧 알게 될 겁니다.”
“내 생각엔 자네가 그 전에 죽을 것 같은데.”
우우우웅!
검명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남궁천도 더 이상은 대답 대신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빙하운을 노려보았다.
다음 순간 빙하운의 비틀린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진천랑.”
“……!”
* * *
궁주전 내원에 빙궁의 자강단(自强團)이 집합했다.
자강단은 빙궁의 수비와 수색을 전담하는 조직으로 지금처럼 탈옥자가 생기면 제일 먼저 앞장서는 무인들이었다.
총관이 자강단을 날카롭게 훑어보며 명을 내렸다.
“사악하기 짝이 없는 마인 둘이 탈옥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사로잡아라! 아니, 여의치 않으면 죽여도 좋다!”
“존명!”
“하나는 백묘로 접선을 무기로 사용하는 여인이다! 산공독을 복용했으나, 지금쯤 해독제를 섭취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방심하지 말도록!”
“존명!”
“다른 한 명은 너희들도 잘 아는 혈마불이다! 여차하면 죽여도 좋으니 반드시 찾아내!”
총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강단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총관이 얕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가늘게 여몄다.
‘남궁천……!’
모른 척했지만 이 모든 일은 남궁천이 꾸민 것이리라. 당장 남궁천을 잡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그의 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공독도 통하지 않았던 녀석이다.
괜히 녀석을 자극했다가 홀로 빙궁을 벗어나기라도 하면 절대 잡을 수 없다.
‘도망치는 것에는 이골이 난 놈이다. 전생에도 그리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쳤으니.’
무림맹의 천라지망도 뚫고 도망 다닌 무림공적 제일호가 아니던가?
빙궁이 강하긴 하지만, 녀석이 작정하고 도망간다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적당히 속아주는 척하면서 기회를 엿봐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회는…….
‘지금 이 순간, 궁주가 잡아줘야 할 텐데.’
총관이 고개를 돌리고 궁주실 쪽을 보았다.
지금쯤이면 궁주가 운을 띄웠을 것이다. 그리고 남궁천의 심기가 흔들린 찰나가 승부를 걸어볼 만한 순간이다.
‘명심해라. 진천랑을 곧장 죽여서는 안 된다!’
생각을 마친 총관이 몸을 훌쩍 날렸다. 그의 신형이 밤새처럼 날아오르더니 전각 지붕 위로 단숨에 올라섰다.
* * *
“신호다!”
빙궁이 내려다보이는 암벽 위.
몸을 바짝 엎드리고 있던 광풍사 무인 효무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또 다른 무인이 물었다.
“정말 믿을 수 있는 거요?”
“그렇다니까! 저길 보시오!”
효무가 가리킨 방향에서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약속된 신호였다.
효무가 옆에 엎드린 무인에게 말했다.
“남궁천 단주가 그랬소. 저 신호가 떨어지면 빙파위사단과 함께 빙궁을 급습하라고. 그래야 우리도 칸을 구할 수 있소!”
“오늘 갑자기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해도 우리가 쉽게 믿기 어려운 건 알잖소? 당신들이 빙궁의 하수인일 수도 있는 거고.”
“이런 염병할! 우리 칸이 지금 저기에 잡혔다니까! 안 갈 거면 마음대로 해! 우리는 갈 테니까!”
효무가 벌떡 일어나면서 광풍사 무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가자! 칸을 구해야 한다!”
“복명!”
대답과 함께 털옷을 두른 광풍사 무인들이 저마다 줄을 타고 암벽 아래로 달려가다시피 뛰어내렸다.
파바바바바밧!
순식간에 광풍사 무인들이 내려가자 남은 빙파위사단원들이 효무와 대화를 나눴던 자에게 물었다.
“단주!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한기풍 대주도 거사에 실패한 상황입니다!”
“으음.”
빙파위사단주 정이립이 무거운 침음을 흘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가자. 북해에서 밥이 완전히 익길 기다리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지. 우리도 한기풍 대주를 구하고 오늘 빙궁의 역사를 다시 쓴다!”
“존명!”
“우와아아아아!”
이번엔 빙파위사단이 함성을 내지르며 줄을 타고 암벽을 달려 내려갔다.
* * *
“방금. 뭐라고. 했지?”
남궁천이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는 사이 아련하게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궁천과 빙하운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빙하운이 담담한 표정으로 희미한 웃음을 지은 채 물었다.
“왜? 놀랐나? 진천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