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 피어나는 혈향
휘이이잉!
삭풍이 불었다.
횃불이 일렁인다.
먹을 것이 가득하고 음악이 흐르는 연회장이었지만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다.
연회장 복판에 마주 선 두 사람.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얼음장처럼 경직된 얼굴로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빙검 냉이겸.
일검에 호수를 얼려 버린다는 극강의 고수다. 늘그막에 요직에 앉아서 여생을 보내도 충분할 만큼의 능력자지만,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마지막까지 강호를 유랑하는 설응각 무인으로만 지냈다.
휘이이이잉!
다시 한번 불어온 삭풍이 냉이겸의 턱수염 끝에 끈질기게 매달린다. 겨울바람과 백염이 성성한 냉이겸의 조화는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흑의 경장에 벽라검을 척 늘어뜨리고 선 혈빙대주 한기풍.
어려서부터 빙공의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으며, 최연소 대주 자리에 올라 승승장구하면서 오늘날까지 이른 자다.
일검에 빙벽을 가른다는 한기풍이다.
평소 한기풍은 냉이겸을 존경해마지 않았고, 냉이겸 또한 한기풍을 특별히 아꼈다.
한데 오늘 이 두 사람이 북해식 생사결을 치러야만 한다. 즉, 둘 중 한 명이 이 자리에서 죽어야만 끝이 난다.
얄궂은 운명이지만, 그 운명에 대항하는 자는 없다.
궁주가 직접 내린 명령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북해빙궁에서 궁주의 말을 거역하는 자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냉이겸이 얕은 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르릉.
새파란 검신이 달빛에 시리게 빛났다. 그러다가도 날을 살짝 움직이면 일렁이는 횃불에 반사되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한 대주. 일이 얄궂게 돌아가는군.”
“죄송합니다, 장로님. 제가 신검에 눈이 멀어 욕심이 앞섰습니다.”
“괜찮네. 무인이 신병이기를 탐내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겠지. 이왕 이리 되었으니 최선을 다해보세.”
“영광입니다.”
한기풍이 검을 쥔 채로 포권하더니 곧 자세를 고쳐 잡았다.
두 사람은 이제 입을 다물고 서로를 빤히 응시한 채 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저벅저벅……!
사박사박……!
한기풍은 북극 설야를 누비는 늑대와 같은 눈빛이었고, 냉이겸은 백곰처럼 우직하면서도 든든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게 예닐곱 보를 옮겼을 때였다.
파앙!
움직임은 한기풍 쪽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의 발끝에서 공력이 발출되는 것과 동시에 눈보라가 휘날렸다.
순식간에 북풍한설처럼 휘몰아쳐간 한기풍이 검을 뻗었다.
쉬리리리리릭!
한기풍이 익힌 무공은 그의 가문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비설대검법(飛雪大劍法)이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차가운 바람에 눈보라가 휘날리는 모습을 본떠 만든 무공.
그런 만큼 그의 검신은 순식간에 눈보라처럼 쪼개지며 어지럽게 흩날렸다.
휘우우우우우웅!
수백, 수천 개의 눈보라가 냉이겸을 어지럽게 덮쳐왔다.
타다닷!
카라라라라랑!
본능적으로 보법을 밟으면서 냉이겸이 재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정말이지 두 사람이 주고받는 공방은 두 눈으로 좇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검신이 서로 부딪칠 때마다 불꽃 대신 결빙이 터져 나온다. 그러다 보니 금속성 역시 어딘지 맑지 않고 탁하다.
긴박한 비무가 펼쳐지는 중에도 악사들은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궁주가 연주를 그만하라는 별도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의 비무는 마치 음악에 맞춰 격무를 추는 것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
“대단하군.”
분명 살벌한 현장인데.
두 사람이 뜻하지 않게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넋을 놓은 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아름다웠다.
달빛 아래 결빙이 터질 때마다 얼음 폭죽이 터지는 것만 같다.
삶과 죽음의 아찔한 경계와 눈부신 결빙들. 거기에 음악이 점점 절정을 향해 달려가니 지켜보는 이들은 숨이 멎을 듯했다.
마침내 악사들의 연주가 끝났다.
동시에 두 사람의 공방전도 한 박자 쉬어가면서 일시적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훅, 훅……!”
“후우우.”
두 사람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하나 여전히 극도의 긴장 상태로 서로를 노려본다. 잠시도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내뿜는 한기에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위가 느껴지는데도, 지켜보는 이들의 손에는 땀이 맺힌다.
“대주. 본 궁을 영광으로 이끌만한 실력을 갖추셨소.”
“장로님도 본 궁의 명예를 드높일 만큼 위대하십니다.”
음악이 멈추고, 사람들 호흡이 멈추고, 삭풍도 잠시 멈춘 그 자리에 두 사람의 덕담이 오갔다.
때아닌 덕담이었지만, 그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이 뚝뚝 묻어나온다.
냉이겸이 한기풍에게 하오체를 쓰며 반존대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한기풍의 성장이 놀라웠고, 또한 이런 인재에게 검을 휘둘러야만 하는 냉혹한 현실이 미웠다.
그리고 마지막일지도 모를 대화였기에 최대한 상대를 존중하고 싶었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차린 두 사람은 다시 서서히 검신에 살기를 실어갔다.
동시에 음악도 연주가 재개되었다.
띵…… 띠딩……!
금이 흐름을 타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삭풍이 불어온다.
그동안은 두 사람이 적당히 긴장한 상태로 기운을 발출하고 있었기에 바람이 불 틈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다시 원을 그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각자의 기가 넘실거리면서 불어온 바람도 그 사이에 어울리기 시작했다.
일순 금이 큰 소리로 튕기며 본격적인 음악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을 때,
타닷!
이번에도 한기풍이 먼저 질풍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기풍의 발걸음 소리가 대금의 흐름을 타고 미끄러지듯 날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쩌엉!
삐리리리. 띠잉!
쉬땅! 띠리리리링.
두 사람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금속성과 숨결, 그리고 파공성들이 악사들의 연주와 묘하게 어울린다.
한기풍의 검신은 다시금 눈보라가 되었다. 삭풍을 타고 흩날리는 눈보라는 북극곰을 향해 맹렬히 달려든다.
하나 북극곰은 우직하다.
잘게 쪼개진 채로 덮쳐오는 눈보라가 성가시긴 해도 위협을 받진 않는다.
끝까지 고목처럼 서서 맞서 싸우던 냉이겸은 일순 번뜩이며 날아드는 검신을 보고 얼른 허리를 젖혔다.
‘위험!’
쉬이이이있!
삐이이이이!
마치 연주자들이 두 사람의 싸움에 효과음이라도 넣는 것처럼 음율이 흐른다.
사악!
검신이 스치고 가면서 냉이겸의 하얀 수염 몇 가닥이 잘려 나가 허공에 흩뿌려진다.
툭, 휘리리리릭!
띠리리링.
금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냉이겸이 바닥을 발로 찍어 차며 맹렬히 회전했다.
하나 한기풍이 일으킨 눈보라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냉이겸을 쫓아서 질주한다.
휘리리리릭!
삐리리리리.
빠르게 달려가는 음악처럼 냉이겸을 바짝 쫓는 눈보라.
따앙!
띠이잉!
금이 세차게 튕겨지면서 터져 나오는 금속성!
두 사람의 공방이 먼저인지, 음악이 먼저인지 알 수가 없다.
하나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마치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것처럼 어울린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부러 하라고 해도 어려울 것 같은 연출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간다.
이는 두 사람 모두 일정 경지에 올라섰기 때문이었다.
주변 공기의 흐름과 자연의 조화를 따르며 서로를 노리다 보니 자연스레 음악과도 한 호흡이 유지되는 것이다.
지켜보던 이 중 한 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놀랍군. 대단해. 마치 신선들이 내려와서 어울리는 것만 같구나.”
그러자 옆 탁자에 앉아서 입안 가득 뭔가를 넣고 우물거리는 사내가 툭 던지듯 말한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가?”
“당연하지. 자네는 눈도 없나? 게다가 이 상황에서도 뭘 먹다니. 지금 밥이 넘어가나?”
감탄하던 무인은 두 사람의 비무에서 시선을 떼지도 못한 채 대꾸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사내가 다시 대꾸한다.
“다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이 넘어가야지, 그럼.”
“허어. 그만 처먹고 저것 좀 보란 말일세. 정말이지 신선들의 노님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흐음. 북해빙궁에서 신선이면…… 역시 빙신이라 불러야 하나?”
“뭐든 좋지. 어쨌거나 자네도 그만 처먹고 좀 보라고. 이 사람아. 지금 밥 먹을 때가 아니…….”
말을 뱉은 남자가 그제야 옆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남자가 일순 흠칫거리더니 다시 되돌아보았다.
“어…… 누구세요?”
“나야, 나.”
차갑게 식은 고기를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던 남궁천이 제 가슴을 툭툭 쳤다.
“나라니, 누…… 어엇! 네, 네놈은!”
탁탁탁.
순간 손을 뻗은 남궁천이 상대의 마혈과 아혈을 재빨리 점했다.
결국 온몸이 얼음처럼 굳어버린 사내가 눈만 끔뻑이고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조용히 해야지. 안 그러면 집중을 못하잖아.”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다시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역시 북해가 술이 세긴 해. 북해주는 이런 맛이지. 안 그래?”
하지만 몸이 굳은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남궁천은 고개를 들어 착 가라앉은 눈으로 냉이겸과 한기풍의 비무를 지켜보았다.
대체 저 두 사람이 어째서 저렇게 서로에게 진검을 휘둘러 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볼만한 싸움이었다.
워낙 경지에 오른 두 사람이어서 그런지 주변인들은 저마다 비무 광경에 넋이 나가서 남궁천을 아예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여기에는 남궁천이 은신술을 사용한 탓도 있었다.
전생에 도망자 시절 가장 먼저 배웠던 것이 경공술과 은신술이었으니까.
몸의 기척을 숨기는 것만큼은 도가 튼 남궁천이었다.
거기에 이목을 완전히 사로잡는 비무가 진행 중이니, 편안하게 잠입해서 사람들 사이에 어울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긴 하군.’
남궁천이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지켜보았다.
이래서야 백묘가 해독제를 달라고 말할 수도 없게 생겼다.
해독제를 가진 사람이 칼을 휘두르며 살초를 펼치고 있으니, 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남궁천은 백묘를 찾을 겸 잠시 시선을 떼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마침 남궁천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내가 잘못 봤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궁천이 다시 시선을 옮기려다가 움찔거렸다.
‘역시!’
남궁천의 입매가 희미하게 뒤틀린다.
남궁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한곳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이거 얘기가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한편 냉이겸은 이제 조금씩 끝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한기풍 대주는 훌륭했다. 빙궁을 영광의 자리로 이끌 만한 인물이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상대는 아니다. 이대로 성취를 계속 이어가면 언젠간 자신을 뛰어넘을 테지만 아직은 이르다.
정말이지 이대로 죽기엔 너무나 아까운 인재.
그렇다고 어설프게 기절시키거나 죽인 척을 할 수도 없다.
그랬다간 궁주가 귀신처럼 눈치를 채고는 두 사람 모두 죽일 것이다.
역시 다른 방법이 없다.
‘미안하네. 이 늙은이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았으이. 얄궂은 운명을 탓해주게나. 대신 내가…… 자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궁주님을 잘 보필해 보겠네.’
그렇게 속으로 읊조린 냉이겸이 일순 눈빛을 달리하고는 검초에 변화를 가져갔다.
그리고 악사들의 연주가 점점 절정을 향해 치달을 때!
타닷!
냉이겸이 바닥을 차면서 대를 향해 검초를 휘둘러 갔다.
그가 좀처럼 쓰지 않는 검초 중 하나.
바로 필살의 검법.
뇌격빙산(雷擊冰山)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짜르르르르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