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96화 (496/508)

496. 피어나는 혈향

백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산공독을 복용한 탓에 비록 운기행공을 하지 못했지만, 워낙 생각에 짐중한 탓에 추위마저 잊고 있었다.

‘남궁천……! 큿!’

백묘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남궁천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경외감이 든다.

남궁천은 천마이며, 그를 결코 거역할 수 없다는 소리가 심연에서부터 울린다.

처음에는 자신이 이렇게 미쳐가는 줄 알았다. 결국에는 남궁천의 노예가 되거나 스스로 파멸하고 말 것이라고 여겼다.

한데 딱 여기까지다.

남궁천만은 거역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에는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했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했던 의식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또렷해졌다.

그러나 역시 남궁천에게만은 그 어떠한 거역도 할 수 없다.

남궁천만 앞에 있으면…….

남궁천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바보가 되어버려.’

백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정말 분하고 괘씸한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하아아.”

길게 한숨을 내쉰 백묘가 마침내 눈을 떴다.

몰입의 단계에서 빠져나오니 뒤늦게 전신을 음습하는 추위가 느껴진다.

“빌어먹을.”

정말이지 욕지거리가 절로 쏟아져 나올 정도로 춥다.

숨결에서 연신 새하얀 입김이 폭폭 뿜어져 나온다.

북해빙궁에서 마인들만을 잡아서 가두는 빙마옥.

처음 이곳에 갇혔을 때는 자신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교가 북해빙궁까지 올 일이 뭐가 있겠나?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 기척이 느껴졌다.

조금 더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숨소리.

거칠면서도 괴로움에 찬 숨소리였다. 빙마옥에 갇혔다는 것은 역시 마인일 가능성이 크리라.

백묘는 한숨을 내쉬고 어둠을 향해 물었다.

“거기. 누구죠?”

“…….”

“나는 백묘예요. 느낌상 당신은 이곳에 잡힌 지 오래된 것 같은데, 어쩌다가 빙궁에 사로잡힌 거죠?”

“…….”

“입이 무거운 분이군요.”

“크크큭……!”

안쪽에서 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백묘는 팔뚝을 타고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나 기괴했다.

백묘의 말을 인정한다는 의미인지,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비웃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절망의 끝자락에서 모든 희망을 놓아 버린 듯한 웃음소리라는 것이다.

“만약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가능한 당신도 풀어주도록 할게요.”

“…….”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아혈을 점혈당한 걸까?’

아니면 의식을 잃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척이 몹시 희미해졌으니까.

하긴. 처음부터 기척은 강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빙마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알았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당장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의 기척이다. 아니, 오히려 죽음이 더 편하게 느껴질 정도다.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냉정하다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저리도 잔인하게 고문을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얼마나 모진 고문을 당했으면 저렇게 숨이 끊어질 듯한 기력만 남았을까?

‘하긴. 잔인하기로 따지자면 본 교도 뒤지진 않겠지.’

백묘가 쓴웃음을 머금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무슨 임무로…….”

하지만 그녀는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벅저벅……!

질질……!

빙마옥 입구 쪽에서 발걸음 소리에 이어 뭔가를 끌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백묘가 살짝 긴장을 한 채 주의를 기울였다.

마침내 복도 끝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천……?’

놀랍게도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 나타난 사람은 바로 남궁천이었다. 남궁천의 손에는 기절한 두 사람의 목덜미가 사로잡혀 있었는데, 빙마옥을 지키는 간수장과 간수였다.

백묘가 갇힌 창살까지 다가온 남궁천이 히죽 웃었다.

“백묘, 잘 버티고 있었군.”

“네놈이 여길 어떻게 찾아오시다니 과연 유아독존 만인지상이십니다. 천마시여.”

제멋대로 돌아가는 혀를 놀리면서 백묘는 여전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

괘씸한 심정과는 달리, 확실히 남궁천은 늘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지 않나?

남궁천이 기절한 간수장의 허리춤을 뒤져 열쇠 뭉치를 꺼내며 말했다.

“그래. 내가 친히 널 구하러 왔다.”

“왜 굳이 나를……? 대주들도 있을 텐데요.”

“네 명을 한꺼번에 풀어주자니 너무 인원이 많잖아. 일이 잘못되면 차라리 빙옥에 있는 편이 더 안전할 거고. 빙설과 냉 장로가 힘써준다면 대주들은 최소한 살 수는 있을 테니까.”

“그럼 난 죽어도 좋다는……?”

“뭐, 그런 셈이 되나?”

“날 소모품 취급하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야지. 지금은 적랑단주가 아니라 천마로 행동하는 거니까.”

“천마지존 만세, 만세, 만만세!”

백묘는 제 뺨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어금니를 꾹 씹었다.

정말이지 마음에도 없는 말이 자꾸만 쏟아져 나올 때마다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또 말을 내뱉는 순간만큼은 그것이 진심이기도 하니 환장할 노릇이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진정한 천마를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길!”

“그래, 일단 너를 풀어줄 테니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이 빙궁에 대해 좀 알아보라고. 사실 널 풀어준 건 죽어도 상관없기 때문이기도 하니, 목숨을 아끼지 말도록.”

“내가 소모품이라고 생각하니 감개무량입니다. 천마를 위하여 기꺼이 소모품이 되겠습니다.”

“좋은 자세다. 대주들을 풀어주지 않은 이유는 안전을 위해서기도 하니까.”

“흥! 이 수모는 언젠간 반드시 은혜로 갚겠습니다. 천마시여.”

“자, 그럼 나와라.”

철컹, 끼이이익!

마침내 남궁천이 창살의 자물쇠를 열고는 문을 열었다.

백묘가 걸어 나오자 남궁천이 이번에도 간수장과 간수를 옥에 가두고는 문을 잠가 버렸다.

“네가 탈출한 건 난 모르는 일이다.”

“물론이죠.”

“그런데…… 여기 너 말고 또 마인이 있나 본데?”

남궁천이 멈칫거리고는 안쪽 깊숙한 어둠을 응시했다.

백묘가 움찔거리고는 얼른 말을 붙였다.

“나 혼자로 충분하지 않나?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않으면 몹시 서운할 겁니다. 천마의 은혜를 보여주시죠.”

정말이지 뜻하는 바와 말이 다르게 튀어나가니 백묘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옳은 소리다. 내 은혜를 보여줘야겠지.”

‘젠장! 그만둬! 나 하나 미친년 만들었으면 된 것 아니야?’

백묘가 주먹을 꽉 말아 쥐며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진 못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다른 뜻이 툭툭 튀어 나가니 어쩔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빙마옥은 깊었다.

어둠을 따라 한참이나 더 걸어가니 희미하게 빛나는 야명주 앞에 홀로 떨어진 철창이 보였다.

그저 분위기 때문일까?

세상과 단절된 공간에 외로이 뇌옥 하나가 놓여 있는 느낌이다.

남궁천이 철창 앞에 서서 안쪽을 물끄러미 보았다.

기력이 쇠하여 숨만 겨우 붙은 사내가 있었다.

“쯧……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군.”

“저자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도 저와 같은 마인입니다. 살 기회를 주신다면 은혜를 갚지 않을까요?”

“하지만 가짜 천마를 믿는 자다. 너와는 다르지.”

‘가짜는 네놈이지! 나의 영광스러운 천마시여! 젠장!’

백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젠 생각마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남궁천이 자신의 천마로 자리 잡을 듯하다.

하지만 적어도 저 남자가 남궁천을 천마로 여기는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두고 가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기력이 많이 쇠한 자니까요.”

다행히 이번엔 말이 제대로 나왔다. 딱히 남궁천에게 반항하는 내용이 아니어서 그런 듯했다.

하지만 남궁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우리가 불리한 상황이다. 불리할 땐 변수가 많을수록 유리해지지. 어떻게든 판을 뒤집어야 할 테니까. 저자가 판을 뒤집을 만큼 영향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풀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하면 저자도 천마를 모시도록 할 생각인지요?”

“후후. 백묘.”

“말씀 듣겠습니다. 천마시여.”

“너처럼 충성스러운 교인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를 당장 풀어준다고 해서 내 심복으로 삼을 순 없어. 그냥 알아서 살든지 죽든지 내버려 둘 수밖에.”

“아…….”

“선택은 저자의 몫이겠지.”

말을 마친 남궁천이 다시 철창을 열었다.

철컹! 끼이이익……!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파밧!

기력이 쇠해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사내가 갑자기 범처럼 몸을 날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생의 마지막 기운을 다 짜낸 것만 같았다.

그는 정확히 남궁천의 목을 노리며 손을 뻗어왔다.

쉬이이이잇!

하지만 그 순간 백묘가 앞을 가로막으면서 사내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금나술을 펼쳤다.

우두둑! 휘익!

콰다아앙!

“크억!”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사내가 피를 울컥 토하면서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후우.”

백묘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제길, 이번에도 이 녀석을 구해줘 버렸어!’

사내가 남궁천을 노리는 순간 반사적으로 나서게 된 것.

금나술은 기본적으로 내공이 없어도 펼칠 수 있는 기술인 데다, 상대의 기력이 워낙 미미한 상태였기에 통한 셈이었다.

남궁천이 백묘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다. 산공독 때문에 공력도 운기할 수 없을 텐데 제법이었어.”

“네깟 놈에게 칭찬을 받아봐야 감개무량일 따름입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런데 이자는 곧 죽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네.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기적이야. 삶에 대한 집착이 상당한 녀석이네. 혹시 아는 자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남궁천이 침음을 흘리다가 쓰러진 사내의 맥을 짚어보았다.

역시 초견파공안으로 본 것처럼 체내에 마기가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고문을 당한 탓인지 공력이 몹시 불안하고 불규칙적으로 흐른다.

“꽤 지독하게 고문당했군. 손톱, 발톱이 전부 빠져 있고 혀도 잘라 버렸어.”

“아, 그래서 말을…….”

“이왕 구했으니 변수를 주려면 최소한 움직일 힘은 있어야겠지.”

남궁천은 사내의 훈혈을 점해서 기절시키고는 몇 군데 요혈을 다시 점하면서 기를 슬쩍 불어넣었다.

이걸로 사내는 일각 후에는 정신을 차릴 것이고, 한동안 가벼운 싸움 정도는 소화할 내공이 생길 것이다.

특별히 마기를 불어넣었으니, 사내가 지니고 있던 기운과 상성도 잘 맞을 것이다.

“그만 가자.”

남궁천이 일어나서 몸을 돌리자 백묘가 말없이 뒤를 따랐다.

그녀는 쓰러진 남자를 힐끔 보고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주 낯선 얼굴은 아니다.

한 번쯤은 교내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뜻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만약 마주쳤어도 아주 오래전에 본 것이리라.

백묘는 남궁천을 따라 빙마옥을 나서면서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긴. 연회장으로 가야지. 배고프다. 뭐 좀 먹어야겠어. 너는 해독제부터 찾아서 먹도록.”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먹는데, 미련한 제가 거기까진 알 수가 없습니다.”

“확실히 미련하네.”

“이익! 그건 다 정확하십니다.”

“냉이겸 장로를 찾아. 해독제를 가지고 있을 거야. 지금부턴 각자 행동한다. 붙어 다니면 같이 위험에 빠질 수 있으니.”

“자꾸 명령조로 말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조심하도록.”

남궁천이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은 곧 야조가 되어서 날아올랐다.

아니…… 공력이 없는 백묘는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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