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 얼어붙은 빙궁
‘어째서 소름이…….’
빙설은 저도 모르게 양팔을 쓰다듬었다. 북해빙궁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추위 하나만큼은 늘 거뜬하다고 자신했다.
한데 지금 남궁천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전신에서 오싹한 소름이 돋아났다.
북극의 망망대해에 홀로 선 기분이다.
남궁천의 눈은 일순간 시커먼 바다가 되어서 사방을 에워쌌다. 그리고 홀로 선 빙설을 절망의 끝자락까지 이끄는 듯했다.
손끝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몸이 떨려오고 목소리도 떨렸다.
“좋, 좋아요. 할게요. 아버지의 광증을 고칠 수만 있다면요!”
비록 목소리는 떨렸지만 표정만큼은 확고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하지만 한 가지. 내가 궁주의 광증을 고칠 수 있으리라 보장할 순 없소.”
“그건…….”
“또한 궁주가 광증이 아닐 수도 있소.”
“……!”
“어디 한번 말해보시오. 소저는 궁주가 정말로 광증에 걸렸다고 생각하시오?”
“……전…….”
빙설이 어금니를 꾹 씹고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는 정말 광증에 걸린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아버지는 달라지셨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광증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나?
아버지에게 거리감을 느낄 때부터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빙궁주가 광증에 걸렸다고.
그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거다’ 싶었다. 그게 아니고선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어쩌면…….
‘차라리 광증이길 바란 건지도 모르고.’
그래야만 아버지가 원래대로 돌아갈 희망이 있으니까.
만약 광증이 아니라 정말로 아버지가 변한 것이라면…….
‘아버지는 돌아올 수 있을까? 무엇이 아버지를 그렇게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빙설이 선뜻 답을 이어가지 못하자, 남궁천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초견파공안으로 본 결과 공력의 흐름에서 광증의 양상은 전혀 볼 수 없었소.”
“아…….”
빙설은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아버릴 수는 없다.
그녀가 얼른 중심을 잡고는 남궁천을 보며 물었다.
“그래도 비무를 해야만 더 확실한 공력의 흐름을 볼 수 있다면서요? 그땐 결과가 또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가능성은 희박할 거요.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아…… 그런가요?”
빙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남궁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비무 중이 아니라서 활발한 공력의 흐름을 보진 못했다.
하지만 시종 차분한 공력의 흐름에서 광증을 겪는 무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양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모든 공력의 흐름이 의도적이거나,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온 습관이라는 뜻이다.
“만약 광증이 아닐 경우 소저는 어디까지 각오하고 있소?”
“어디까지라는 건……?”
“빙궁주를 죽여도 좋소?”
“……!”
“만약 궁주가 날 죽이려고 한다면, 나 또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소.”
“아…….”
빙설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거기까지 각오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남궁천의 전신에서 미묘한 살기마저 전해지는 것 같다.
이 엄중한 분위기 때문에 빙옥은 숨이 멎을 듯 긴장감이 흘렀다.
다른 방에 갇힌 대주들도 숨소리를 죽이며 빙설의 대답을 기다렸다.
빙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남궁천은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죽여도 된다고 말하라고 압박하는 듯하다.
하지만 딸로서 어찌 아버지를 죽여 달라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내 각오가 너무 어설펐던 거야.’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다시 중심을 잡기 위해서 한 걸음 내디딘 순간!
휘리릭!
창살 사이로 뻗어 나온 남궁천의 손이 빙설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잽싸게 금나술을 펼쳤다.
“꺄악!”
저도 모르게 빙글 돌아선 빙설은 남궁천에게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남궁천은 오른손으로 빙설의 가느다란 목을 옭죄며 속삭이듯 말했다.
“움직이지 마시오. 경동맥을 쥐고 있으니 여차하면 목숨이 끊어질 수 있소.”
“큿……!”
빙설이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입을 열지 못했다. 목이 너무 아팠다. 거기에 남궁천이 뿜어내는 살기는 심장을 쥐어짜듯 강렬했다.
‘이 사람……! 진심으로 날 죽이려고 하고 있어!’
이성적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본능은 삶에 대한 집착으로 발버둥 친다.
머릿속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 버렸다.
이 순간 빙설은 연기고 뭐고 그저 살고 싶다는 욕망만 앞섰다.
아버지를 치료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이렇게 죽을 수는 없는데!
목을 옭죄는 고통도 잊은 채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갈 때쯤, 입구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목소리가 뒤엉키듯 들려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괜찮으십니까?”
간수장과 간수였다.
“살, 살려……! 크읍!”
겨우 말을 꺼내던 빙설은 다시 한번 목을 거칠게 움켜쥐는 남궁천의 손길 때문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말이지 이대로 목이 통째로 뜯겨져 나갈 것만 같았다.
최대한 공력을 끌어올려 버티고 있었지만, 여차하는 순간 그대로 숨통이 끊어질 듯했다.
‘남궁천을 너무 믿은 걸까?’
이렇게 돌변할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면 무리한 시도는 하지 않았을 텐데.
마침내 간수장과 간수가 횃불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헉! 아, 아가씨!”
“네놈은……!”
간수장과 간수가 걸음을 멈추고는 경악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그들은 남궁천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지금 남궁천은 감정이 없는 독사 같았다.
그저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간수장과 간수를 보면서 입매를 슬쩍 비틀 뿐이었다.
“문 열어. 안 그러면 이 여자는 죽어.”
느긋하게 흘러나온 말이다.
하지만 그 말투에 진심이 뚝뚝 묻어나온다. 거기에 살기가 폭증하니 당장에라도 빙설은 목이 찢어져 죽을 것만 같다.
“그, 그만 둬! 침착해라! 네가 여기서 나가봐야 사방이 본 궁의 무인들로 가득하다! 탈출은 불가능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아무래도 말이 안 통하네.”
말을 마친 남궁천이 살기와 함께 손에 힘을 실었다.
“으윽……!”
목이 옭죄인 빙설이 눈을 질끈 감으면서 신음을 흘렸다. 이젠 호흡조차 불가능할 지경.
보다 못한 팽수혁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단주! 그러다 정말 죽어! 정신 차려!”
팽수혁도 더 이상 연기가 아니었다.
연기고 나발이고 이러다가 정말로 빙설이 죽을 것만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빙설의 안색은 이제 시퍼렇다 못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빙설은 몸에서 조금씩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목을 옭죄는 남궁천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지만, 더 이상 버틸 기력도 없었다.
툭!
마침내 빙설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빙 소저!”
“아가씨!”
팽수혁과 간수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간수장이 얼른 허리춤의 열쇠 뭉치를 꺼내며 외쳤다.
“이 미친놈! 그만! 열, 열쇠를 주겠다!”
“형님! 정말 탈옥시킬 생각입니까?”
“이런 염병할! 그럼 어쩌라고! 이대로면 아가씨가 죽게 생겼는데!”
“그, 그건 그렇지만…… 젠장!”
간수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다.
남궁천이 악귀보다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자, 지금부터 셋을 센다. 그때까지 문을 열지 않으면 탈옥은 포기하지.”
“……!”
“대신 이 여자도 죽는다.”
“기, 기다려!”
“하나.”
“이런 미친……! 기다리라고!”
“둘.”
“제기랄!”
간수장이 덜덜 떨면서 열쇠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너무 긴장한 탓에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기, 기다려! 연다! 열어주겠다!”
“단주! 천천히! 열어준다잖아!”
팽수혁이 창살까지 달려 나와서 외쳤다.
갑자기 남궁천이 왜 저렇게 변했단 말인가?
혹시 이 빙궁에 뭔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기운이라도 있는 걸까? 그래서 궁주도 그리 변한 것일까?
정말이지 지금의 남궁천은 평소답지 않다. 앞뒤 가리지 않고 그저 살심에 사로잡힌 인간 같지 않은가?
탈출은 핑계일 뿐 실제론 그저 빙설을 죽이고 싶다는 일념만 가득한 것 같다.
‘남궁천! 정신 차려라! 그러다가 정말 빙 소저가 죽는다!’
팽수혁이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
하지만 싸늘하게 웃는 남궁천의 표정에는 자비라곤 들어 있지 않았다.
“셋.”
“안 돼!”
철컥!
마침내 간수장이 창살문을 열었다.
“열, 열었다! 이제 아가씨를 놔줘! 어서!”
빙설은 이미 의식을 잃은 것인지 전신이 축 늘어져 있었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손을 놓았다.
“늦었어.”
털썩!
남궁천이 손을 놓자 빙설이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졌다.
“아가씨!”
간수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쓰러진 빙설의 목에 손을 대었다. 간수장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돌처럼 굳어서 지켜보았다.
“어, 어떠냐? 아가씨는 무사하신가!”
“희, 희미하긴 하지만 맥이 뛰고 있습니다. 아직 살아 계십니다!”
“이 개자식! 문을 열었는데, 왜 그렇게까지……!”
간수장이 휙 돌아서다가 빙상처럼 굳으면서 말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밖으로 나온 남궁천이 서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빠악!
쿠당탕탕!
그대로 튕기듯 날아간 간수장이 빙옥 안에서 아무렇게나 굴렀다.
“형님!”
“시끄럽다. 그 여자 데리고 스스로 들어갈 것이냐? 아니면 내가 예정대로 죽여줄까?”
“……!”
간수가 어금니가 부서져라 깨물었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 게다가 어찌 된 것인지 산공독을 먹였음에도 감히 범접하기도 어려운 강기가 느껴진다.
후우우웅.
실제로 남궁천의 손에 강기가 맺혔다.
주변이 온통 죽음으로 가득한 것만 같다. 시산혈해가 된 현장에 남궁천 홀로 우뚝 선 것만 같다.
‘이, 이건…… 마치 대살성의 기운……!’
무릎이 달달 떨린다.
거역하면 반드시 죽는다. 빈말이 아니다. 눈앞의 이 남자는 그저 살육에 도취된 광마다.
주춤주춤 물러나던 간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빙설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덜덜 떨면서도 남궁천 곁을 조심스레 지나서 스스로 빙옥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이익, 철컹!
마침내 창살문이 닫혔다.
이제 입장이 완전히 바뀐 상황.
간수장은 서둘러 빙설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죽진 않았구나.’
부상을 좀 입은 것 같지만, 안정을 취하고 운기행공을 한다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이다.
“너는 지금 실수하는 거야! 여길 나간다고 빙궁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가!”
“누가 빙궁을 벗어난다던가?”
“뭐?”
남궁천의 무감한 대답에 간수장이 멍하니 대꾸했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애초에 빙궁에 볼일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끌려오지도 않았을 터.”
말을 마친 남궁천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경직된 얼굴로 지켜보는 팽수혁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연기는 이렇게 하는 거다.]
“하아.”
다리에 힘이 풀린 팽수혁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저게 연기라고……?’
차원이 달랐다.
도저히 연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오히려 빙설마저 그 상황을 진짜라고 인지해 버리지 않았나?
도대체 저 녀석은…… 못하는 게 뭐야?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팽수혁이 순간 잊은 게 생각난 듯 머리를 휙 들었다.
그가 얼른 창살을 쥐고는 멀어져가는 남궁천을 향해 소리쳤다.
“야! 우리는 왜 안 풀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