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 얼어붙은 빙궁
“흐아아암!”
간수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면서 빙옥각으로 들어섰다.
빙옥각은 빙옥을 지키는 간수실로 빙벽 아래에 제법 너른 공간을 만들어 사용하는 장소였다.
한쪽 벽면이 투명한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었기에 안에서 바깥이 훤히 보인다는 게 특징이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탁자에 발을 척 올려두고 있던 간수장이 이제 막 들어선 간수를 보면서 툭 던지듯 물었다.
“네놈은 종일 자다 일어났으면서 또 하품이냐?”
“형님, 이건 졸려서 나오는 하품이 아닙니다.”
“그럼 피곤해서?”
“그것도 아니고요.”
“그럼 왜 하품질이야?”
“지루해서요.”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 들어보네. 빙옥 지키는 간수 일이 다 그렇지. 하루 이틀 해본 것도 아니고. 올해로 네가 오 년 차였지?”
“네, 지긋지긋한 세월이었죠.”
“그럼 적응할 때도 됐구만. 나는 내년이면 십 년 차다.”
“뭐, 사실 별로 불만은 없습니다요. 조금 지루하긴 하지만 편한 일이니까요. 요즘 같은 시기에 빙궁에 들어오지 못했다면 굶어죽었을 수도 있고.”
“그런데 얼굴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인데?”
“그야 그럴 수밖에요.”
“왜?”
“아니,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지금 빙궁에서는 연회가 열렸다고요. 술과 음식이 넘쳐나겠죠. 귀를 한번 잘 기울여 보세요.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따악!
간수장이 간수의 뒤통수를 후려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들리긴 뭐가 들려? 바람 소리밖에 안 들리는구만.”
“아이참, 제가 이렇게 환청이 들릴 정도로 상심이 크다고요. 모처럼 연회인데 우리는 여기 죽치고 앉아서 빙옥이나 지켜야 하고. 지금쯤 연회장에서는 술과 고기를 먹고 있겠죠. 게다가 오랜만에 돌아오신 빙설 아가씨의 아름다운 외모도 실컷 볼 수 있을 테고. 아아, 정말 부럽다, 부러워!”
“시끄럽다. 죄수들은 상태가 좀 어떠냐?”
“뭐, 다들 얌전합니다. 아닌가? 다들 맨손 체조 같은 걸 하고 있습니다.”
“추워서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죠. 중원인들이잖아요.”
“하긴.”
“그런데 형님은 정말 억울하지 않습니까? 이런 날 빙옥이나 지키고 있는 게! 저는 지금 환청을 넘어 환영까지 보인다고요.”
“무슨 환영?”
“눈꽃보다 아름다운 빙설 아가씨가 술과 고기를 들고 앞에 서 있는 환영요.”
피식.
간수장이 헛웃음을 짓고는 다시 간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정신 차려, 인마. 빙설 아가씨가 시녀도 아니고 왜 술과 고기를 들고 빙옥을 찾아…… 오셨는데?”
“어……? 형님도 보이시는 겁니까?”
“그러게.”
간수장이 눈을 끔뻑이면서 투명한 빙벽 너머를 빤히 응시했다.
확실히 횃불 아래에 서 있는 여인은 빙설이 틀림없었다.
빙설이 총총 걸음을 옮기더니 빙옥각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제야 간수장과 간수는 자신들이 본 게 헛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벌떡 일어나면서 포권했다.
“빙설 아가씨를 뵙습니다!”
“아가씨, 누추한 곳에는 어인 일로……!”
빙설이 생글 웃으며 손에 든 술과 고기를 보여주었다.
“두 분이 고생하시는데 연회에 참석도 하지 못하시니, 영 마음이 쓰여서요. 제가 이렇게 술과 고기를 가져왔답니다.”
“오오오!”
간수장과 간수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눈꽃보다 아름다운 빙설이 이렇게까지 자신들을 생각해 주니 감동할 수밖에.
두 사람이 동시에 손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아가씨의 따뜻한 마음은 북해빙벽마저도 녹일 것입니다!”
“에이, 별말씀을요. 저는 절대로 사심이 있어서 이렇게 온 게 아니랍니다. 어디까지나 두 분을 위해서랍니다. 결코 술과 음식을 드리면서 속으로는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랍니다.”
“…….”
“…….”
잠시의 어색한 침묵이 흐른 끝에 간수장과 간수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하하하하!”
“역시 빙설 아가씨는 농담도 재미있게 하시는군요.”
“농담……?”
빙설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간수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저희를 이만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아마 빙궁에서도 빙설 아가씨밖에 없을 겁니다. 아가씨라면 사심 가득 찾아오셔도 언제든 환영입니다!”
“와! 정말요? 그럼 진짜 제가 원하는 걸 말해도 들어주실 건가요?”
“……?”
“아! 물론 저는 지금 사심이 전혀 없어요! 결코 빙옥에 갇힌 죄수를 만나보고 싶다거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술과 음식을 가져와서 여러분을 꼬드기거나 하는 게 아니랍니다!”
“…….”
“…….”
잠시의 침묵이 또 한 번 흐르고.
“하하하하.”
“하하. 하하.”
약간은 어색해진 웃음이 간수장과 간수 사이에서 흘렀다.
간수장이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음식을 보다가 물었다.
“여기 얼음을 갈아서 콩가루를 뿌린 건 무엇입니까?”
“아, 이건 제가 한번 만들어본 거랍니다. 생각보다 맛이 괜찮아요. 제가 종종 냉이겸 장로님께 만들어 드리곤 하거든요.”
“호오, 그럼 한번 먹어봐도 됩니까?”
“물론이죠. 여러분 드시라고 가져온 거니까요.”
“그럼!”
간수장이 숟가락으로 콩가루를 뿌린 얼음 가루를 푹 떠서 한입 삼켰다.
잠시 후 그의 눈이 퉁방울처럼 커졌다.
“오오, 정말 맛있습니다! 마치 북해의 바다사자가 수면 아래로 세차게 헤엄치며 춤을 추는 듯한 맛입니다!”
“형님 말씀대롭니다. 정말 맛있네요. 콩가루와 얼음 가루가 절묘하게 섞여서 기가 막힌 맛을 내는군요. 아가씨, 이 음식 이름이 뭘까요?”
“으음. 글쎄요. 아직 진지하게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제가 만든 거니까 설빙이 어떨까요? 제 이름을 거꾸로.”
빙설이 생글 웃는다.
달빛만큼이나 아름다운 그 미소에 두 사람에 헤벌쭉 웃으며 엄지를 척 올렸다.
“설빙 최고.”
“감사해요.”
“그럼 잘 먹겠습니다!”
“네. 그런데…… 저어…….”
“……?”
“오늘 잡혀온 죄수를 볼 수 있을까요?”
“흐음. 왜 그러시는지 한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이럴 목적으로 온 건 아니에요. 그냥 온 김에 겸사겸사 구경해 보고 싶어서요.”
“구경이요?”
“아, 절대로 제가 그 죄수들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서 그런 게 아니랍니다. 사전에 어떤 약속을 했다거나, 그 죄수들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게 아니랍니다! 호호호. 죄수는 죄수일 뿐이죠. 간수님들도 참 짓궂으셔라.”
“어…… 저희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무튼 전 그 죄수들과 어떠한 약속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저 구경하고 싶은 것뿐이랍니다.”
“그, 그렇군요.”
간수장이 애매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간수가 눈치를 살피다가 간수장의 귓가에 대고 전음을 흘렸다.
[형님, 제가 살짝 들은 게 있습니다.]
[뭐냐?]
[그게 말이죠. 아가씨가 죄수 중에 팽수혁이라는 녀석과 눈을 찡긋 찡긋하면서…….]
간수는 오늘 낮에 궁주전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나마 전했다. 극 대노한 냉이겸이 팽수혁을 두드려 패서 기절시킨 이야기까지.
고개를 끄덕인 간수장은 조금 측은한 시선으로 빙설을 보았다.
‘그랬구나. 하긴 긴 여정을 이어오면서 죄수와 정이 생길 수도 있겠지. 기실 그자는 빙궁에 딱히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사랑은 칼로 물 베기가 아니던가? 아가씨가 힘겨운 사랑을 시작하셨구나.’
눈시울까지 촉촉하게 젖어드는 간수장이었다.
“커흠! 아가씨. 힘내십시오.”
“네? 아, 어…… 네.”
“아가씨는 절대로 죄수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서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그저 온 김에 겸사겸사 죄수를 구경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네,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예, 아가씨! 부디 힘내십시오! 저는 아가씨를 언제나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해요.”
“면회 시간은 일각입니다. 그 이상은 저도 어렵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아아…… 그 정도라도…… 크흡. 안구에 자꾸 습기가…….”
콧잔등을 지그시 누른 간수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감사해요, 간수장님.”
“별말씀을요. 아가씨가 가시는 길을 언제나 응원하겠습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지 않습니까?”
“네? 간수장님은 절 사랑하시나요?”
‘아니, 왜 얘기가 그렇게 됩니까!’
간수장이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아…… 그럼 다녀올게요.”
“네, 모쪼록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간수장과 간수가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빙설이 예쁘게 미소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했다.
‘팽 소협. 제 연기가 이제 팽 소협만큼이나 완벽해진 모양이에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빙옥 안으로 들어선 빙설은 지하 깊숙한 곳까지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했기에 공력을 운기 해서 몸을 보호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내려가자 저만치 복도 끝에서 후끈한 열기가 전해져 왔다.
빙옥에서 열기라니.
가까이 다가가니 거친 숨소리와 열기가 더해진다.
마침내 빙옥을 들여다본 빙설은 입을 딱 벌렸다.
유현은 연신 좁은 방에서도 이리저리 움직이며 손을 휘둘렀는데, 마치 가상의 검이 눈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팽수혁과 윤종승은 연신 권장을 뻗으며 수련을 했고, 당우기는 작은 얼음 알갱이들을 벽에 투척하면서 훈련하고 있었다.
마침 팽수혁이 먼저 빙설을 알아보고는 소리쳤다.
“오! 빙 소저! 와주었구려!”
“네, 다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우리야 뭐 뇌옥에 갇힌 상태이니 무사하지 않을 이유도 없소. 빙 소저가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역시나 훌륭한 연기로 모두를 속인 모양이구려.”
“네, 팽 소협의 연기를 떠올리면서 열심히 했더니 다들 깜빡 속더라고요.”
“하하하하! 역시! 내가 뭐랬소? 훌륭한 연기는 믿음, 소망, 사랑만 있으면 된다니까.”
“정말 그러네요.”
두 사람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른 이들은 ‘정말 괜찮은 걸까?’ 하는 고민을 해야만 했다.
두 사람의 수다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후 남궁천이 창살로 걸어왔다.
“잡담은 거기까지만 하고. 이제 날 꺼내줘야 하지 않겠소?”
“아…… 네!”
빙설이 얼른 남궁천에게 돌아섰다.
빙옥에 갇힌 남궁천을 보니 뭔가 또 다른 느낌이 든다.
굉장히…….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역시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가 낯설다.
‘왜 이 사람에게서만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가 풍길까?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마치 아버지 또래를 보는 것만 같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남궁천을 빙옥에서 꺼내는 일.
그런데…….
“어……? 그러고 보니 열쇠가…….”
빙설이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당우기가 허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요? 그럼 열쇠도 안 가지고 와서 우릴 꺼내주겠다고 한 거요?”
“아…… 마음이 너무 앞섰나 봐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기도 해서 긴장도 많이 하고.”
“허!”
당우기가 헛웃음을 짓자 빙설이 더욱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남궁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럼 작전을 변경합시다.”
“어떻게요?”
남궁천이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내밀었다.
단순한 행위였을 뿐인데도 당장에라도 남궁천이 창살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위협감이 느껴진다.
‘고작 이 정도로 이렇게나 분위기가 달라지다니.’
빙설이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데,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연기 좋아하는 것 같은데. 한 번 더 해보는 게 어떻겠소? 아주 실감 나게.”
“어, 어떤…….”
“빙 소저가 내 인질이 되는 거요.”
서늘하게 가라앉은 남궁천의 목소리를 들으며 빙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될까요?”
“가장 깔끔한 방법이겠지.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대신 상황에 따라 조금 다칠 수는 있소.”
남궁천의 눈이 빙벽처럼 시린 빛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