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93화 (493/508)

493. 얼어붙은 빙궁

냉이겸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빙하운은 달빛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냉이겸은 안다. 저 웃음이 진실된 것이 아님을.

언제부턴가 빙하운의 웃음은 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웃음만으로도 상대를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싸늘한 한기로 가득 찬 북해빙궁에서 땀이 흐를 정도로 긴장한 것이다.

우습게도 이 순간 냉이겸은 궁주가 얼마나 강할지 가늠해 보았다.

무림칠성보다 강할까?

답은 금방 내려졌다. 강할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강한지 약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무림칠성과 싸우게 되면 이길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될 만큼 확신이 선다.

그렇다면 자신과 싸우면 어떨까?

과연 자신이 궁주를 이길 수 있을까?

틀렸다.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틀려먹었다.

만약 이길 싸움이었다면 이런 질문 따위가 떠올라서는 안 된다.

그냥 이기면 될 문제니까.

확실히 궁주는 강하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하면 남궁천과 싸우면 어떨까?

우습게도 답을 내리기 어렵다.

무림칠성보다 남궁천이 더 강하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무림칠성을 이길 수 있는 궁주와 싸우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아마도 의외성 때문이리라.

두 사람 다 어디로 튈지 모를 의외성이 있으니까.

강호에서 의외성은 곧 생존력이나 마찬가지다.

‘나도 참. 이 와중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생각은 길었지만, 실제로 걸린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냉이겸이 차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더니. 한동안 궁을 떠나 있었다고 금세 구조를 잊은 모양입니다. 반대 방향이었군요.”

“후후. 그렇소? 건망증이 심해진 모양이오.”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게 죄송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뭐, 그렇게 죄송하다면 정말 죽어보시겠소?”

“……!”

빙하운이 새파랗게 빛나는 검신을 쑤욱 내밀더니 검첨으로 냉이겸의 목을 겨눴다.

위이이잉.

날카로운 검명을 울리는 검신.

달빛을 받은 검신은 얼음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 금방이라도 여린 살갗을 파고들 것만 같은 예기까지 품고 있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것만 같은 긴장 상태.

빙하운이 빙그레 웃었다.

“그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많은 일을 겪었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 겪지 않은 것이라면 역시 죽음뿐인가?”

“…….”

“하나 그런 경험을 내가 선물해서는 안 되겠지. 농담이었소.”

“늙은이를 지나치게 놀리시는군요.”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오. 당연히 냉 장로는 내 농을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했소.”

“…….”

냉이겸이 대답 대신 가만히 빙하운을 바라보기만 했다.

빙하운은 여전히 검신을 뽑아 든 채로 냉이겸을 겨누고 있었다.

보다 못한 총관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궁주님, 그만 검을 거두시는 게 어떠신지요? 냉이겸 장로가 불편할 듯합니다.”

“아…… 그렇군. 내가 정신이 이렇게 없소.”

피식 웃은 빙하운이 검을 거뒀다.

하나 여전히 검집에 갈무리하는 대신 달빛에 검신을 비춰보기만 했다.

묘한 긴장감이 달빛을 타고 흐르는 가운데, 냉이겸이 심호흡을 하고는 작정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지요?”

“으음?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빙하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냉이겸이 아까보다 가라앉은 눈빛으로 마주 보며 말했다.

“아까부터 그 검을 꺼내신 것은…… 농이 아니라 진정으로 저를 참수하시려는 것 같습니다만.”

“아…… 이거.”

빙하운이 그제야 알았다는 듯 들고 있던 검신을 힐끗 보았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냉이겸을 다시 보았다.

“냉 장로. 오늘 자꾸만 앞서가는구려.”

“…….”

“그리 앞서가다가 정말 인생마저 앞서 떠날까 걱정되는군.”

냉이겸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잠시 뜸을 들이던 빙하운이 검신을 들어 보였다.

“이거 모르시겠소?”

“……?”

“이런. 내가 너무 겁을 준 건가? 잘 보시오. 이 검. 내 검이 아니오.”

“아……!”

그제야 냉이겸이 검신을 자세히 보고는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지 못했다.

게다가 뜻밖에도 궁주와 만나는 바람에 너무 긴장한 탓도 있었다.

한데 이제 보니 빙하운이 들고 있는 검은 확실히 그의 것이 아니었다.

빙하운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남궁천이 가지고 있던 검이오. 듣기로는 남궁세가에서 대를 물려 전해져 오는 보검이라더군. 그러니 이전에는 천하제일룡이라 불렸던 남궁선의 검이었을 거요. 참으로 명검이 아니오?”

척!

순간 검신이 어두운 허공을 가르며 다시 냉이겸의 심장을 겨눴다. 빙하운이 씨익 웃으며 검을 살짝 뒤틀었다.

“이러면 기분이 나쁘려나? 늙은 장로에게 이런 짓궂은 장난은 역시 심장에 좋지 않겠지.”

“궁주님…….”

옆에 선 총관이 안절부절못하며 냉이겸의 눈치를 살폈다.

빙하운이 손을 들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게. 그냥 좀 자세히 보라고 이러는 거요. 내가 왜 공을 세운 냉 장로를 위협하겠소. 상을 주어도 모자랄 판인데.”

“오늘따라 장난이 심하십니다.”

“후후. 우리 냉 장로께서 기분이 많이 상하신 모양이군. 흐음. 하면 이 검이라도 선물할까?”

휘리릭!

빙하운이 가벼운 손놀림으로 벽라검을 거꾸로 쥐며 내밀었다. 마치 손만 뻗으면 벽라검을 하사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냉이겸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애초에 무인에게 검이라는 것은 인생의 동반자와 같은 것. 저는 이미 제 손에 익은 빙결검이 있습니다.”

“그렇소? 그럼 이건 내가 가져야겠군. 과연 제왕의 가문이 가진 보검답게 빙백신공도 잘 담아내는 검인 것 같아서 말이오.”

“그렇군요.”

냉이겸이 무미건조하게 대꾸하자 빙하운이 피식 웃으며 벽라검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휘리릭, 철컥!

그 일련의 동작이 무척이나 매끄럽고 깔끔했다. 단순한 행동 하나만으로도 냉이겸은 직감할 수 있었다.

‘궁주는 강하구나.’

하긴 당연하다.

대대로 빙백신공에 최적화된 혈통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빙백신공 특성상 불혹을 넘기는 순간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문제는 그때쯤부터 궁주의 성격이 어딘지 변했다는 것이지만.

“갑시다. 연회를 즐기러.”

“예, 궁주님.”

결국 냉이겸은 빙옥으로 향하지 못한 채 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래도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 된 것이 감사한 일이었다.

그렇게 연회장으로 돌아오니 과연 아직도 많은 사람이 술과 음식, 그리고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빙하운은 최상석에 앉아서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하나 빙하운이 없을 때만큼의 떠들썩한 분위기는 이어지지 않았다. 궁주가 얼음장 같은 얼굴로 술만 마시고 있으니, 저마다 눈치를 보게 된 것이다.

빙하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다들 왜 눈치를 보고 있소? 오늘은 기쁜 날이니 마음껏 즐기도록 하시오.”

“예, 궁주님.”

“감사합니다, 궁주님.”

“궁주님의 아량이 북해만큼 넓습니다.”

모두가 입에 발린 소리를 떠들어댔다.

하지만 역시나 마음 놓고 즐기며 떠드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딘지 절제된 연회.

악사들의 연주는 흥겨웠지만, 왠지 모르게 연회장 분위기와 따로 노는 듯했다.

한편 냉이겸은 아까부터 연신 눈알을 굴리며 빙설을 찾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빙설의 모습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실패한 줄 알고서 나 대신 빙옥으로 간 것이로구나! 한데 빙옥의 열쇠가 없을 텐데?’

냉이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술잔만 매만지는데, 옆에 앉은 빙하운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설이가 안 보이는군.”

“급한 용무가 생긴 모양입니다.”

측간에 갔을 거라는 말을 나름 돌려서 전한 것이었다.

다행히 빙하운도 더는 문제 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는 모두가 듣도록 조금 더 강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즐기시오.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지 않소? 굳이 연회장에서까지 여기가 빙궁이라는 걸 드러낼 필요는 없잖아.”

농담에 몇몇 이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하나 지극히 형식적인 반응이다.

곧이어 수뇌 인사들을 중심으로 왁자한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냉이겸은 알고 있었다.

저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마저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다는 것을.

빙하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필사의 의지가 엿보인다.

냉이겸이 긴 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시오? 술맛 떨어지게.”

“이런. 나이가 드니 못된 습관만 붙었나 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군.”

빙하운이 피식 웃더니 다시 모두가 듣도록 말했다.

“내게 오늘 좋은 물건이 들어왔소. 바로 남궁세가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검이오. 이름이…….”

“벽라검이라 하였습니다.”

옆에 선 총관이 말을 전하자, 빙하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하오. 오늘 기분이 좋은 만큼 이 검을 냉 장로에게 하사하려고 했으나, 거절했소. 하여 이 검을 다른 누군가에게 하사할 생각이오.”

“오오오! 역시 궁주님이십니다!”

“누구든 그 검을 받게 되면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몇몇 이들이 다시 입에 발린 소리를 떠들어댔다.

빙하운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누가 이 검을 받겠는가?”

“…….”

모두가 환호할 때와 달리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 눈치만 보는 묘한 상황.

그때 중년인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포권했다.

“궁주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속하가 그 영광을 누리고 싶습니다.”

“흐음. 혈빙대주로군. 확실히 혈빙대주라면 이 검을 받을 자격이 있지.”

빙하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좋다. 내 그대에게 이 벽라검을 하사하겠다.”

“궁주님의 은혜가 만년빙벽에 아로새겨질 것입니다!”

휙!

파라라라라! 척!

빙하운이 벽라검을 던지자,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혈빙대주 한기풍이 민첩하게 낚아채며 연회장 중앙에 내려섰다.

“감사합니다, 궁주님!”

한기풍이 포권하자 빙하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시험해 보고 싶군.”

“말씀 듣겠습니다.”

“벽라검이 얼마나 대단한 검인지 나도 잘 모른다. 그러니 혈빙대주가 직접 시범을 보여주지 않겠는가?”

“물론입니다!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검무를 춰…….”

“아니. 검무 따위로는 검을 제대로 알기 어렵지.”

“하면 어떻게…….”

“비무 상대가 있으면 딱이겠지.”

“…….”

“이왕 이리되었으니, 혈빙대주의 비무 상대가 되어주지 않으시겠소? 냉 장로.”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지목이 되자 냉이겸이 당황한 표정으로 빙하운을 돌아보았다.

“제가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왕이면 저 검의 진정한 주인이 될 뻔한 냉 장로가 적격이라고 생각되는군. 한번 확인해 보고 싶지 않으시오? 그 빙결검보다 정말 부족한지, 더 나은지.”

일이 묘하게 흘러가자 연회장은 다시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긴장 상태가 되었다.

“궁주님, 저는 괜찮습니…….”

“장로.”

“예, 궁주님.”

“부탁처럼 말했지만, 명령이오.”

“……!”

냉이겸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빙하운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오랜만에 북해식 생사결을 치르는 것도 좋을 것 같군. 혹시 반대하는 자가 있는가?”

“…….”

감히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여기서 북해식 생사결이란,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비무를 치른다는 뜻이다.

중원의 생사결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정도지만, 북해식 생사결에서는 패자가 반드시 죽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장내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흘렀고, 호기롭게 나섰던 한기풍의 표정은 더없이 딱딱해졌다.

냉이겸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한기풍을 보았다.

‘하아, 어찌 이런 일이…….’

한기풍은 어려서부터 유난히 자신을 따르던 자였다.

설응각 소속이었던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강호의 대소사에 대해 이야기 듣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한데 이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란 말인가?

냉이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빙하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연회장의 분위기를 띄워주시오, 냉 장로.”

빌어먹을!

냉이겸이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 * *

그 시각 빙설은 빙옥 입구에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좋아, 들어가자! 남궁천을 믿어보는 거야.’

결심을 굳힌 그녀가 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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