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92화 (492/508)

492. 얼어붙은 빙궁

“으허어억!”

팽수혁이 느닷없이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손과 발을 마구 휘저으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소! 나는 절대로 냉 장로와 짜고 친 게 아니라고! 나는 빙 궁주의 광증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소! 아니, 빙 궁주가 광증에 걸렸다는 사실 자체를 들은 바가 없소! 이건 명백한 사실이오! 그러니 날 괴롭히지……!”

한참이나 떠들어대던 팽수혁이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고는 말을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두컴컴한 뇌옥이 아닌가?

곧이어 뼛속까지 시려오는 추위가 전신을 음습했다.

“으윽……! 여긴 어디지?”

“어디긴 어디야? 빙옥이지.”

바로 옆벽에서 들려오는 시큰둥한 목소리에 팽수혁이 흠칫거리고 돌아보았다.

“너는 누구냐?”

“이젠 동료 목소리도 못 알아보는군.”

“아…… 당우기구나.”

그제야 당우기의 목소리를 알아챈 팽수혁이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얼음으로 뒤덮인 좁은 공간은 창살로 막혀 있었다.

눈이 점점 익숙해지자 맞은편 창살 안에 갇힌 사람도 보였다.

남궁천이었다.

남궁천은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는데, 전신에서 미증유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수련이라니. 지독한 놈.’

팽수혁이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의식을 잃었지?”

“기억이 안 나는 거냐?”

당우기가 한숨을 내쉬며 묻자, 팽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가물가물해. 분명히 내 완벽한 연기 덕분에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은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냥 입 다물고 있어라.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고.”

“쳇, 고마운 줄도 모르는 녀석 같으니라고.”

팽수혁이 볼멘소리를 내뱉자, 순간 당우기가 있는 곳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갇혀 있다 보니 예민해진 모양이군. 아량이 넓은 내가 이해해야지.’

제멋대로 착각한 팽수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부 여기 잡힌 거냐?”

그러자 이번엔 반대쪽 벽에서 윤종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룡 문주와 우린 모두 여기로 끌려왔고, 백묘만 빙마옥이라는 곳으로 끌려갔어. 아무래도 빙궁에 마인들만 잡아 가두는 빙옥이 따로 있는 모양이야.”

“그렇군. 뭐, 백묘야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이제 앞으론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냉 장로와 빙설 소저가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을까?”

“하긴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한숨을 길게 내쉰 팽수혁이 맞은편 빙옥에 갇힌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은 아직도 운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 저놈이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내가 죽치고 앉아서 시간만 보낼 순 없지!’

마음을 다잡은 팽수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뜻대로 운기가 되지 않았다. 이상하게 단전에서 공력이 솟아오르려고만 하면 전신에서 기운이 쭉 빠지더니 나른해지는 게 아닌가.

“뭐지? 왜 운기가 안 되지?”

그러자 다시 옆방에서 당우기가 툭 던지듯 말했다.

“뇌옥에 가뒀는데 공력을 운기하도록 놔두겠냐? 당연히 산공독에 당한 거지.”

“아…… 산공독.”

산공독은 말 그대로 체내의 공력을 산산이 흩어놓는 독이다.

목숨에 치명적이진 않지만 산공독에 당하면 공력을 운기할 수 없다.

“그런데 단주는 어떻게 운기하는 거야?”

“만독불침이잖아.”

“아…… 그렇네.”

팽수혁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운기에 집중하는 남궁천을 부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이 와중에 세상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남궁천은 운공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빙하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단 말이지.’

과거 빙하운이라면 자신의 수하를 저렇게 일격에 죽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빙하운이 정말로 광증에 걸린 것일까?

겉으로는 멀쩡하다.

하긴. 광증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여러 가지 일로 신경을 쓰다 못해 극도로 예민해져서 과격해지는 광증. 또는 걸핏하면 우울감에 빠져서 염세주의자가 되는 광증. 혹은 감정이 메말라서 모든 현상에 무심하게 대처하는 광증 등.

하지만…….

‘광증이라기엔 뭔가 좀 다르단 말이지.’

마치 빙하운이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한편으로는 너무 달라져서 백무극을 보는 것 같다.

물론 그사이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사람이 천천히 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남궁천은 근본적으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착한 사람이 악인이 되거나, 악인이 착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대부분의 인간은 심연 깊숙한 곳에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나중에 조금씩 드러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처음부터 악인이 위선을 했거나, 그 반대로 선인이 피치 못해 악행을 저질렀거나.

한데 오늘 빙하운을 본 순간 자신의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사람이 그렇게나 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빙하운은 처음부터 그런 본성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데…….

‘말이 되나?’

초견파공안으로 공력을 볼 수 있게 되면서 남궁천은 타인의 속내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공력의 흐름만 보아도 상대가 성급한 성격인지, 쉽게 흥분하는 다혈질인지, 뭔가 숨기는 음침함이 있는지 등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빙하운은 조금 과격할지언정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속이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만난 빙하운은 너무나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공력의 흐름이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고.’

참으로 묘한 상황이다.

이 상태라면 냉이겸과 빙설의 의뢰를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다.

공력의 흐름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면 광증을 진단 내리기도 쉽겠지만, 딱히 문제가 없는데 성격만 바뀌었다.

그렇다면 이건 둘 중 하나다.

어떤 이유로 백무극처럼 다중의 인격이 형성되었거나, 정말 빙하운 스스로 달라진 의지를 가졌거나.

‘빙하운. 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남궁천은 심호흡을 하면서 다시 운기행공에 집중했다.

지금껏 천뢰제왕신공을 운용했지만, 이제부터는 좀 더 예민한 천마신기를 다스릴 차례였다.

천마신기를 천마신공으로 다스리는 게 아니라, 창벽공으로 운용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천마신기의 온전한 기운이 활개를 치도록 해주어야 하니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우우우우웅!

남궁천의 단전에서 아까와는 전혀 다른 질감의 공력이 뽑혀 나오면서 전신 혈맥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창벽공을 운용하는 남궁천은 가만히 천마신기가 활개 치는 양상을 지켜보기만 했다.

천마신기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전신 혈맥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마구 날뛰었다.

그러다 보니 마기가 지나치는 혈 자리가 불룩해지기 일쑤였다.

만약 옆에서 누군가 남궁천의 몸을 보았다면 굉장히 기괴하게 보였으리라.

어느 순간에는 복부가 터질 것처럼 불룩해졌다가 어깨가 부풀기도 하고, 목이 두꺼워지는가 하면 관자놀이의 태양혈이 툭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남궁천은 끝까지 창벽공으로 다스리며 지켜보았다.

조금 과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관군을 투입시키듯 천뢰기로 다스렸다.

그러고 나면 확실히 마기가 잠잠해지곤 했다.

천마신기가 길들여지는 것이다.

이 몸의 주인이 어떤 성격인지 조금씩 파악해 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마기를 운용하다 보니 자연스레 백묘가 떠올랐다.

홀로 빙마동으로 격리된 백묘.

그녀와 갈라설 때쯤 남궁천은 전음을 흘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에 대한 정보는 발설하지 말 것. 또한 빙궁에 대한 정보를 뭐든 알아내게 된다면 추후 내게 반드시 보고할 것.]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는 네놈의 노예 따위가 맞으니, 반드시 뭔가를 알아내어 보탬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주화입마에 반쯤 걸친 상황이어서 그런지 조금 이상한 반응이긴 했지만, 세뇌만큼은 확실한 듯했다.

‘뭐, 이제는 맡겨둘 수밖에.’

남궁천이 생각을 거두고는 다시 운기행공에 집중했다.

구오오오오오……!

남궁천의 전신에서 진득한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리고 맞은편 팽수혁의 빙옥에서도 후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운공을 할 수 없는 팽수혁이 체술을 연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빙옥에 갇힌 모든 무인이 체술을 연마하느라 후끈한 열기가 빙옥 복도까지 가득 차올랐다.

* * *

모처럼 궁주전에서 연회가 열렸다.

늘 칼바람만 불던 장내가 훈훈한 온기로 가득 찼다.

특별히 초청된 악사들은 아름다운 선율의 곡을 매끄럽게 연주했고, 기다란 탁자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최근 빙궁의 폭정으로 인근 주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이지 혀가 내둘러질 정도로 사치스러운 현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빙궁의 수뇌 인사들은 냉이겸과 빙설에게 연신 찬사를 보내왔다.

“하하하! 냉 장로님 덕분에 우리가 호강하게 되는군요. 정말 큰일을 해내셨습니다!”

“설 아가씨도 대단합니다. 강호초출이신데 한꺼번에 저들을 모두 사로잡아 오다니. 오늘은 정말 빙궁의 경사입니다!”

“두 분이 있어서 우리 빙궁이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너도나도 입에 발린 찬사를 쏟아내는 수뇌 인사들.

하지만 정작 냉이겸과 빙설은 그 자리를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빙설이 먼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냉이겸에게 나직이 말했다.

“오래전 아버지는 늘 고민하셨죠. 빙궁 인근 주민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서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빙궁이 되어야 그 영광도 영원할 수 있다고.”

“참으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게 문제네요. 사람들은 빙궁에 등을 돌렸고, 오히려 빙파위사단까지 조직했으니까요. 주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는데, 궁에서는 이렇게 사치를 부리다니. 어쩌다가 아버지가 이렇게 된 걸까요?”

“흐음. 이제부터 차차 알아가 보자꾸나.”

냉이겸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확실히 과거 빙 궁주는 입이 닳도록 습관처럼 이렇게 말했다.

“이곳의 척박한 환경이 오히려 축복처럼 여겨질 수 있도록, 빙궁이 주민들을 도와 상생해 나가야 하오. 존경은 강요로 나오는 게 아니오. 주민들 가슴에서 절로 우러나와야 하오. 예로부터 빙궁이 존재하는 이유 또한 그와 같소. 우리는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함께 번영해야만 하오.”

하지만 지금은 주민들의 등을 후려치는 폭군이 되어버렸다.

궁주가 변한 이후로 빙설은 남몰래 눈물짓는 일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냉이겸은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오늘날 빙설이 이나마 밝은 성격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그렇게 독하게 다진 마음이 중심을 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야트막하게 한숨을 내쉰 냉이겸이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말했다.

“적당히 상황을 보고 내가 남궁천에게 다녀오마.”

“부디 조심하세요, 장로님.”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우선은 면회를 가는 척하고는 빙옥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던져줄 참이다. 적당한 때에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남궁천 단주가 아버지를 치료해줄 수 있겠죠?”

“모른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선 것이 아니더냐? 지금은 그를 믿어볼 수밖에.”

“네, 뭐라도 해봐야죠.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가 저렇게 변한 건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빙설이 두 손을 모아 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시간만 흐른다면 언젠간 남궁천이 참수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

마침 악사들의 음악은 절정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연회를 열긴 했으나 궁주 빙하운은 아직 연회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차라리 빙하운이 없을 때, 일찌감치 빙옥에 다녀오는 것이 나으리라.

물론 냉이겸이 빙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악사들의 연주가 끝나자 다시 왁자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연주가 시작되기 전 냉이겸이 빙설에게 다가갔다.

“그럼 얼른 다녀오마.”

“네, 부탁드릴게요, 장로님. 조심하시고요.”

“걱정하지 마라.”

냉이겸이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을 벗어나서 낭하를 따라 걸으니 기둥과 기둥 사이로 달빛이 청아하게 떨어졌다.

악사들의 음악 연주 소리도 조금씩 멀어졌다.

그렇게 모퉁이를 막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오? 냉 장로.”

새하얀 달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선 빙하운이 두 팔을 살짝 벌리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곁에는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총관이 허리를 약간 숙인 채 냉이겸을 힐끔 보았다.

‘하필이면…….’

긴장한 냉이겸이 마른침을 삼키는데, 빙하운이 말을 이었다.

“한창 연회 중일 텐데. 급한 용무라도 있소?”

“음…… 연회장에 궁주님이 안 계시니 영 서운해서 찾아뵈려고 가던 길입니다. 그런데 제가 조금 성급했군요.”

“그렇군. 난 또…….”

피식 웃는 빙하운이 허리춤에서 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

단순한 동작 하나에도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빙하운은 달빛을 받아 시리도록 빛나는 검신을 보다가 냉이겸에게 시선을 던졌다.

“남궁천에게 가는 줄 알았지. 그도 그럴 것이 이쪽은 내게 오는 길이 아니라, 빙옥으로 가는 길이잖소?”

빙하운이 달빛보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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