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 얼어붙은 빙궁
장내의 모든 무인들이 남궁천에게 시선을 모았다.
냉이겸 역시 무심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빙하운이 그리 말하자 냉이겸조차도 답이 궁금했던 것이다.
남궁천은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빙하운을 빤히 노려보았다.
빙하운 역시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남궁천의 답을 기다렸다.
단순히 서로를 바라보는 것일 뿐인데도 장내에는 묘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고 있었다.
“다시 묻지. 네 초견파공안으로 내 공력이 보이는가?”
“…….”
남궁천이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자, 빙하운이 냉이겸을 돌아보았다.
“냉 장로. 아혈을 짚었소?”
“그건 아닙니다.”
“한데 왜 말을 못하지?”
빙하운의 시선이 다시 남궁천에게 향했다. 그러자 지켜만 보던 수뇌 인사 중 몇몇이 목소리를 높였다.
“건방진! 궁주님이 하문하시는데 어째서 입을 다물고만 있는가!”
“당장 대답하지 못할까!”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된 다그침이 점점 들불처럼 번져갔다.
피식.
결국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자, 장내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그야말로 북해빙궁에 딱 어울리는, 얼음장 같은 침묵이었다.
마침내 남궁천이 한숨을 얕게 쉬더니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다못해 저잣거리에서 점을 봐도 복채를 내놔야 하는데, 너무 날로 먹으려는 것 아니오?”
“…….”
“공력의 흐름을 보는 것은 상당히 심력을 소모하는 일. 궁주의 공력을 읽고 그걸 해석하려면 꽤나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소. 그런데 맨입으로 말하라고? 안 될 소리지.”
“…….”
장내가 다시 얼음장 속에 갇힌 듯 침묵이 흘렀다.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감히 빙궁주를 상대로 흥정을 하자는 건가? 지금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기나 한 건가?
“후후후.”
빙하운이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마치 쇠못으로 철판을 긁는 것처럼 듣기 싫은 음성이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도 있건만, 궁주의 웃음은 오던 복도 내쫓을 것만 같다.
‘웃음소리만으로 신경을 건드리는 재주가 있네.’
남궁천이 미간을 슬쩍 모으는데, 마침내 궁주의 입이 다시 열렸다.
“하면 어떤 대가를 바라는가?”
“사실 궁주의 공력을 보는 것은 크게 어렵진 않소. 다만 평상시에는 공력의 이동이 제한되어 있으니 자세한 것을 알기 어렵지. 결국 궁주가 무공을 펼치거나 내공 수련을 할 때에 비로소 제대로 된 흐름을 알 수 있다는 거요.”
“해서?”
“비무나 해봅시다. 그럼 공력을 읽어드릴 테니.”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말하자, 잠시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던 빙하운이 피식 웃었다.
“대단한 꼼수로군. 뭐, 네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도 들고. 하나 그 정도로 내가 비무에 나서기에는 체면이 있어서 말일세.”
“왜? 쫄았소?”
남궁천이 대놓고 도발하자, 수뇌 인사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며 소리쳤다.
“닥쳐라! 네놈이 감히 지금 궁주님께 무슨 망발을 하는 것이냐!”
“빙궁에 잡혀 오더니 정신이 미쳐 돈 것이로구나!”
“궁주님! 저런 하찮은 놈의 도발은 무시하십시오! 차라리 저희들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당장 저놈을 요절을 내…….”
분개하며 소리치던 수뇌 인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빙하운이 가만히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한 탓이다.
확실히 빙궁에서는 궁주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가 어길 수 없는 법처럼 보였다.
“확실히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대담함과 침착함을 가지고 있군. 너는 내가 두렵지 않은가?”
“아직 그럴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해서. 일단 그쪽이 먼저 나한테 쫀 것 같기도 하고.”
남궁천이 다시 시큰둥하게 말하자, 이번엔 궁주 곁에 있던 총관이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쳤다.
“저, 저……! 궁주님! 저놈의 사지를 당장 찢어서 궁주님의 지엄함을 만천하에 알리소서!”
“흥분하지 말게, 총관.”
“죄송합니다, 궁주님.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빙하운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재미있는 친구로군. 그냥 죽여 버리기엔 아까울 정도로.”
쉬아아아아아.
빙하운의 전신에서 살기가 섞인 한기가 후욱 풍겨져 왔다.
남궁천이 그 살기에 담담히 맞선 채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다시 극도의 긴장감이 팽팽해지자 보다 못한 냉이겸이 넌지시 나섰다.
“궁주님, 우선은 죄인들을 빙옥에 가두시는 게 어떨지요? 이곳에 오면서 빙파위사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 만큼 여론을 생각해서라도…….”
“냉 장로. 혹시 빙파위사단을 만났소?”
“아…… 직접 조우한 것은 아닙니다.”
냉이겸이 성내에 들어와서 목격한 장면을 짤막하게 전달하며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런 까닭에 제가 장과를 시켜 그 아이들에게 가혹한 처사를 멈추라 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힘과 권력을 과시하는 것보다 궁주님의 포용력을 보이셔서 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흐음. 포용이라.”
“…….”
“장과.”
“예, 궁주님.”
한옆으로 물러나 있던 장과가 우렁차게 대답하며 가운데 깔린 융단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이자, 빙하운이 턱을 살짝 괸 채로 느긋하게 물었다.
“냉 장로의 말이 모두 사실인가? 소년과 소녀에게 그토록 가혹하게 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해서 자네가 냉 장로의 말에 따라 그 무인을 말렸고?”
“그렇습니다.”
“흐음. 장과.”
“예, 궁주님.”
“내가 내린 지령이 뭐였지?”
“첫째, 본 궁에 대항하는 자들에게는 절대 자비를 베풀지 말 것. 둘째, 궁주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궁도는 즉결 심판하여 참수할 것.”
“잘 아는군. 훌륭하다.”
“과찬이십니다. 당연히 알아야 할 것들입니다.”
빙하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런데 넌 당연히 알아야 할 것들을 지키지 않았군.”
“예……?”
“본 궁에 대항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내 명령에 반하는 짓을 하지 않았는가?”
순간 장과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궁, 궁주님. 그것은……!”
“구차한 변명은 그만. 빙궁의 사내답게 가도록.”
피잉!
순간 빙하운이 손가락을 튕기자 지풍 한 줄기가 빛살처럼 날아가더니 그대로 장과의 이마를 꿰뚫었다.
퍼억!
쩌적……! 쩌저적……!
지풍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직후, 장과의 머리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잠시 후,
쿠웅!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완전히 얼어붙은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졌고, 뻣뻣하게 굳은 몸도 나무토막처럼 넘어갔다.
정말이지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
적랑단 대주들이 저마다 입을 딱 벌리고 돌처럼 굳어 있을 때, 좌우를 가득 메우고 있던 수뇌 인사들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합창하듯 포권했다.
“궁주님의 지엄한 법도가 만년빙벽에 아로새겨질지어다!”
궁도들의 복창으로 장내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 모습을 본 남궁천이 혀를 내둘렀다.
“와아, 이건 뭐 광신도들이 따로 없네. 마교도 울고 가겠는데?”
남궁천 특유의 빈정거림이 아니었다. 정말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상황이 살벌하게 흘러가자 냉이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결국 그가 한 걸음 나서면서 조금은 언짢은 표정이 역력해져서는 물었다.
“궁주님.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진정하시오, 냉 장로. 내 명에 따르지 않은 자를 즉결심판했을 뿐이오.”
“하면! 장과가 그 자리에서 나를 즉결심판하여 죽였어야 한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절 죽이시지 그러십니까?”
냉이겸은 진심으로 화가 난 상태였다.
장과는 오랜 세월 빙궁에 충성을 다한 무인이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수문장을 꿈꾸었던 자였다.
한번은 궁주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치료에 들어갔을 때, 장과가 궁주전 입구에서 빙상처럼 서서 칠주야를 꼼짝없이 보낸 적도 있었다.
궁주를 위해서라면 얼음을 깨고 호수 밑바닥까지 서슴지 않고 잠수하는 자였으며, 불구덩이 속이라도 망설임 없이 뛰어들 자였다.
그만큼 충성스러운 신하였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다니.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에 실감이 안 될 지경이다.
빙하운이 싸늘한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왜 그리 앞서가시오? 장로. 장로는 내가 최근 그런 명령을 내린 줄도 모르고 있지 않았소? 장로가 내 지령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결코 그딴 행동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소.”
“궁주님……!”
“먼저 지저분한 것부터 치우고 얘기하지.”
빙하운이 눈짓으로 장과의 시체를 가리키자, 무인 몇 명이 달려 나와 얼어붙은 시체를 수거해갔다.
목이 뜯어진 단면이 그대로 얼어붙었기 때문에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는 사이 빙하운은 남궁천 뒤에 선 백묘를 유심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여자는 누구요? 최근 정보에 의하면 적랑단에 여 대주는 없다고 했는데. 혹시 단주의 호신위인가?”
그러자 발끈한 백묘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내가 이딴 녀석의 호신위일 리가 있을까요? 난 그저 이 녀석의 발바닥의 때만도 못한 존재이니 감히 호신위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넘볼 수도 없다고요.”
“…….”
“제길!”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백묘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분위기가 묘해지자 냉이겸이 슬쩍 나섰다.
“남궁천 단주가 사로잡은 마인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당가의 청명단을 복용하고 정신이 조금…….”
“닥쳐요! 내 정신은 멀쩡해요. 단지 남궁천 이 자식이 세상에 둘도 없는 천마라는 것이 그저 경외스럽고 은혜 충만할 따름이라고요!”
“…….”
“……제길!”
“보시다시피 이렇습니다.”
냉이겸이 어깨를 으쓱이자, 빙하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인들을 향해 명령했다.
“그럼 이 정도로 하지. 죄수들은 뇌옥에 가두도록 하라. 저 마인은 빙마옥에 가두도록 하고. 저녁에는 냉 장로와 설의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연회를 열도록 하겠다.”
“궁주님의 빙벽 같은 심지가 하늘에 닿습니다!”
수뇌 인사들이 다시 포권을 하며 쩌렁쩌렁 소리쳤다.
결국 이렇게 상황이 일단락이 되자, 냉이겸이 비로소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의심은 사지 않았군.’
혹여나 팽수혁이 쓸데없이 떠벌려서 판을 깨버릴까 봐 내심 조마조마하던 터였다.
다행히 팽수혁은 앞서 자신이 했던 말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말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장과가 죽었을 때는 많이 놀란 듯했지만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그래도 입이 근질거릴 만도 한데, 끝까지 잘 참아줬군. 하긴. 입만 열지 않으면 딱히 의심받을 만한 행동 따윈 없기도 할 테…….’
생각을 이어가던 냉이겸이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포승줄에 엮인 팽수혁이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열심히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게 아닌가?
‘아니, 왜 눈을 찡긋거리고 지랄이야!’
누군가 볼세라 얼른 눈짓으로 주의를 주었지만 팽수혁이 씨익 웃으며 열심히 눈을 찡긋거린다.
‘어떻소? 영감! 이 정도면 완벽한 연기 아니오?’
‘제발 완벽한 연기를 하고 싶으면 날 보지 말고 그냥 끌려가라고!’
‘나만 믿으시오, 영감!’
찡긋. 찡긋!
‘하아, 저 멍청한……!’
찡긋! 찡긋!
당황한 냉이겸이 얼른 주위를 둘러보자, 몇몇 인사들이 묘한 낌새를 챈 것인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빙하운도 팽수혁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자는 왜 눈을 찡긋거리는 거지?”
“그, 그것이…….”
짧은 순간 냉이겸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하필 그의 시선에 팽수혁에게 눈을 찡긋거리는 빙설의 모습까지 들어오는 게 아닌가?
‘허어, 가관이구나!’
찡긋, 찡긋……!
찡긋, 찡긋……!
위기는 곧 기회라던가?
한 가지 번뜩이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냉이겸이 호통을 지르며 그대로 검집을 들어 올려 팽수혁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노오오오옴!”
퍼억!
“꼬로록…….”
거품을 물고 쓰러진 팽수혁을 내려다보며 냉이겸이 엄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감히 네놈이 아가씨를 넘보느냐! 이런 쳐 죽여야 할 놈!”
냉이겸이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지만 이미 온몸이 얼어붙은 채로 의식을 잃은 팽수혁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천만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