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 내 것 내놔라
콰아아앙!
벽라검이 아룡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그대로 모랫바닥에 처박혔다.
그 순간 모래폭풍이 일어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쿠파파파파파!
마치 분화구처럼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어느새 옆으로 물러난 아룡이 두 눈에 힘을 주고는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이 정도란 말인가?’
확실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아니,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수준이다.
지금까지 뭣도 모르고 설쳐대는 철부지 애송이라고만 여겼는데.
새삼 자신이 중원의 실정에 대해 무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묵천악이 죽었다.
그 오랫동안 무림맹을 좌지우지했던 묵천악이.
그렇다면 당연히 새로 실권을 장악한 자들은 더욱 강하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겉모습만 보고는 쉽게 판단한 것이다.
처척!
아룡이 곡도 두 자루를 뽑아 들고는 기수식을 취했다.
휘이이이잉!
그를 중심으로 모래바람이 회오리치면서 솟아올랐다.
남궁천이 모랫바닥에 박힌 벽라검을 뽑아내면서 돌아섰다.
“쥐새끼처럼 잘 피하네?”
아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섞을 여유는 없다. 상대는 애송이가 아니라 초절정 고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넘나드는 절대고수의 영역에 있다.
저 젊은 나이에 어찌 그런 경지까지 오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단하군.”
아룡이 저도 모르게 말을 흘리다가 어느 순간 바닥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파앗!
모래가 튀는 것과 동시에 아룡이 쏜살같이 남궁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사막의 모래 언덕 능선을 따라 부드럽게 달리는 바람 같다.
휘이이이잉!
피식.
남궁천의 입매가 올라간다.
아룡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웃어……?’
다음 순간 아룡은 다시 경악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파앙!
바닥을 찬 남궁천이 아룡과 똑같은 수법으로 달려오는 게 아닌가?
아룡은 순간 기운이 흔들리면서 바닥에 고꾸라질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는 남궁천을 향해 쌍도를 후려 갔다.
쒸쒸에에엑!
남궁천도 오른손엔 벽라검, 왼손에는 추혈검을 들고 동시에 휘둘러갔다.
‘이런 미친!’
아룡의 눈이 더욱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똑같다.
남궁천이 펼치는 검법은 자신이 곡도 두 자루로 펼치는 사진선풍도(砂塵旋風刀)였다. 아니, 검으로 펼치니 사진선풍검이라고 해야 할까?
‘어찌 이럴 수가!’
본디 무공이라는 것이 겉모습만 보고 그럴싸하게 흉내 낸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한데 남궁천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저 기운은 흡사 또 다른 자아가 덤벼드는 것 같지 않은가?
쉬따아아아앙!
쿠파파파파파!
두 사람의 도검이 부딪치면서 다시 한번 모래 폭풍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아룡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이곳은 사막이다. 몽골 땅이다.
적어도 지리적 이점만은 확실할 거라고 자부했다.
한데 상대가 자신과 똑같은 사진선풍도를 사용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물론 중원인이라면 이미 남궁천의 소문을 들었을 테니 초견파공안의 능력이라는 것을 단숨에 간파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룡은 초견파공안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상태였다.
“대체 네놈은……!”
아룡이 탁한 목소리를 흘리면서 어금니를 뿌드득 갈았다.
남궁천이 검을 맞댄 채 입매를 비틀었다.
“왜? 신선하지 않아? 자기 자신과 싸우는 기분이.”
“대체 네놈은 뭐냐!”
순간 아룡이 사자후를 터뜨리면서 그대로 왼손에 쥔 곡도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 쳤다.
사진선풍도의 제육초식 천승사선(天昇砂旋)이었다.
쿠파파파파파파!
기풍에 휩쓸린 모래가 마구 튀면서 시야를 가린다.
남궁천은 일순 호신강기를 두르고는 빠르게 뒤로 물러갔다.
타다다다닷!
어느 순간 남궁천이 발끝으로 모랫바닥을 툭 찍어 차더니 허공으로 붕 떠올라서는 빠르게 벽라검을 내려찍었다.
이는 아룡의 운기 방식을 보고 그대로 역이용하면서 펼친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의 초식을 보고 응용하여 다른 초식까지 흉내를 낸 것이다.
물론 남궁천이 그간 초견파공안으로 무수히 많은 무공을 섭렵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단전에서 솟구친 공력이 혈맥을 따라 쭉쭉 뻗어가다가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을 따라 손끝까지 전해졌다.
따다다다다당!
솟구치는 곡도와 내리치는 검신이 마구 부딪치며 불꽃을 터뜨린다.
남궁천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가 지금 펼친 검법은 실제로 사진선풍도에서 성추지락(星墜之落)이라는 초식이었다.
초견파공안 덕분에 무공에 대한 이해가 깊은 남궁천이 상대의 다른 초식을 응용해서 실존하는 초식을 무심결에 펼친 것.
타다다다닷!
이번엔 반대로 아룡이 연거푸 물러났다. 그 바람에 그의 발밑으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마침 모래 언덕 위에서 격전이 펼쳐지고 있었기에 먼 곳에서 보면 마치 두 사람이 구름 위에서 격무를 추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따다다다다당!
거듭 물러나던 아룡이 어금니를 빠득 갈고는 다시 초식을 바꿨다.
일순 몸을 낮게 숙인 아룡이 벽라검을 피하고는 곧장 몸을 기이하게 꺾으면서 곡도를 올려쳤다.
마치 모래 속에 숨어 있던 전갈이 그대로 독을 쏘는 듯한 동작이다.
사구갈독(砂丘蠍毒)!
취리리리릿!
마치 곡도가 독을 잔뜩 품은 전갈의 꼬리처럼 휘청인다.
기본적으로 곡도는 베는 무기지만, 이 순간만큼은 검처럼 찌르는 용도로 사용된다.
그래서인지 아룡이 사용하는 곡도는 전부 도첨이 유난히 길고 뾰족하게 뻗어 있다.
티팅!
어깨를 젖히면서 추혈검으로 쳐낸 남궁천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 순간 아룡이 왼손에 든 곡도 한 자루로 모랫바닥을 깊이 찔렀다.
푸욱!
쿠구구구구……!
갑자기 모래의 흐름이 묘하게 움직이더니 남궁천이 딛고 선 모래가 늪처럼 빠져들기 시작했다.
모래 늪을 이용한 도법인 사폭소연(砂瀑沼淵)이라는 초식이었다.
모래의 유동성을 잘 파악하고 사막 지형에 대해 빠삭해야 쓸 수 있는 초식.
하나 같은 몽골인이라면 별로 위협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남궁천은 중원인.
모래의 지질적 특성까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한 까닭에 늪처럼 빠져드는 모랫바닥에서 균형을 잃고 일순 허우적거렸다.
아룡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바닥을 차며 몸을 날렸다.
“끝이다!”
쒸에에에엑!
곡도가 노도처럼 거침없이 남궁천을 향해 밀고 들어간다.
확실히 남궁천은 놀라운 존재였다.
자신의 사진선풍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흉내 내지 않았던가? 아니, 흉내가 아니라 똑같이 사용했다.
정말이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몽골이다.
“네놈이 어떻게 된 놈인지 모르겠지만, 이걸로……!”
쉬따아아아앙!
순간 날아든 빛살 때문에 아룡이 휘청거리다가 팽그르르 돌아섰다.
“웬 놈……!”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된 놈이야? 저놈은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천마님이시다!”
카라라랑!
갑자기 나타난 백묘가 남궁천을 등지고 현란한 부채춤을 추었다.
느닷없는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아룡이 엉겁결에 물러났다.
툭!
찰나지간 바닥을 찬 백묘가 남궁천의 팔을 낚아채고는 홱 끌어당겼다. 동시에 남궁천이 발바닥으로 공력을 발출하며 솟구쳐 올랐다.
파바바바밧!
그제야 끊임없이 빠져드는 모래 늪에서 탈출한 남궁천이 언덕 위로 안전하게 착지했다.
“후우, 아찔했네. 역시 사람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자연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야. 고맙다, 백묘. 덕분에 살았다.”
“흥! 네놈이 예뻐서 살려준 겁니다, 천마시여!”
“그래. 애썼다. 번거롭게 했구나. 이젠 좀 더 조심하도록 하지.”
“조심하든 말든 상관없을 정도로 위대하신 천마시여. 젠장!”
“하하. 이제 괜찮으니 다른 곳에서 살풀이라도 해라.”
“쳇! 네깟 놈의 명령 따위는 절대적으로 충성하겠습니다!”
괴상한 말을 남긴 백묘가 어디론가 휙 달려가자, 아룡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지? 너희들은…….”
“소개는 진작 끝난 것 같고. 이제 처맞을 준비 됐겠지?”
남궁천이 주먹을 쥐고는 우두둑 꺾는 소리를 냈다.
* * *
유현은 생각을 끄고 본능에 따라 검을 휘둘러 갔다.
쉬컥!
“크억!”
깡! 쉬컥!
“끄악!”
그야말로 일검일살.
자하신공 때문에 그러잖아도 불그스름한 기운이 주변으로 뻗어가는데, 마침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라 노을까지 펼쳐지니 그 효과는 배가 되었다.
때문에 유현의 주변을 보면 마치 혈향이 자욱하게 퍼져 나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촤촤촤촤촤악!
“끄아아아악!”
“크악!”
“아악!”
무감한 검술에 수많은 무인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집어갔다.
유현은 여전히 무감한 표정으로 검을 뻗었다.
그의 검은 아름답고 섬뜩했다.
이게 화산의 검법인가 싶다.
분명 노을이 펼쳐져 있지만, 그 아래에 더 이상 매화나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랬다.
유현의 검법을 표현하라면 딱 그 정도가 어울릴 것이다.
어딘지 만장애 끝에 펼쳐진 노을처럼 허무하고 공허함이 가득 차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촤아악!
“크억!”
‘어째서 검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가?’
쉬컥!
털썩!
‘왜 멈춰 있나!’
까앙!
마침 누군가 유현의 검을 막아냈다. 한차례 휘청거린 유현은 상대를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열일곱쯤 되었을까?
상당히 앳된 얼굴의 사내아이다.
하나 칼을 들이민 이상 적일 뿐이다.
파밧!
쒜에에엑!
유현이 빠른 속도로 사내아이의 품으로 짓쳐 들었다.
“헉!”
사내아이가 얼른 곡도를 들어 올렸다.
쩌엉!
“크읏!”
아이의 몸이 휘청거린다.
유현이 다시 검을 후려쳤다.
따아앙!
“크읏!”
막강한 힘에 떠밀린 사내아이가 눈물을 머금은 채 입술을 질끈 깨문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유현은 무감한 시선을 던진 채로 검을 횡으로 그어갔다.
화려한 기술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미 상대를 압도한 상태였다.
쉬이이잇! 서걱!
“끄아아아악!”
그대로 오른팔을 잃은 아이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유현이 저벅저벅 다가가자, 아이는 귀신이라도 마주한 사람처럼 뒷걸음질을 치며 손을 뻗었다.
“살, 살려주세요. 져, 졌습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자비를 버린 지 오래된 유현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가지 의문만 가득할 뿐이었다.
‘왜 검술이 늘지 않는가?’
마침내 유현의 검신이 떨어져 내렸다.
쒸에에엣!
쩡!
느닷없이 나타나서 유현의 검을 막은 자는 다름 아닌 팽수혁이었다.
“어이, 너 진짜 계속 이럴 거야?”
“……?”
“우리가 쪽수가 없지, 자존심이 없어? 아직 새파랗게 어린놈을, 그것도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놈을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제야 유현의 시선이 바닥에 엎드린 채 오줌을 지린 사내아이에게 향했다.
“어차피 적입니다. 죽여야 할.”
“그래, 다 좋다, 이거야. 죽일 수 있어. 날 죽이려던 새끼는 죽여도 되지. 암, 나 같아도 그럴 거야. 그런데 넌 지금 검에 정이 하나도 없어. 알겠어?”
“……!”
“목숨을 건 싸움에서 불필요한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과 시종일관 무감하게 싸우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
“쳇, 됐다. 저놈을 죽이든 말든 네가 알아서 해라. 거듭 말하지만, 네놈이 저 애송이를 죽이는 건 상관 안 한다. 그런데 너 그러다가 언젠간 뒈진다. 무정한 것과 냉정한 건 다르단 말이다. 도검은 무정이 아니라, 냉정해야 하는 거야.”
말을 마친 팽수혁이 침을 탁 뱉더니 어디론가 몸을 날렸다.
홀로 남은 유현이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채 눈치만 살피는 아이를 보다가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보았다.
‘무정한 검이 아니라, 냉정한 검이 되어야 한다라. 그렇다면 남궁천, 단주는 어떤 검을…….’
마침 고개를 든 유현의 시야에 아룡의 몸에 올라탄 남궁천이 보였다.
고함을 내지르며 검집채로 휘두르는 남궁천.
“이 썩어 문드러질 놈아! 감히 내 물건을 태워? 네가? 네가? 뒈질라고! 엉? 엉?”
퍼억! 퍼억! 퍼억! 퍼억……!
‘확실히 무정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