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 내 것 내놔라
목이 반대 방향으로 꺾인 아립지가 모랫바닥에 얼굴부터 처박히며 떨어지자 광풍사 무인들이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룡 역시 예상 밖의 결과에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남궁천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편 주인을 잃은 말은 낯선 이가 등에 올라탔다는 사실을 느낀 것인지 크게 울부짖으며 앞발을 높게 치켜들었다.
이히히히힝!
준마가 몸부림을 치면서 남궁천을 떨어뜨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남궁천은 고삐를 콱 움켜쥐고는 재빨리 균형을 잡았다.
“워어, 워!”
이히히히힝!
“가만있어!”
몇 번이나 몸부림을 치며 제자리를 맴돌던 준마가 남궁천의 사자후를 듣더니 거짓말처럼 멈췄다.
푸르르!
투레질을 한 말이 마치 주눅이라도 든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는 제 자리에서 발을 살살 구른다.
그 모습을 지켜본 몽골인들이 입을 척 벌린 채 꿈쩍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립지가 타고 있던 말은 아룡이 직접 하사한 것이었다.
‘풍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말.
성격이 지랄맞고, 길들이기가 무척 어려운 야생마였다.
하지만 타고난 신체 조건이 워낙 좋았기에 아립지는 보름이 넘도록 풍랑을 길들였다.
그렇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횟수를 기억도 못 할 때쯤, 아립지는 결국 풍랑을 굴복시키고 주인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광풍사 무인들은 저마다 아립지니까 가능했다고 떠들어댔다.
자신들 중에서 말을 가장 잘 다스리는 자가 바로 아립지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풍랑이…….
“옳지, 착하다. 착해.”
남궁천이 풍랑의 뺨을 툭툭 두드린다.
푸르르르!
풍랑이 마치 애교라도 부리듯 얼굴을 비비적거린다.
광풍사 무인들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게…… 가능해?’
말이라면 이골이 난 자신들이다.
탁월한 기마술 하나로 중원인들을 노예처럼 부리던 영광의 시절도 있지 않았던가?
한데 저 어린 애송이가 풍랑을 길들이다니?
그것도 저렇게 간단히!
마침 뺨에 칼자국이 길게 새겨진 사내가 성큼 나서더니 풍랑을 향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풍랑! 네 녀석이 어찌 그리 가볍게 돌아선단 말이냐! 네 등에 올라탄 놈은 네 주인을 죽인 놈이란 말이다! 당장 바닥에 내동댕이쳐도 모자랄 판에 애교까지 부리다니? 그러고도 네놈이 전사의 말이더냐!”
몽골인들은 말을 영혼의 동반자처럼 여기기도 한다. 때문에 풍랑의 변심은 사람 간의 우정이 깨진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푸르르르!
풍랑이 다시 한번 투레질을 하고는 칼자국 사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칼자국 사내가 이를 뿌득 갈고는 소리쳤다.
“풍랑! 네놈은 주인을 보기에 창피하지도 않은가?”
거듭된 다그침에 풍랑의 시선이 옆에 쓰러진 아립지에게 향했다.
타박타박……!
풍랑이 아립지에게 걸어가더니…….
퍽!
“헉!”
“엇!”
“맙소사!”
순간 광풍사 무인들이 헛바람을 삼키며 대경실색했다.
눈을 게슴츠레 뜬 풍랑이 앞발을 들어 아립지의 시체를 툭 걷어차는 게 아닌가?
푸르르르!
그러고는 보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린다.
아니, 뭐 저런……!
반면 남궁천은 그런 풍랑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폭풍 칭찬을 이어갔다.
“옳지, 옳지. 네가 진정한 주인을 알아보는구나.”
“저, 저, 저……!”
칼자국 사내가 뺨을 부들부들 떨더니 아룡을 휙 돌아보며 소리쳤다.
“칸!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저 망할 것들을 요절내 버리고 돌아오겠습니다!”
“효무. 진정해라. 놈은 단순한 애송이가 아니다.”
“칸!”
아룡이 대답 대신 싸늘하게 식은 시선으로 돌아보자, 효무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동료의 복수를 원하는 네 마음은 알겠다. 몽타, 라오치!”
“예, 칸!”
아룡의 부름에 두 사내가 달려오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룡이 가늘게 뜬 눈으로 남궁천을 보며 턱짓했다.
“효무와 함께 가서 전사의 힘을 보여라.”
“명 받들겠습니다, 칸!”
이윽고 세 사람이 동시에 대답하더니 말을 몰고 타박타박 걸어 나갔다.
남궁천이 세 사람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소리쳤다.
“전사는 개뿔! 어린 애송이 하나 잡자고 장정 셋이 달려들면서 무슨 전사 타령이냐?”
“닥쳐라! 그만큼 칸께서 네놈을 인정한다는 뜻이니 오히려 영광으로 알아라!”
효무가 곡도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확실히 이번에 나온 세 사람은 남궁천을 만만히 보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칸이 인정한 사내다.
적어도 셋이 동시에 달려들어야 이길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니 최선을 다해야 하리라.
남궁천이 아룡을 보며 빈정거렸다.
“광풍사 문주도 꽤나 비열하군.”
“그럼 어쩔 텐가?”
아룡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턱을 치켜든다.
후우우우웅!
그 순간 마치 협박이라도 하듯 주변의 무인들로부터 사나운 기풍이 일어난다.
아룡의 말대로 어쩔 도리가 없다.
머릿수에서부터 이미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 아닌가?
저쪽에서 셋만 내보내 준 걸 오히려 감사할 판이다.
하나 남궁천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팽수혁과 윤종승, 그리고 당우기가 앞으로 나섰다.
“그쪽도 대가리가 숨어 있는데, 이쪽도 굳이 대가리…… 아니, 단주가 나설 필요가 없지.”
“옳은 말씀.”
“당신들은 우리가 상대하지.”
세 사람이 나서자 효무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으르렁거렸다.
“이 개 같은 것들이…… 우리를 아주 우습게 여기는 모양이구나!”
“우습게 여기는 정도까진 아니고. 그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없지 않소?”
당우기의 말에 효무가 발끈해서는 소리쳤다.
“흥! 네놈들 주둥이에 모래를 퍼 먹여 주마!”
“이럇!”
“하앗!”
순간 효무와 몽타, 라오치가 말의 배를 걷어차며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효무는 자신의 주무기인 대부를 휘두르면서 팽수혁에게 정면으로 마주쳐갔다.
“뒈져랏!”
쒜에에에엑!
떠어엉!
대부와 태도가 부딪치면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쿠파파파파!
준마가 급격히 방향을 뒤틀자 사막의 모래 먼지가 폭풍처럼 일어난다.
일순 시야가 가려진 팽수혁은 옆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덮쳐 오는 것을 보고는 얼른 허리를 젖혔다.
부우우우우웅!
강기를 머금은 대부가 가슴팍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절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공격이었다.
“칫!”
얼른 몸을 일으킨 팽수혁이 그대로 말 등을 차며 날아올랐다.
“뒈지는 건 네놈이닷!”
팽수혁이 그대로 무게를 실으며 태도를 내려찍었다.
하지만 상대는 과연 몽골인답게 순간적으로 몸을 아래로 떨어뜨리더니 말의 배 밑으로 숨는 게 아닌가?
자칫하다간 애꿎은 말만 죽일 상황.
“제길!”
파라라라락!
팽수혁이 팽이처럼 회전하면서 칼을 거두자, 이번엔 효무가 말 위로 올라서더니 범처럼 몸을 날려 왔다.
“흐아아압!”
부우우우우웅!
대부가 다시금 공기를 가르며 떨어져 내린다.
창졸지간 팽수혁은 단전에서 혼원벽력신공을 최대한 끌어 올리며 태도를 올려 쳤다.
“어딜!”
스파아앗! 꽈아아앙!
“크읍!”
팽수혁이 올려친 태도 때문에 바닥의 모래들이 휩쓸려 올라가면서 효무의 전신을 난타했다.
효무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할 상황에서 팽수혁이 그대로 혼원보를 펼치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얕보지 마라!”
쒜에에에엑! 꽈아앙!
마침내 팽수혁이 내뻗은 혼원벽력장에 얻어맞은 효무가 비명을 내지르며 날아갔다.
“크아아악!”
우당탕!
모래 언덕 깊숙이 푹 파묻힌 효무는 간헐적으로 몸을 꿈틀거리면서도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팽수혁이 일장을 날렸던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장했다! 나도!’
확실히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최근 팽수혁은 남궁천과 점점 벌어지는 격차에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바꿨다.
더 이상 남궁천을 경쟁상대로 의식하지 않기로.
대신 자기 자신과 싸우기로.
남을 의식하는 순간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결과를 확인한 셈이었다.
혼원벽력신공과 혼원벽력장이 한 단계 발전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한편 다른 곳에서는 접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윤종승은 곡도를 사용하는 몽타와 한 치도 양보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당우기는 활을 쓰는 라오치를 상대로 암기와 독을 뿌리면서 대응하고 있었다.
흘러가는 상황을 보니 당우기는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보였지만, 윤종승은 조금씩 몽타에게 밀리고 있었다.
팽수혁이 윤종승을 돕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아룡이 사자후를 터뜨렸다.
“그마아안!”
파아아아아아아!
천둥벽력 같은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모래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근방의 모든 무인이 흠칫거리고는 아룡을 돌아보자, 그가 싸늘한 웃음을 그리면서 입을 열었다.
“과연 제법이군. 이러나저러나 무림맹의 적랑단이라는 건가?”
“이제라도 알았으면 다행이고. 자, 이제 그만 물건 넘기고 헤어지자고. 내 것만 돌려주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테니까.”
“그렇군. 무림맹 적랑단주가 그토록 애타게 찾는 물건이라. 이 장보도가 말이지?”
아룡이 두루마리를 다시 들어보고는 찬찬히 훑어보았다.
남궁천이 눈살을 구겼다.
“자, 그만 이리 넘기…….”
“그렇게 가지고 싶다면 가져가라.”
다음 순간 아룡의 손에 불길이 확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두루마리를 태워 버리는 것이 아닌가? 삼매진화의 수법으로 장보도를 태워 버린 것이다.
남궁천의 눈이 퉁방울처럼 커졌다. 지켜보던 대주들과 냉이겸 역시 두 눈을 찢을 듯 부릅떴다.
‘이런, 난리 났구나!’
그들은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남궁천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이성을 잃고 날뛸 사람은 바로 남궁천이었으니까.
그런데…….
‘저건…… 해탈인가?’
냉이겸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이 환한 웃음을 짓는 게 아닌가?
그런데 묘하게 섬뜩한 웃음이다.
이윽고 남궁천이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너 이 새끼가 내 걸 태워 버렸구나.”
“분한가? 분하다면 다행이군. 네놈을 기분 나쁘게 만들고 싶었거든.”
“왜 그랬을까? 뒈져도 곱게 뒈질 것이지.”
후우우우우웅!
일순 웃음을 거둔 남궁천의 표정이 귀신처럼 오싹하게 변했다.
광풍사 무인들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데, 아룡만이 싸늘한 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중원에서 겁도 없이 이 땅으로 들어선 놈들이다. 저들에게 이 땅의 법을 알려주어라.”
“이랴앗!”
“하앗!”
“오로로로로!”
순간 천 명에 달하는 전사들이 광분에 찬 고함을 내지르며 남궁천 일행에게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결국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자 냉이겸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빙설과 등을 졌다.
“염병할! 조심해라, 설아!”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백묘는……!”
냉이겸이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할 때, 이미 백묘는 부채를 휘날리며 적진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허어, 어지간히 참았던 모양이군.”
“쌓인 게 많았겠죠.”
두 사람이 쓴웃음을 짓고는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몸을 부딪쳐 갔다.
순식간에 주변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냉이겸과 빙설이 달려간 곳에서는 연신 얼음알갱이가 터져 나왔고, 극음의 기운에 당한 몽골인들이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채로 넘어가곤 했다.
한편 남궁천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전사들의 어깨와 머리를 밟아가면서 새처럼 날아올랐다.
그렇게 운룡대구식을 펼친 남궁천이 단숨에 아룡에게 날아가더니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감히 내 걸 태워? 넌 뒈졌어, 이 새끼야.”
슈우우우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