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 내 것 내놔라
“나…….”
남궁천이 반사적으로 말을 뱉으며 나서려고 하자, 냉이겸이 얼른 손을 뻗어 제지했다.
‘나서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냉이겸이 강렬한 눈빛으로 경고를 내린다.
남궁천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아룡이 다시 건조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물었다. 남궁천이 누구냐?”
나직하고 조용한 목소리.
하지만 웅혼한 내공이 느껴진다.
휘이이이이잉!
때마침 모래바람이 불면서 아룡을 중심으로 회오리치듯 올라간다.
냉이겸이 심호흡을 하고는 한 걸음 척 나섰다.
“광풍사 문주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영감이 남궁천인가?”
“아니오. 나는 북해빙궁의 장로요. 아무래도 귀 문과 소소한 오해가 있는 듯하여…….”
“북해빙궁이라고?”
아룡이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되묻자, 냉이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본 궁과 척을 질 수는 없을 터.’
조금 자신감이 생긴 냉이겸이 다소 긴장을 풀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렇소. 본 궁은 오래전부터 귀 문과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였으니,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이번 일을 좋게 넘어갔으면 하오.”
“좋게라…… 소소한 오해…….”
“물론 문주께서는 기분이 나쁠 만도 하나 애초에 문제의 발단은…….”
“내 수하들이 저질렀다는 건가?”
“꼭 그렇게 표현하기도 애매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 애매한 부분 때문에 두 사람의 목숨을 날렸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남궁 단주도 깨우치는 바가 있을 거외다. 그러니 내 얼굴을 봐서라도…….”
“영감.”
“……?”
“영감은 북해빙궁 장로라고 했지?”
“그렇소.”
냉이겸이 다시 당당한 표정으로 어깨를 폈다.
중원에서라면 어떨지 몰라도 이곳 몽골에서는 그래도 빙궁의 명성이 꽤나 강한 효력을 발한다.
“크하하하하!”
순간 아룡이 허리를 꺾어들면서 웃어젖혔다. 냉이겸도 피식 웃었다.
저리도 반가울까?
다시 자신감이 붙은 냉이겸이 남궁천을 돌아보고는 씨익 웃었다.
‘보아라. 말 몇 마디로 분위기를 이렇게 누그러뜨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한참이나 웃어젖힌 아룡이 냉이겸을 보며 말했다.
“빙궁의 무인을 만나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나 역시 반갑소.”
“과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지?”
“누가 아니라오? 원수는 외나무…… 어? 어음…… 뭔가 비유가 잘못된 것 같소만.”
콰아아앙!
순간 아룡이 손을 휘젓자 공기를 가르고 날아간 장풍이 모래 언덕에 작렬하면서 터졌다.
모래가 산산이 흩어지면서 장관을 이룬다.
아룡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냉이겸을 노려보며 말했다.
“잘못되긴 뭐가 잘못돼? 내 오늘을 얼마나 벼르고 별렀는지 아는가? 빙궁의 무인을 만나는 날이 있다면 반드시 살 껍데기를 홀라당 벗겨서 저 모래 언덕에서 구르도록 만들겠노라 다짐했었지!”
‘어…… 이게 아닌데…….’
냉이겸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아룡의 전신에서는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처처처처척!
도검창을 앞세운 광풍사 무인들도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내며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태세를 갖췄다.
상황이 뜻밖으로 흐르자 적랑단 대주들도 일제히 도검을 뽑아 들면서 사방을 경계했다.
차차차차아앙!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자 냉이겸이 얼른 양손을 들어 올리며 진정시켰다.
“자, 다들 진정하시오! 문주! 나는 빙궁에서 왔다니까?”
“안다고 하지 않았나!”
“대체 왜 이러시오? 빙궁은 그동안 광풍사와 돈독한 사이를…….”
“닥쳐라! 얼마 전 내 수하들이 빙궁으로 거래를 하러 갔다가 몰살을 당했는데. 어디서 그런 망발을 지껄인단 말인가!”
“헉, 그런 일이…… 그게 정말이오?”
“그럼 내가 쓸데없이 거짓을 말하겠는가! 이미 빙궁은 광풍사를 등졌다! 이에 본좌는 빙궁의 무인들이 보이는 족족 죽여 버리기로 결심했다!”
후우우우우우웅!
다시 한번 아룡을 중심으로 뜨거운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 바람에 모래바람이 다시 거칠게 일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냉이겸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광풍사 무인들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일선에서 즉각적으로 치고 올 무인들의 무위는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강호로 치자면 하나같이 절정고수급이다.
그런데 여긴 사막이다.
이들의 무공이 사막의 모래바람을 보고 만든 것인 만큼 절대적으로 불리한 환경이다.
“끙…… 이러면 계획이 다 나가떨어지는 건데…….”
냉이겸이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데, 남궁천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만하면 됐어요. 어차피 말로 해선 통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
“끄음. 하지만 이들을 상대로 어찌할 생각인가? 상대는 몽골 제일의 무인으로 이루어진 광풍사…….”
“영감님.”
“응?”
“우리도 무림맹 제일의 조직입니다. 그리고 영감님도 빙궁 제일의 무인 아닙니까?”
“…….”
“제 한 몸 지킬 능력은 다들 될 겁니다.”
“뭘 어쩔 셈인가?”
“어쩌긴 뭘 어째요? 저 새끼가 내 물건을 가져갔으니까 다시 찾아야죠.”
아니, 그게 왜 네 물건인 건데. 그냥 책에서 본 거라며?
스쳐 지나가는 의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 꾹 참았다.
남궁천이 뒤를 둘러보며 말했다.
“유사시에는 각자도생이다. 그리고 백묘.”
“…….”
백묘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남궁천을 쏘아보았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요즘 굉장히 짜증 날 거야. 말도 이상하게 나오고, 몸도 뜻대로 안 되니까. 그럼에도 완전히 주화입마에 빠지진 않았다는 것이 대단해. 아무튼 오늘 일이 터지면 이 기회에 마음껏 분풀이를 하도록.”
“흥! 네깟 놈이 그리 말한다고 훌륭한 천마가 되셨군요. 제길! 그딴 식으로 말해봐야 속하는 명 받들겠습니다.”
“좋아.”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큼성큼 나섰다.
단지 몇 걸음 나섰을 뿐인데도 남궁천의 존재감은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아룡이 그런 남궁천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물었다.
“네놈이 남궁천인가?”
“그래. 내가 바로 무림맹 적랑단주 남궁천이다.”
“무림맹 적랑단주라.”
아룡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림맹 적랑단주라면 자신도 아는 조직이었다.
새외세력이나 강호를 위협하는 조직을 섬멸할 때 가장 앞장서는 무력 조직.
듣기로는 무림맹에서 최고의 무력 단체라고 들었는데…….
‘저런 애송이가 단주라니.’
게다가 함께 있는 자들도 전부 약관 정도로 보이는 청년들이 아닌가?
아룡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림맹도 이제 갈 데까지 간 모양이군. 묵천악 맹주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인 모양이지?”
“사실이지.”
“쯧쯧. 아무리 묵 맹주가 죽었더라도 이렇게 새파란 애송이를 적랑단주에 앉히다니.”
만약 아룡이 중원인이었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중원에서는 남궁천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까.
하나 그는 몽골인이었다.
몽골 땅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는.
어쩌다가 몽골 지역을 벗어나더라도 인근 마을을 약탈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남궁천에 대한 소문을 거의 듣지 못한 실정.
때문에 그로서는 눈앞에 나타난 이 새파란 애송이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남궁세가가 무림맹의 실권을 잡았다는 소문이 떠돌더니, 정말로 혈육들의 잔치로 망가뜨리는 모양이구군.”
“킬킬킬. 그러게 말입니다.”
아룡의 수하들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남궁천은 그런 광풍사의 반응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턱짓을 하며 물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야? 나한테 줄 건가?”
남궁천의 시선이 아룡의 손에 들린 가죽 주머니로 향했다.
만약 지금이라도 아룡이 장보도를 순순히 내놓는다면 남궁천은 더 이상 문제 삼을 생각이 없었다.
아룡이 피식 웃으며 가죽 주머니를 그대로 휙 던졌다.
툭, 데굴데굴!
모랫바닥에 떨어진 가죽 주머니가 한참을 구르더니 안에 든 것이 툭 튀어나왔다.
“……!”
순간 남궁천 일행이 저마다 흠칫거리고는 눈을 부릅떴다.
주머니 안에서 굴러 나온 것은 바로 남궁천이 살려서 보내주었던 턱수염 사내의 머리통이었다.
남궁천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아룡을 보았다.
“이건 내 게 아닌데?”
“후후. 동료를 잃고 혼자 살겠다고 도주한 놈은 전사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지.”
“그래서 수하를 죽였다?”
“들을 건 다 들었으니.”
“흐음. 뭔가 앞뒤가 안 맞잖아? 그러면서 복수는 또 하려고 온 거고?”
“복수가 아니다. 내 수하를 건드린다는 것은 나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 내 수하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나뿐이다.”
“근데 빙궁에서도 뒈졌다며?”
“……!”
후우우우우웅!
순간 아룡의 전신에서 살기가 폭사하면서 먼지바람이 사방으로 훅 불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잠잠해지자 아룡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놈이 겁도 없이 나를 건드리는가 했더니, 이제 보니 세상 물정도 모르는 애송이였군. 내게 받고 싶은 것이 있다고?”
“그래. 내 장보도 어떻게 했냐?”
“장보도라. 처음 저 멍청한 녀석의 얘기를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 그러다가 하나 생각나는 게 있더군.”
아룡이 옆으로 손을 척 내밀자, 수하 중 하나가 다가와서 두루마리를 건넸다.
촤르르륵!
아룡이 한쪽을 잡고 늘어뜨리자, 두루마리가 길게 펼쳐지면서 지도 같은 그림이 나타났다.
“네놈이 찾는 게 이것이더냐?”
순간 남궁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 맞아! 그거다! 내놔라! 그럼 살려는 드릴게.”
“뭐? 하하하!”
아룡이 허리를 꺾어들고 웃어대자, 옆에 있던 무인들도 툴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을 거둔 아룡이 남궁천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이거 순 미친놈이네.”
“미친 건 내가 아니고, 이쪽이고.”
남궁천의 지목을 받은 백묘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닥쳐라! 내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네놈이 천마로서의 존엄함을 갖춘 덕분입니다!”
“…….”
“…….”
잠시 묘한 침묵이 흐르고 나서 아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쨌거나 미친놈에겐 매가 약이겠지. 아립지!”
“예, 칸!”
“저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 때문에 본좌가 손을 더럽힐 수는 없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각 주겠다.”
“반의반 각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립지가 호언장담하자, 아룡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천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아립지가 말을 몰고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더니 남궁천을 향해 소리쳤다.
“꼬마야!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라!”
“우리 엄마 돌아가셨다.”
“…….”
“…….”
“그럼 뒈지든가! 이럇!”
두두두두두두……!
아립지가 말의 배를 걷어차자, 준마가 빠른 속도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하아앗!”
아립지가 허리춤에서 뽑아 든 곡도를 남궁천을 향해 그대로 휘둘러갔다.
그의 칼이 지척에 다다를 때까지만 해도 남궁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립지는 내심 비웃었다.
‘아예 얼어붙은 모양이로군! 그러게 작작 나대지 그랬느냐? 세상이 원래 험한 법이다.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법이고. 잘 가라! 달리 원한은 없다!’
쒸에에에엑!
날카로운 파공성에 이어 아립지의 곡도가 남궁천의 목을 베어냈다.
그런데…….
“음……?”
감각이 없다.
분명 목을 벤 것 같은데?
당황한 아립지가 얼른 말고삐를 당기며 돌아섰다.
이히히히힝!
푸드득!
준마가 투레질을 하며 앞발을 높이 치켜들고는 돌아섰다.
분명 있어야 할 남궁천이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 어디 간 거야?’
당황하는 그의 시선에는 입을 쩍 벌린 광풍사 무인들이 들어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왜 동료들이 자신을 보고 놀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잘 가라. 달리 원한은 없다.”
저승사자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귀에 닿더니, 차가운 손길이 양 뺨을 붙잡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우두둑!
그대로 목이 돌아간 아립지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