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 그딴 식으로 말하면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대머리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장보도? 웬 장보도?
그리고 지금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대머리가 뺨을 부들부들 떨다가 허리춤에서 도끼와 곡도를 꺼내 쥐었다.
“어이, 중원에서 온 애송이. 지금 상황이 안 보여?”
“닥쳐라. 내가 물었다. 내 장보도를 가져간 게 네놈들이냐고.”
남궁천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자, 대머리가 실소를 흘렸다.
확실히 백묘의 일수를 보고 이들이 범상치 않은 자들이라는 것은 눈치챘다.
하지만 여긴 몽골이다.
몽골에서 누가 감히 광풍사 무인을 건드린단 말인가?
“애송아, 우리가 누군지는 아느냐?”
“내 장보도 가져간 새끼들이겠지.”
“뭔 개소리냐? 우리는 바로 광풍사다! 네놈이 감히 광풍사 무인을 건드리고도…….”
“그러니까 맞잖아. 내 장보도 가져간 새끼들.”
“허!”
“누구냐? 내 장보도 가져간 새끼가. 너희들 중에 있냐?”
“아까부터 뭔 개소리야! 지금 중요한 건 저년이 방금 우리 막내를……!”
“장보도!”
다시 남궁천의 입에서 우렁찬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애초에 남궁천은 장보도에 이만큼 집착할 거라고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품 안에 있던 것이 사라지면 괜히 더 집착이 생기는 법이다. 게다가 이 먼 곳까지 와서 태양궁을 찾을 기회가 어디 흔하겠는가?
대략이나마 장보도를 살펴봤던 기억에 의하면 태양궁은 바로 몽골 땅에 있었다.
그러니 태양궁을 찾겠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어쨌거나 눈이 뒤집힌 남궁천이 격하게 소리치자, 기풍이 사방으로 불어나가면서 탁자와 의자가 떠밀리고 접시와 음식이 아무렇게나 날아가 뒹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소년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남궁천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남궁천이 그런 소년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꼬마 말로는 네놈들이 양곡현의 원수라는데?”
“……?”
“그렇다면 네놈들이 내 장보도를 가져가거나 불태웠거나 둘 중 하나란 뜻인데?”
“도대체…… 뭔 개소리를 하는 건지…….”
대머리가 짜증스럽게 말을 뱉으며 곡도와 도끼를 꽉 움켜쥐었다. 생각 같아서는 일격에 상대의 머리를 내려찍고 싶었지만, 느껴지는 기도가 범상치 않다. 게다가 상대는 여덞 명이나 되지 않던가?
그때 쓰러져 있던 소년이 손가락으로 대머리를 가리키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맞아요! 저놈들이 우리 마을을 불태웠어요!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곡식과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전부 약탈했어요!”
“넌 닥쳐!”
부우우웅!
눈이 뒤집힌 대머리가 도끼를 그대로 내려찍었다. 다음 순간.
탁!
남궁천이 손을 뻗어 대머리의 손목을 낚아챘다.
도끼에 정수리가 갈라질 거라고만 생각했던 소년이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들었다.
저물어가는 태양이 도끼의 시퍼런 날에 반사됐다.
그리고 대머리의 손목을 낚아챈 채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남궁천의 모습이 보였다.
“아…….”
소년으로서는 정말이지 이 순간 남궁천의 존재가 상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익……!”
대머리가 힘을 주어 손목을 빼내려고 했지만, 남궁천의 악력이 어찌나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궁천이 손에 힘을 실을 때마다 손목이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끄으읍!”
“형, 형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턱수염 사내가 안절부절못했다.
남궁천은 그렇게 대머리의 손목을 낚아챈 채로 소년에게 물었다.
“양곡현에서 온 것이냐?”
“예, 전 양곡현에서 살았어요. 이놈들이 노인과 남자 어른들을 모두 죽이고, 여자들과 아이들만 납치했어요! 전 아궁이에 숨어 있다가 이 녀석들에게 들켜서 끌려가는 길이에요.”
“그럼 혹시 양괴라는 분을 아느냐?”
“아……! 알아요! 그 할아버지도 이놈들이 죽였어요! 그리고 그 할아버지 물건도 죄다 약탈하고 집은 불에 태웠어요!”
“……라는군.”
남궁천의 시선이 다시 대머리에게 향했다.
이 순간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바로 냉이겸이었다.
그가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는 남궁천과 소년을 번갈아 보았다.
어디 저잣거리에서 파는 잡서에나 나오는 이름이 실존했다니?
‘도대체 어디에서 뭔 책을 읽고 다니는 거야?’
한편 대머리는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해대는 데다 손목까지 잡혀 있으니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너 이 새끼. 지금 실수하는 거다. 네놈이 강한 건 알겠지만, 나를 건드리는 순간 우리 광풍사가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잘됐네.”
“뭐?”
“일일이 찾아가기도 귀찮았는데. 찾아와 준다는 것 아냐?”
“이 미친……?”
“원래 난 누가 쫓아오는 쪽이 익숙하기도 하고.”
“너 진짜 미친놈이냐? 아까부터 뭔 개…… 크아아아악!”
우두두둑!
대머리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정말이지 손목이 그대로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쫓아오는 쪽이 좋다고.”
“이 개새……! 끄아아아악!”
우드드득!
다시 한번 대머리가 비명을 고래고래 내질렀다.
댕그렁!
결국 대머리 손에 들려 있던 도끼가 바닥에 떨어졌다.
남궁천이 그 도끼를 주워들자, 대머리가 왼손에 든 곡도를 빠르게 후려쳐왔다.
“뒈져어어엇!”
하지만 그가 내뱉은 말을 충실히 수행한 쪽도 자신이었다.
퍼억!
대머리의 곡도는 남궁천의 몸에 닿기도 전에 딱 멈춰 버렸다.
대신 대머리는 눈알을 치뜨고는 자신의 정수리에 박힌 도끼를 보았다.
“니미럴……!”
희미한 목소리를 흘려낸 대머리가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으히이익!”
턱수염 사내가 반사적으로 물러나면서 턱을 달달 떨었다.
도대체 이 미친놈들은 뭔가?
자신들은 광풍사다.
몽골 땅에서 광풍사를 건드리면 어찌 되는지 모르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한데 이런 대담한 짓을…… 아니, 미친 짓을 하다니!
“야.”
“히익!”
지목을 당한 턱수염 사내가 딸꾹질을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궁천이 정수리에서 뽑아낸 도끼로 이마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가서 전해라. 내 장보도 가져오라고.”
“……!”
“알았어?”
“예? 아, 예! 알았습니다!”
“그럼 가봐.”
“정, 정말 가도 되는 겁니까?”
“왜? 역시 팔 하나 정도는 부러뜨려놔야 약이 올라서 다시 찾아오려나?”
“히이익! 아, 아닙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도 문주께선 충분히 화가 나서 찾아올 겁니다!”
“확실해? 괜히 쫄아서 도망가는 건 아니고?”
“아닙니다! 문주께선 무슨 일이 있어도 원수를 찾아 죽입니다. 그러니까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갈 겁니다! 그러니 절 이대로 보내주십시오! 저마저 죽으면 문주님이 공자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릴 겁니다!”
“흐음. 역시 그렇겠지.”
남궁천이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따지고 보면 참으로 이상한 광경.
반드시 보복을 할 테니 살려 보내달라는 묘한 상황이 아닌가?
남궁천이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좋아, 가서 최대한 빨리 전해. 무림맹에서 온 적랑단주 남궁천이 여기 병신 둘을 죽여 버렸다고. 그러니 최대한 빨리 복수하러 오라고.”
“명심하겠습니다! 반드시 다시 찾아내 복수하겠습니다!”
“옳지. 좋은 패기다. 그럼 이제 꺼져라.”
“감, 감사합니다!”
턱수염 사내가 연신 굽실거리고는 후다닥 일 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는 곧 말에 올라타더니 어디론가 빠르게 달려갔다.
대략 상황이 정리되자, 냉이겸이 정신을 차리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니, 어쩌자고 광풍사를 건드린 건가!”
“말했잖아요. 내 장보도를 가져갔으니까.”
“좋네, 백번 양보해서 그 책 내용이 사실이라고 치지. 하지만 그 장보도가 진짜라는 증거도 없지 않은가? 보아하니 광풍사는 장보도의 존재 자체도 모르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장보도는 가짜일 가능성이 더욱 높은…….”
“상관없어요. 어차피 전 제 물건을 다시 찾으려는 것일 뿐이니까.”
“아니, 그러니까 왜 그게 자네 물건이냐는 말이야!”
“그거야…… 내 맘이니까?”
“허…….”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
냉이겸은 바닥에 널브러진 두 구의 시체를 허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은 다시 탁자에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왠지 넋이 나갔던 때와 달리 지금은 기분이 좋아 보인다.
“흐음.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나서보겠네.”
“영감님이요? 어떻게요?”
“자네는 장보도를 되찾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죠.”
“만약 그 장보도마저 불태운 거라면?”
멈칫.
남궁천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그럼 다 죽여 버릴 겁니다.”
“허어…….”
이래서야 그 가짜 장보도가 광풍사 문주의 손에 있길 바라야 할 판이다.
“좋아, 만약 장보도가 문주의 손에 있다면 그걸 받아내기만 하면 될 일 아닌가?”
“그건 그렇죠.”
“그럼 여기서 더 문제를 키우지 말게나. 내가 나서보지.”
“영감님이 그 장보도를 받아주겠다는 겁니까?”
“그렇네.”
“보아하니 광풍사 놈들은 안하무인인 것 같던데. 영감님이 나선다고 말로 통할까요?”
“그야 자네들이 중원인이니까 그런 거고. 광풍사는 오래전부터 빙궁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네. 이따금씩 거래 상대이기도 했고.”
“호오. 그럼 피를 보지 않고도 장보도를 다시 받을 수 있겠군요.”
“그렇네. 물론 쉽진 않겠지만, 저들이 본 궁을 적으로 돌려세우진 않으려고 할 걸세.”
“흐음. 그렇다면 뭐, 알겠습니다.”
“정말인가? 약속한 거지?”
“그러죠, 뭐.”
“좋아. 내가 장보도를 받아내기만 한다면 자네는 절대 나서지 말아야 하네!”
“알았다고요.”
남궁천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냉이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밥이 넘어가냐?’
* * *
식사를 마친 남궁천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섰다. 객잔 주인장과 점소이에게는 돈을 넉넉하게 주고서는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라고 일렀다.
또한 소년도 그곳에서 소일거리를 맡아서 숙식을 해결하도록 했다.
그렇게 성천막리를 떠난 지 꼬박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두두두두두두……!
메마른 사막 땅이 미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떨려댔다.
게다가 저 너머로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나며 한 무리의 무인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게 아닌가?
한눈에 보아도 그들이 광풍사임을 알 수 있었다.
남궁천 일행이 마차를 멈춰 세우고는 그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두두두두두두……!
거칠게 달려오는 말들을 보니, 냉이겸은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듯했다.
이곳은 몽골이다.
비록 자신이 무림칠성 수준의 무위를 지녔다지만, 이곳에서만큼은 광풍사 문주를 상대로 승리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상대의 머릿수만 해도 거의 천 명에 이르지 않는가?
‘빙궁과 광풍사의 관계로 잘 풀어보는 수밖에.’
냉이겸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사이, 광풍사 무인들이 지척에 다다랐다.
두두두두두……!
“오로로로!”
“이럇!”
마침내 광풍사 무인들이 뿌연 먼지 구름을 일으키면서 마차 두 대를 완전히 에워쌌다.
모래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니 상대가 몇이나 되는지 알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냉이겸이 다시 한번 남궁천에게 다짐을 받아두었다.
“기억하고 있겠지? 절대로 먼저 나서지 말게! 내가 어떻게든 장보도를 잘 받아낼 테니.”
“알겠습니다.”
냉이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지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이윽고 잠시 후 먼지 너머에서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붉은 무복에 날카로운 기도를 뿜어내는 사내.
그가 바로 광풍사 문주, 아룡이었다.
그의 입에서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메마르고 삭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궁천이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