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84화 (484/508)

484. 그딴 식으로 말하면

양곡현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한 남궁천 일행은 그대로 다시 여정에 올라서 몽골 지역으로 들어섰다.

날씨도 제법 쌀쌀하게 변했고, 모든 자연환경이 달라지자 일행들 모두 맹에서 꽤나 멀리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언덕과 초원을 몇 차례 지나다가 사막으로 들어섰는데, 사막에 들어서기 전에는 사막용으로 설계된 사두마차로 갈아탔다.

그렇게 마차가 부지런히 사막을 가로지르며 달려가는 와중에도 남궁천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창밖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하아, 내 장보도…….”

“…….”

“아아, 내 장보도…….”

“…….”

“으아아! 내 장보도…….”

“거, 좀!”

결국 참다못한 냉이겸이 버럭 역정을 내면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장보도란 대부분 가짜란 말일세. 괜히 강호에 혼란과 분열을 주려고 악의 세력이 만들어내는 꼼수에 지나지 않지. 그러니 그만 그 장보도 얘기는…….”

“아으으, 내 장보도…….”

“……듣고 있냐?”

“하아아, 내 장보도…….”

“거, 좀 작작하라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장보도 타령이야! 이젠 내 귀에서 장보도라는 말이 달라붙어서 환청이 들릴 지경일세!”

“흐으으. 내 장보…….”

“부처가 이러길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고 했네. 양곡현이 그리 된 건 자네도 어쩔 수 없이 맞은 화살이지만, 두 번째 화살은 바로 자기 자신이 쏘는 치명적인…….”

“장보도…… 장보도…….”

“에잉! 마차를 옮기자꾸나! 왜 하필 저 녀석이 우리가 탄 마차에 올라타서는!”

냉이겸이 혀를 끌끌 차고는 마차를 멈춰 세우려는데, 옆에 앉은 빙설이 가만히 팔을 붙들었다.

“어차피 이제 다 온 것 같아요. 저기 성천막리(聖川幕里)가 보여요.”

“드디어 환청에서 탈출할 수 있겠구나.”

냉이겸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창밖을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너른 사막 끄트머리에 샘을 둘러싸고 형성된 작은 마을이 보였다.

몽골인들이 거주하는 마을로, 성천막리라는 곳이었다. 사막에서 보기 힘든 물이 마을 복판에 크게 고여 있는 것이 성천막리의 특징이었다.

장시간 사막을 가로지르며 달려온 데다 마침 허기도 진 터라, 남궁천 일행은 성천막리로 들어서서 객잔 앞에 마차를 멈춰 세웠다.

“자, 어서 내리자. 여기 더 있다간 내가 광증에 걸릴 지경이다.”

냉이겸이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서는 성큼성큼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한꺼번에 여덟 명의 손님이 몰려오자 점소이가 신이 나서 달려왔다.

“어서 오십쇼! 중원인이군요? 편하신 자리로 앉으십쇼!”

“자네도 중원인인가?”

“예, 어쩌다 보니 아버지랑 이곳에 와서 객잔을 운영하고 있습니다요.”

점소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안내했다.

남궁천 일행은 대충 먹을 것과 술을 주문하고는 난간 너머의 연못을 보았다.

사막 복판에 이런 연못이 거짓말처럼 자리 잡고 있으니 어딘지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기는 듯했다.

유현이나 팽수혁, 윤종승과 당우기는 그저 신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몽골 지역까지 온 것이니 모든 환경이 낯설고 생소하기만 했다.

반면 이미 사막을 지나온 경험이 있는 냉이겸과 빙설은 비교적 차분한 태도였다.

백묘 역시 어딘지 초점이 나간 표정으로 하늘만 바라보았고, 남궁천은…….

“하아…… 내 장보도…….”

젠장, 눈길도 주지 말아야지.

냉이겸이 얼른 고개를 돌리고는 난간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막 음식이 나올 때쯤이었다.

마침 저만치 먼 곳에서 세 명의 사내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는데, 밧줄에 꽁꽁 묶인 소년이 짐짝처럼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이럇!”

두두두두……!

거칠게 달려오던 세 사내는 객잔 앞에서 얼른 말을 멈춰 세우고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뛰어내렸다.

그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매끄러웠기에 냉이겸이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몽골인들은 말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구나.’

얼굴에 턱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대머리 사내에게 말했다.

“형님, 여기서 목 좀 축이고 갑시다.”

“그러자.”

시원스레 대답한 대머리가 객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두 사람은 곧장 이 층으로 올라오더니 남궁천 일행을 힐끔 곁눈질을 하고는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어이, 여기 양고기와 마유주 좀 내와라.”

“알겠습니다요!”

점소이가 얼른 대답을 하고는 내려갔다.

잠시 후 마지막으로 깡마른 사내 한 명이 밧줄에 묶인 소년을 데리고 이 층으로 올라왔다.

그러자 대머리가 미간을 푹 구기며 소리쳤다.

“그 자식은 뭐 하러 끌고 왔어?”

“도망이라도 가면 골치 아프니까요.”

깡마른 사내가 대충 대꾸하자, 대머리가 피식 웃었다.

“일어설 기력도 없는 놈이 도망은 무슨. 그냥 마구간 옆에 대충 묶어둬도 되겠구만.”

“그래도 마유주 한 모금 정도는 주죠? 저러다 죽으면 돈도 안 되는데.”

“쯧…… 내가 먹기도 아까운 걸…….”

대머리가 혀를 차면서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어린 소년을 마치 짐승 대하듯 했다. 아니, 짐승보다도 못하게 대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팽수혁이 어금니를 빠득 갈고는 일어서려는데, 냉이겸이 그의 팔을 가만히 붙들었다.

“참으시게.”

“영감은 저게 보이지도 않소? 저 어린아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시체가 되어가는 지경인데…….”

“이곳에서 오지랖이 넓으면 오래 살지 못하네. 강호도 마찬가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강호에는 협의라는 게 있소.”

“여긴 그런 것 없네. 괜히 사고 쳐서 골 아픈 일 만들지 말게나. 몽골인들 중 중원인에게 호의적인 자들은 거의 없다는 걸 알아둬. 저들을 건드리면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저들의 무리가 반드시 우리를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오려고 할 걸세. 여긴 중원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게나.”

“쳇!”

팽수혁이 혀를 차고는 주먹만 꾹 말아 쥐었다. 남궁천을 힐끔 보니, 여전히 장보도만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잠시 후 마유주와 양고기가 나오자 대머리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 소년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어이, 꼬마야. 목 좀 축일 테냐?”

“…….”

소년이 고개를 들고는 대머리를 노려보았다.

비록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눈빛만큼은 매서운 아이였다. 바짝 말라서 갈라진 목소리가 소년에게서 들렸다.

“부모님의 원수…… 우리 마을의 원수…… 반드시 언젠간 죽일…….”

콰당!

소년은 말을 마저 잇지도 못한 채 대머리에게 머리통이 잡혀서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벼룩 같은 놈이 주둥이가 거칠구나.”

대머리가 소년의 머리채를 낚아채고는 들어 올리자, 코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대머리가 입매를 비틀더니 마유주를 바닥에 콸콸 쏟아냈다.

“핥아먹어라.”

“…….”

“처먹으라고!”

콰당!

대머리는 다시 소년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팽수혁과 윤종승은 전신이 분노로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었다.

아무리 남의 일이라지만, 어린아이를 상대로 너무 야만적인 행동이 아닌가?

하지만 팽수혁은 냉이겸이 말렸고, 윤종승은 유현이 말렸다.

그렇게 대머리가 비아냥거리며 돌아설 때였다.

갑자기 쓰러져 있던 소년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대머리에게 달려든 것이다.

“이 나쁜 놈아!”

“응?”

무심코 돌아보던 대머리가 재빨리 피하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쾅!

머리를 얻어맞은 소년이 그대로 튕기듯이 날아갔다. 그런데 하필 백묘가 앉은 곳으로 굴러와서 다리에 부딪치고는 멈췄다.

“끄으윽……!”

얼굴이 퉁퉁 부은 소년이 주먹을 꼭 말아 쥐고는 눈물을 삼켰다.

그러는 사이 깡마른 사내가 밧줄을 잡아당겼다.

“어이쿠, 이런 실례를.”

밧줄에 질질 끌려가는 소년.

그런데 어느 순간 밧줄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면서 소년이 끌려오지 않았다.

“으응?”

깡마른 사내가 고개를 들어보자, 백묘가 매끈한 다리를 뻗어 소년의 등을 살짝 밟고 있는 게 아닌가?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깡마른 사내가 백묘를 쳐다보았다.

“호오? 이건 또 무슨 상황?”

“사과부터.”

“아아, 그래야지. 참.”

깡마른 사내가 백묘에게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바닥에 쓰러진 소년의 머리채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이 새끼야, 너 때문에 여기 아리따운 낭자가 피해를 봤잖느냐? 어서 대가리 처박고 사과해라.”

“끄읍……!”

“자, 자. 사과하라고.”

깡마른 사내가 소년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자, 다시 ‘쿵’ 소리가 울렸다. 소년이 울먹이는 소리로 말을 흘렸다.

“죄, 죄송합니다…….”

“이제 되셨는지?”

깡마른 사내가 히죽 웃으며 백묘를 보았다. 백묘가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마주 보고만 있자, 사내는 소년을 끌고 돌아서려고 했다.

하지만 백묘의 목소리가 다시 그의 발길을 붙들었다.

“아니.”

“……?”

“사과는 저쪽도 해야지.”

백묘의 시선이 저만치 탁자에 앉은 대머리에게 향했다.

뜻밖에도 지목을 받은 대머리가 눈썹을 성큼 치켜올렸다.

안 그래도 중원인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는데, 인원이 여덟이나 되어서 참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시비를 걸어온다면 피할 이유가 없다.

당장에야 머릿수가 밀린다지만, 멀지 않은 곳에 무리가 있다.

대머리 사내가 나서기도 전에 깡마른 사내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낭자, 반반하게 생겨서는 왜 이렇게 까탈스러우실까? 욕구 불만이야? 뭐, 정 사과를 받고 싶으시다면 우리와 함께 가실까? 잘 대접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내의 시선이 백묘의 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당우기가 남궁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단주. 말려야 하는 것 아냐? 저 여자는 단주 말만 듣잖아.”

“제길…… 내 장보도…….”

“하아, 완전히 넋이 나갔군.”

당우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깡마른 사내는 점점 선을 넘어갔다.

“낭자, 우리하고 같이 가자니까? 사과할 테니까. 킬킬.”

“커흠. 이제 그만 괜찮네. 그만 가서 식사들 하시게.”

보다 못한 냉이겸이 나섰지만, 깡마른 사내는 그대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이, 영감. 나는 이 낭자에게 말을 한 거라고.”

깡마른 사내가 백묘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자, 낭자,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나랑 같이 가지. 정식으로 사과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이것저것 좋은 일을…….”

우두둑!

“끄아아아악!”

순간 금나술을 펼쳐 사내의 손목을 꺾어버린 백묘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부채로 목을 그었다.

서걱!

츄아아아아아!

툭, 데굴데굴……!

순식간에 깡마른 사내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자, 대머리와 턱수염이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이런 니미럴! 뭐야?”

“막내야!”

두 사람이 경악한 와중에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년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꼴좋다…… 양곡현의 원수…….”

그 소리가 남궁천의 귀에 스치기라도 한 것일까?

내내 ‘장보도’라는 말만 중얼거리던 남궁천이 멈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그러는 사이 대머리와 턱수염이 뺨을 부들거리며 백묘에게 다가왔다.

“이 미친년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뒈지고 싶어?”

“사과.”

“이런 썅! 사과는 얼어 죽을! 확 가랑이를 찢어 죽일 년이!”

백묘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한 걸음 나서려고 할 때였다.

“백묘. 그만.”

남궁천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멈칫거린 백묘가 돌아보자, 남궁천이 목을 우두둑 꺾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대머리와 턱수염은 저도 모르게 흠칫거리고 말았다.

엄청난 살기.

죽음의 기운이 사방에서 넘실거리는 듯하다.

남궁천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씨익 지었다.

“너희들이었어? 내 장보도 가져간 새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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