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 그딴 식으로 말하면
남궁천 일행은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만큼 평범한 이두 마차 두 대에 나눠 타고 이동했다.
팽수혁과 윤종승은 각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 말을 몰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세 명씩 나뉘어 마차에 올라탔다.
비교적 편안한 이동 과정이었지만, 장시간 마차 안에서 지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그렇게 무림맹을 떠난 지도 며칠이 흘렀다.
덜그덕…… 덜그덕……!
덜컹!
고르지 못한 길을 지날 때면 마차가 요동을 치면서 흔들리곤 했다.
“거, 살살 좀 몰 것이지. 나이가 드니 허리 아프구만.”
냉이겸이 마부석 쪽을 돌아보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가 ‘끙’ 하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옆을 힐끔 보았다.
빙설도 오랜 여정에 지친 것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기절한 사람처럼 자고 있었다.
반면 맞은편에 앉은 백묘는…….
‘허참, 신기하단 말이지. 저 맹해 보이는 여자가 마교의 백묘란 말이지?’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으로 창밖만 하염없이 응시하는 백묘.
이따금씩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빛이 날카로워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무감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다.
“커흠! 자네는 잠도 없나? 눈을 붙이고 있는 모습을 못 본 것 같군.”
“신경 끄시죠.”
역시나 쌀쌀맞은 대답이 돌아온다.
확실히 이럴 때 보면 마인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신경을 끄고 싶은데, 마인이 내 앞에서 두 눈 부릅뜨고 있으니 어디 맘이 편해야지. 아, 이 녀석은 원래 생각이 없는 녀석이니 그런 식으로 쳐다볼 건 없고.”
“걱정하지 마요. 영감님이 자는 동안 모가지를 딸 일은 없을 테니까.”
“흐음. 그건 역시 남궁천의 명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인가?”
“닥쳐요. 내가 그딴 애송이 말을 들어야죠. 그는 천마시니까.”
“으응?”
“칫! 나도 뭔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넘어가요. 남궁천이 내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 녀석만 생각하면 두려움에 자꾸 몸이 떨리고, 이상하게 존경심이 일어나고, 복종하고 싶은 생각이…… 젠장!”
백묘가 말을 꺼내다 말고 주먹으로 거칠게 마차 벽을 때렸다.
콰작!
순간 그녀의 주먹이 마차 벽에 구멍을 만들며 밖으로 쭉 뻗었다. 그 바람에 단잠에 빠져 있던 빙설이 화들짝 놀라며 깼다.
“헉! 무슨 일이죠? 적이 나타났나요? 누구죠? 어디죠?”
“자자, 진정해라. 그냥 자도 된다. 아무 일도 아니야.”
“아…… 다행이네요.”
비몽사몽 중얼거린 빙설이 다시 눈을 감고는 마차 벽에 기대어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 단순한 반응에 백묘가 기가 차다는 듯 냉소를 지었다.
한편 냉이겸은 그런 백묘를 빤히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로고. 대부분의 의지가 그대로인데, 남궁천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주화입마 초기 증세처럼 반미치광이가 되는군. 이것이 청명단의 효과인가?’
하지만 자신이 아는 한 청명단은 상대방을 완전히 멍청한 상태로 만든다.
그게 아니면 아예 통하지 않거나.
아마 남궁천은 청명단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사전 작업을 했으리라.
지금 백묘가 느끼는 공포심은 아마 그 과정 중에 생성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참으로 대단하군. 아니, 지독하다고 해야 하나? 하긴 그놈은 정말이지 질릴 정도로 뻔뻔하고 독사 같은…….’
바로 어제 일을 떠올린 냉이겸이 뺨을 푸들푸들 떨었다.
* * *
하루 전.
“대가를 달라고?”
냉이겸의 말에 남궁천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야죠.”
“무슨 대가를 말하는 것인가?”
“저는 지금 두 분의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설득된 척하면서 북해빙궁으로 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지로 제 발로 걸어간단 말이죠. 그러니 위험수당 정도는 챙겨줘야죠.”
“끄응. 물론 자네의 그런 배려가 고맙긴 하네만…… 좋네. 뭘 얼마나 바라는가? 천만 냥? 이천만 냥?”
“아뇨, 돈이라면 이제 차고 넘쳐서요.”
“허어. 돈이 차고 넘치다니. 부럽군. 하면 뭘 원하나?”
목이 탄 냉이겸이 질문을 던져놓고 수통을 꺼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남궁천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곤 말했다.
“만년빙정.”
“푸우우우웁!”
순간적으로 냉이겸의 입에서 물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콜록, 콜록! 콜록!”
“에헤이! 거, 더럽게.”
“쿨럭! 미, 미안하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뭘 원한다고?”
“만년빙정이요.”
“…….”
“…….”
“그…… 만년빙정이 뭔지는 아는가?”
“알죠.”
“그…… 만년설삼 정도로 생각한 건 아니고?”
“에이, 만년설삼 따위를 어떻게 만년빙정에게 들이대요?”
“흐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알 만큼 안다는 건데?”
“안다니까요?”
“그런데 지금 만년빙정을 달라고?”
“싫으면 여기서 거래는 없던 걸로 합시다. 맹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잠깐! 자네는 맹주로부터 명을 받았잖은가!”
“음. 제가 당장에라도 서신을 보내서 계획이 변경됐다고 하면, 맹주님은 두 팔 벌려 환영할 겁니다.”
“끄음.”
냉이겸이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만년빙정은 빙궁의 보물일세. 그냥 단순한 보물이 아니라, 거의 신물이라고 봐야 하네. 때문에 만년빙정이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궁주님뿐일세.”
“만년빙정을 다 달라는 게 아니에요. 절반만 주세요.”
“아니, 무슨 만년빙정이 밭에 나는 고구마 같은 건 줄 알아!”
“고구마는 필요 없고요.”
“허어! 말했잖은가? 나는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다니까? 어디에 있는 줄도 몰라.”
“그럼 책임지고 궁주를 설득해 주세요.”
“허어!”
“싫으면 말고. 여기서 헤어지는…….”
“기다리게! 사람 참 성격 급하구먼.”
“약조하시겠습니까?”
“니미럴, 육시럴, 염병헐…….”
“역시 싫으면…….”
“알았다고!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궁주님을 설득해 보겠네! 됐나?”
“접수 완료.”
남궁천이 얄밉게 씨익 웃어 보였다.
* * *
그때를 떠올리니 다시 한번 명치께에서 울분이 올라오는 것 같다.
어쨌거나 그런 지독한 놈에게 얼마나 당했으면, 남궁천이란 이름만 들어도 백묘가 저렇게 반미치광이가 되는 걸까?
‘살다 살다 마인을 동정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냉이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면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 * *
부지런히 달린 마차가 마침내 저만치 마을을 앞두고 있었다.
섬서 지역의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 양고현(陽高县).
저 양고현을 지나가면 만리장성을 넘게 될 것이고 이후로는 몽골 땅으로 들어서는 셈이다.
낮은 언덕에 올라서서 어슴푸레 보이는 양고현을 확인한 남궁천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누군가 옆에서 들었다면 고개를 갸웃거렸겠지만, 남궁천은 실제로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물론 전생 시절의 이야기다.
그 당시 남궁천은 무림맹의 추격을 피해 양고현까지 왔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오랜 절친을 만나서 장보도 한 장을 맡긴 적이 있었다.
바로 전설의 문파인 태양궁의 위치가 그려진 장보도였다.
장보도를 맡긴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그 장보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 장보도는 대체로 가짜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도망자 신세인 남궁천이 그 장보도 한 장을 믿고 무리수를 둘 수는 없었다.
둘째, 장보도가 진짜라고 하더라도 그 장소를 탐색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
당장 자고 일어나면 무림맹원들이 턱밑까지 추격한 상황이니 숨은 문파 찾기 놀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만약 태양궁이 실존한다면?
무림맹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문파가 될 것이니, 운이 좋다면 도망자 신세를 면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리고 초견파공안을 이용해서 전설의 극양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될 테니 한층 더 강해졌을 것이고.
끝으로 태양궁이 현재는 사라졌다고 해도, 혹여나 그 터에서 태양신단(太陽神丹)이라도 발견하면 내공의 질과 양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뭐, 결국 장보도를 그렇게 맡긴 채 다시 찾지도 못하고 죽어버렸지만.’
하지만 이제 다시 기회가 왔다.
사실 남궁천이 기어이 북해빙궁으로 가겠다고 고집한 이유에는 바로 이곳 양고현을 지나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저씨는 잘 지내시려나?”
아저씨라고 했지만 남궁검만큼이나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다.
남궁천이 전생에 어려운 상황에 닥칠 때마다 몸을 의탁한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응? 뭐가 좀 이상한데?”
남궁천이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는 먼발치 마을을 보았다.
지금쯤이면 집집마다 밥을 짓느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야 했다.
한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온통 죽은 땅처럼 시커멓기만 하다.
“먼저 갈 테니 따라와!”
남궁천이 말을 던지자마자 경공을 펼치며 내달렸다.
주변으로 나무와 바위들이 휙휙 지나친다.
운룡대구식까지 펼치면서 순식간에 양고현에 다다른 남궁천은 흔들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온통 잿더미다.
멀쩡한 전각은 하나 없고, 여기저기 타다 남은 기둥과 담벼락만 보인다.
모든 생명이 말살된 땅이다.
마침 뒤늦게 도착한 마차 두 대가 남궁천 옆에 멈춰 섰다.
“허어. 우리가 맹으로 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마을이었는데. 며칠 사이에 이런 일이…….”
냉이겸이 마차에서 내리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걸까요?”
빙설이 뒤이어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냉이겸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나라고 알 수 있겠느냐? 인근 도적의 짓일 수도 있고, 만리장성을 넘어온 마적 떼의 짓일 수도 있겠지. 그게 아니면…….”
“그게 아니면요?”
“글쎄다. 이 정도로 대규모 약탈이라면 광풍사(狂風社)의 짓일 수도 있겠구나.”
“광풍사라면…… 복원을 꿈꾸는 그 몽골인 조직을 말하는 거군요?”
“그렇다. 그들은 명나라에 적대적이고 다시 원 제국을 세우려는 뜻을 품고 있으니 이런 극심한 약탈을 저지른다 해도 이상할 게 없지.”
“그렇군요. 그런데…… 남궁천이 지금 어디 가는 거죠?”
“으응? 그러게.”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은 잿더미로 내려앉은 마을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침 어느 한 장소에 머물러서는 잿더미를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엇! 뭐 하는 거야?”
“갑자기 잿더미는 왜 파헤쳐?”
대주들이 얼른 달려와 말리려고 했지만, 남궁천은 대답 대신 장풍을 쏘아서 잿더미를 완전히 날려 버렸다.
퍼어엉!
먼지처럼 흩어지는 재를 보면서 남궁천이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없어!’
하긴, 무공 한 자락 익히지 않은 아저씨였다.
만약 광풍사인지 뭔지가 이 마을을 덮쳐서 약탈을 일삼았다면, 아저씨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다.
이미 장보도는 불에 타버렸거나, 광풍사 무인 중 누군가가 발견하고 가져가 버렸거나.
남궁천이 몸을 휙 돌리고는 냉이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광풍사라고 했죠? 몽골인으로 이루어진 문파입니까?”
“뭐, 중원으로 따지자면 문파라고 할 수도 있겠네만.”
“위치가 어딥니까?”
“내가 어찌 알겠나?”
“왜 몰라요?”
“허허. 자네 말대로 광풍사는 몽골인들로 이루어졌어. 그리고 몽골인은 유목민일세. 한 곳에 정착하지 않지.”
“아…….”
남궁천이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듯 탄식을 흘렸다.
확실히 유목민의 특성상 계속해서 주거지를 옮기고 있으리라.
“아으! 젠장!”
“대체 왜 그러나? 여기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가?”
“그냥 찾는 게 있었어요.”
“뭔데 그러나?”
“별건 아니고. 책에서 본 게 있어서요.”
“책에서? 그게 뭔데?”
“예. 양곡현에 태양궁 장보도가 있다고요.”
“허허! 그 허무맹랑한 내용을 믿다니. 확실히 아직 자네가 어리긴 하군. 설사 있다고 해도 대부분의 장보도는 가짜라네. 그러니 자네도…….”
“아으! 젠장! 태양신단을 찾고 만년빙정까지 딱 가지면 완벽한 건데!”
말을 잇던 냉이겸이 눈썹을 성큼 추켜올렸다.
‘얼씨구? 이젠 아주 그냥 만년빙정이 제 것 다 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