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 그딴 식으로 말하면
사박사박.
잿더미 위로 발자국이 남겨진다.
맹주전이 있던 자리.
주변이 온통 검다.
냉이겸과 빙설이 지나가는 잿길 위로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으며 얼어붙었다.
그렇게 시커멓게 그을린 기둥 사이로 들어서니, 마침 저만치 무덤처럼 무너져 내린 태사의가 보였고, 그 위에 남궁검이 앉아 있었다.
온통 잿더미로 파묻힌 곳이었지만, 남궁검의 자태는 고고했고, 옷자락은 얼룩이 조금도 묻지 않은 상태였다.
냉이겸과 빙설은 얼음장처럼 굳은 남궁검을 보고는 잠시 멈칫거렸다.
빙설이 먼저 조심스럽게 전음을 흘렸다.
[왜 하필 이런 곳에서 보자고 했을까요?]
[이곳이 맹주전이지 않느냐?]
[그렇긴 하지만 다 불에 타서 무너져 내렸잖아요. 잿더미밖에 없는 맹주전을 자랑하고 싶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마 고도의 심리전일 게다.]
[심리전이요?]
[이미 너는 지금 그런 것이 궁금하지 않느냐? 정보의 불균형이 주는 불안감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지. 그리고 긴장을 하게 되면 상황이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 결국 환경을 상대적 우위에 두려는 수단이다.]
[아…… 고수들의 영역은 속셈이 복잡하군요.]
[그게 강호다. 소리장도(笑裏藏刀)의 세계. 앞에서 이를 드러내며 웃지만, 뒤로는 칼을 빼 드는 곳. 이 잿더미를 걸을 때마다 너는 재가 휘날려 옷에 묻지 않도록 신경 쓰지 않느냐?]
[맞아요. 신경 쓰여 죽겠어요.]
[그것 보아라. 태도를 조심하려다 보니 마음가짐도 주눅이 들게 되는 것이다.]
[아…….]
빙설이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마침 두 사람이 단상이 있었을 곳 앞에 멈춰 서서는 포권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자,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거추장스러운 예는 접어둡시다. 어차피 두 분은 빙궁의 사절로 오신 분들이 아니오?”
“실제로는 남궁천 단주를 생포해 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우리는 도움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냉이겸이 격식을 갖춰 사실대로 대꾸하자,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두 사람의 목을 치고 싶소. 하나 감정에 휩쓸려 분별없이 행동한다면 본 맹은 빙궁과 전쟁이라도 치러야겠지.”
“…….”
두 사람은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예전 같았으면 전쟁이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빙궁이 어딘가?
몽골 땅 너머에 있는 아득히 머나먼 새외 지역이 아닌가?
빙궁이 그 먼 거리를 이동하여 중원까지 치고 나오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궁주라면?
‘어쩌면 정말 가능할지도.’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남궁검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를 이었다.
“강호 사정이 복잡한 관계로 그런 번거로운 일을 감수하기 보다는 적랑단주의 의견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소. 하여 본 맹은 북해빙궁으로 적랑단주를 파견하는 바요.”
“맹주님의 용단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적랑단주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요. 만약 적랑단주에게 일이 생긴다면, 빙궁은…….”
파아아아앙!
순간 남궁검의 전신에서 뇌기가 폭사하면서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촤자자자자작!
벽력이 내리꽂히는 듯한 소리가 울리면서 주변의 잿더미가 일제히 산산이 흩어지며 눈발처럼 휘날렸다.
그럼에도 신기한 것은 세 사람이 서 있는 자리만은 보이지 않는 막에 보호되는 것처럼 재가 날아들지 않았다.
“보는 바와 같이 잿더미가 될 거요.”
한마디로 얼음밖에 없는 북해빙궁이라도 불태워 버리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빙설이 어깨를 움츠리며 냉이겸에게 전음을 흘렸다.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그냥 겁주려고 여기로 불러낸 것 같은데요?]
[그 또한 전략적 선택이겠지.]
냉이겸이 얼른 전음으로 답하고는 남궁검에게 말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지요.”
“좋소. 그리고 또 하나.”
“……?”
“함께 가는 것은 적랑단주 혼자가 아니오. 적랑단 대주들도 함께 갈 거요.”
“대주들까지입니까?”
“그렇소. 이왕 생포한다면 적랑단주의 부하까지 함께 사로잡았다고 하면 그 공이 더 크지 않겠소?”
“그건 그렇지만…….”
냉이겸이 말을 얼버무렸다.
끌고 갈 인원이 너무 많아지게 되면 오히려 조심해야 할 부분도 많은 법.
그렇다고 여기서 거절을 하면 기껏 마음을 돌린 남궁검이 다시 돌아설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냉이겸이 포권을 하며 답했다.
“맹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 *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에 간다고?”
윤종승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남궁천에게 물었다.
윤종승뿐만 아니라 다른 적랑단 대주들도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남궁천만 바라보았다.
남궁천이 툭 던지듯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 북해빙궁에서 사절이 왔으니 이런 날이 올 거란 건 짐작했어야지.”
“그게 그렇게 되나?”
“어쨌거나 싫든 좋든 맹주님이 직접 내리신 임무다. 다들 떠날 채비 하라고.”
“아니, 그 먼 길을 떠나는데 무슨 번갯불에 콩 볶듯이 가냐고!”
“다시 말하지만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임무야. 임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임해야 하는 법이지.”
“그렇긴 한데…….”
“더 이상 구시렁거리면 항명으로 간주하겠다.”
“윽.”
윤종승이 입을 다물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그럼 두 분을 정식으로 소개하지. 이분은 빙궁에서 오신 한빙검 냉이겸 대협이시고, 빙설 소저다.”
대주들의 시선을 받은 두 사람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서서 포권했다. 서로 대충 인사를 주고받은 후 냉이겸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임무를 맡게 된 것은 본 궁의 사정 때문이라네. 이에 대해 심심한 사과를 드리겠네. 더불어 자네들이 한 가지 명심해 줘야 할 것이 있다네.”
“무엇입니까?”
듣고만 있던 유현이 묻자, 냉이겸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빙궁까지 가는 동안은 상관없으나, 빙궁 근처에 다다라서는 자네들이 철저히 포로 역할에 임해줘야 한다는 말일세. 자네들은 어디까지나 생포되어 이송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말일세.”
“그럼 혹시 이미 전서를 보낸 건지요?”
“그렇다네. 자네들을 모두 생포했으며 곧 압송할 것이라고 서신을 보내둔 상황이지.”
과연 적랑단 대주들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저마다 표정을 슬쩍 구겼다.
빙설이 그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냉이겸에게 전음을 흘렸다.
[좀 당황한 것 같네요.]
[그럴 게다. 이렇게까지 내가 철두철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이 강호를 살아가려면 언제나 치밀한 전략으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으응?”
유현이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
“무림맹에서 사절 행세를 하셨으니, 그곳에도 답례처럼 사절이 찾아가는 것으로 하면 자연스러울 텐데요. 그러고 나서 빙궁에서 생포를 해도 될 테니.”
“어…….”
“……?”
“……그러네?”
냉이겸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빙설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간단한 문제가 아닌가?
사절처럼 데리고 간 다음에 그곳에서 빙궁의 무인들로 포위하면 될 일이다.
“커흠! 흠! 뭐, 이래나 저래나 조삼모사 아니겠는가? 묶여서 들어가나, 들어가서 묶이나 그게 그거지.”
그러자 팽수혁이 태도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나섰다.
“그러니까 영감님 말씀대로면 우리가 꽁꽁 포박된 채로 끌려 들어가야 한단 말 아뇨?”
“그렇네.”
“흐음. 그럼 연기가 좀 필요하겠네요?”
“그렇지. 그러니 괜히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은 삼가주시게.”
“물론이오! 맡겨주시오!”
“자네는 연기를 좀 할 줄 아는 모양이군?”
하긴. 설이 같은 애가 또 있으랴.
물론 냉이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팽수혁을 제외한 다른 대주들이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하나 팽수혁만큼은 호탕하게 웃으며 제 가슴을 팡팡 쳤다.
“당연하지! 그쯤은 식은 죽 먹기요!”
“호오, 그럼 한번 시험해 봐도 되겠는가? 매우 중요한 문제라서 그렇다네.”
“좋소. 그런데 어찌 시험해 보겠단 거요?”
“내가 빙 궁주 역할을 맡아보지. 자네에게 질문을 던질 걸세.”
“좋소, 어디 던져보시오.”
냉이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표정을 다잡았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이 정말 빙 궁주를 연상시킬 만큼 딱딱하게 굳더니 한기 서린 목소리를 흘려냈다.
“자네들이 감히 한빙검 장로와 내 딸에게 덤벼들었던 적랑단 대주들인가?”
이제 모두의 시선이 팽수혁에게 향했다. 특히 냉이겸과 빙설은 어느 정도 기대에 찬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팽수혁이 어느 순간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호오, 기도가 달라졌구나!’
냉이겸이 주먹을 불끈 쥐며 눈에 힘을 주었다.
마침내 팽수혁의 입이 열렸다.
“그렇소! 내가 바로 적랑단 삼대주 팽수혁이오! 빙궁은 어찌 무림맹 소속인 우리를 이렇게 사로잡아 포로처럼 부리는 것이오? 이는 결코 합당한 처우가 아니오!”
‘오오! 꽤 좋잖아?’
냉이겸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팽수혁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이런 처우를 도저히 참을 수 없소! 확실히 말해두는데, 우리는 빙궁 근처까지 자유롭게 이동한 다음 뒤늦게 포박당한 게 아니오! 무림맹에서 비밀 임무를 받고 온 것은 더더욱 아니고! 나는 단언컨대 처음 한빙검 장로와 빙설 소저를 만난 곳이 연회장이 아니었소! 또한 지금 나는 결코 연기를 하는 중이 아니며, 절대 한빙검 장로와 짜고 치는 상황이 아니란 말이오! 그래서 나는 무척이나 억울하고 화가 나오!”
“…….”
“…….”
실내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런데…….
“와아아. 정말 감탄했어요! 팽 소협! 정말이지 신이 내린 연기였어요! 어쩜 그렇게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거죠?”
“크흠. 빙 소저, 모든 연기는 믿음이 중요하오. 상대를 확실히 속일 수 있다는 믿음!”
“아아! 믿음!”
“그리고 반드시 완성도 높은 연기를 펼치겠다는 소망이 있어야 하오.”
“소망!”
“마지막으로 자신의 연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오.”
“사랑!”
“그렇지. 정리하자면 믿음, 소망, 사랑.”
“와아아.”
빙설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선망의 눈빛으로 팽수혁을 보았다.
어깨에 힘이 한껏 들어간 팽수혁이 턱을 치켜들고는 세상 우월한 자세로 서 있었다.
남궁천이 냉이겸에게 턱짓을 하며 물었다.
“혹시 소저가 팽 대주를 비꼬는 거요?”
“아마도…… 아닐 걸세. 진심일 걸세.”
“…….”
그러는 사이 팽수혁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빙설의 어깨를 두드렸다.
“크하하하! 좋소. 빙 소저가 그리도 간절히 원한다면 내 소저께 친히 연기 비결을 가르쳐 드리리다!”
“아, 저 말고요. 저는 사실 어느 정도 연기가 되거든요.”
“그럼 누구?”
“우리 장로님요. 도무지 연기가 어설퍼서요. 이번에 연회에서 들킨 것도 다 장로님의 어설픈 연기 때문에…… 후유.”
“아, 그렇군! 그럼 장로님께 가르쳐 드리겠소!”
“와아!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나머지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것들 그냥 여기서 확 묻어버려?’
* * *
남궁검은 무림맹 정문까지 나와서 배웅해주었다.
“부디 조심하거라.”
“맹주님, 그 소리만 벌써 삼만 번째 듣는 것 같습니다.”
“네가 안전할 수만 있다면 백만 번, 천만 번도 말할 수 있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고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어째 손주 사랑이 점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 같다.
‘뭐, 그건 그것대로 나쁘진 않지만.’
남궁천이 포권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가능한 북해빙궁과 동맹까지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냐, 무운을 빈다.”
그러자 대주들도 일제히 포권하며 소리쳤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무사 복귀하도록.”
“존명!”
그렇게 대주들이 냉이겸과 빙설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궁천도 그 뒤를 따라가려는데, 마침 남궁검이 다시 불러 세웠다.
“천아.”
할아버지로서 손자를 부르는 목소리에 남궁천이 멈칫하고는 돌아보았다.
여전히 얼음장 같은 남궁검의 얼굴이었지만, 입에서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끼니 거르지 마라.”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