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 그딴 식으로 말하면
장엄한 맹주전이 세워져 있던 터.
하나 지금은 시커먼 잿더미만 보인다.
사박사박.
잿더미 사이를 조용히 걷는 두 사람.
바로 남궁검과 남궁천이었다.
바람결에 재가 조금만 날려도 옷이 더러워질 만도 한데, 두 사람의 장삼은 여전히 푸르고 깨끗했다.
공력을 미세하게 운기하여 잿가루가 달라붙지 못하도록 조절하기 때문이었다.
한참이나 걸어가던 남궁검이 잿더미 복판에 멈춰 서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기어이 갈 생각이더냐?”
“예, 할아버지.”
“너는 저들의 진의를 어디까지 믿느냐?”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걸 제게 말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 저들이 네게 도움을 요구한다는 건 사실인 듯하다. 하나 그들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다. 네 말에 따르면 저들은 널 원수로 여겨 빚을 갚으러 찾아온 것이다. 한데 갑자기 은인이 되어달라는 꼴이다.”
“확실히 말이 안 되긴 하죠.”
“그걸 알면서도 가려는 이유는?”
남궁천이 쓴웃음을 짓다가 남궁검을 보며 말했다.
“궁금해서요.”
“궁금하다는 건?”
“순수한 호기심입니다. 저들이 숨기는 것이 무엇인지. 왜 숨기는 것인지. 어째서 저렇게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것인지. 북해빙궁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인지.”
“단지 그 호기심을 풀기 위해서 굳이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냐?”
남궁검의 말투는 어딘지 나무라는 듯하다. 그만큼 걱정이 된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남궁천을 보는 남궁검의 눈빛에는 심려가 가득했다.
남궁천은 그 눈빛이 여간 낯설면서도 고마웠다.
저런 눈빛을 받아본 게 언제던가?
전생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눈빛마저 기억에서 가물가물하다.
자신을 저런 눈으로 바라볼 사람이 다신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새외세력의 감시와 전투가 적랑단의 임무죠. 그리고 북해빙궁이라면 새외세력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곳입니다.”
“하면 적랑단주로서 적랑단원을 모두 이끌고 가거라.”
“할아버지.”
“나는 반대다. 네가 내 말을 거역하고 기어이 그 먼 길을 떠난다면, 아마 내 속은 이곳의 잿더미처럼 타버리고 말 것이다.”
말을 마친 남궁검이 뒷짐을 지더니 휙 돌아섰다.
그는 진심이었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남궁선을 보듬어주지 못한 채 잃었다. 그리고 사위 진천랑을 허무하게 보내 버렸다.
세상의 외면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동안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갔다.
하지만 이제는 싸우기로 하지 않았던가?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사지로 걸어가겠다는데 어찌 반대하지 않을 수가 있나?
남궁천은 그런 남궁검의 등을 보면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확실히 이런 기분이 나쁘진 않다.
누군가 지켜주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해졌는데, 어째서인지 남궁검 앞에서는 아직도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되어 있는 기분.
잠시 그 따스함을 느끼던 남궁천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저들이 뭔가를 숨기고 있으나 악한 자들은 아닙니다. 검을 섞어보지 않았습니까?”
한 번의 표정보다 한마디 말이 알기 쉽고, 한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알기 쉽다.
그리고 무인이라면 일합을 섞어보면 훨씬 많은 정보를 알게 된다.
그것은 오감을 뛰어넘는 육감의 영역이다.
남궁검은 남궁천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확실히 냉이겸과 빙설은 악한 자들이 아니었기에.
“저들의 의도와 달리 네가 위험할 수 있으니 하는 말이다.”
“할아버지.”
“…….”
“사실 전 이번에 반역자들을 정리하고 나면 은퇴를 생각했습니다.”
“은퇴라고?”
남궁검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돌아보았다.
‘은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에 남궁천은 너무나 젊지 않던가?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젠 좀 쉬고 싶었습니다.”
“아니, 네 나이가 몇 살인데 벌써 은퇴라는…….”
말을 꺼내던 남궁검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남궁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혹,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제 어미를 떠올리는 것일까?
지금 남궁천의 눈빛은 아득한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몹시 지쳐 보였다.
분명 약관에 지나지 않은 청년인데, 이 순간 스치는 표정을 보면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고수를 보는 것만 같다.
마치 수십 년을 세상과 강호에 시달리면서 고독하고도 처절한 싸움을 이어온 사람처럼.
‘천아. 무엇이 너를 그리 외롭게 만들었느냐? 어째서 너는 지금도 홀로 서 있느냐?’
가슴이 아릿하다.
하나밖에 없는 손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못내 속상하다.
하나 세상이 그렇고, 강호가 그런 법.
결국은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남궁검이 고개를 들고 별을 보았다.
“기어이 가겠다는 것이냐?”
다시 물었다.
이번에 꺼낸 질문은 반대를 하기 위한 준비가 아니었다.
그 뜻을 남궁천도 읽은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검을 돌아보았다.
“예, 할아버지. 보내주십시오. 이번 여정이 제게는 하나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내주시지 않으면…… 그냥 은퇴나 하려고요.”
남궁천이 씩 웃는다.
결국 남궁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겠지. 하나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물론입니다.”
“만약 네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
“북해빙궁은 염화지옥이 될 것이다.”
얼음밖에 없는 북해빙궁을 염화지옥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그만큼 처절한 응징을 하고야 말겠다는 뜻이리라.
남궁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마침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서서 보니 총군사 제갈승이 자박자박 걸어오고 있었다.
느닷없는 등장임에도 남궁검은 알고 있었다는 듯 제갈승에게 물었다.
“알아보았는가?”
“예, 맹주님. 하나 북해빙궁은 새외 세력 중에서도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다 보니 정보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북해빙궁이 강호의 일에 개입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이고요.”
“자네답지 않게 사설이 길군. 필요한 정보만 말하게.”
남궁검의 힐책에 제갈승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말했다.
“빙하운 궁주는 예전부터 주변 사람들의 신뢰와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빙궁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들까지 궁주를 찬양할 정도였지요.”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남궁천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신이 알고 있던 빙하운이었다. 누구라도 빙하운을 제대로 알면 절대 싫어할 수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가끔 지나치게 딸 바보 행동을 하는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
“그런데 수년 전부터 빙 궁주의 지지도가 급격히 추락했습니다. 빙궁에서도 폭정을 일삼기 시작했고, 이따금씩 몽골 땅까지 침략해 수탈과 약탈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빙궁의 기강은 더 공고하게 다졌지만, 이른바 공포 정치에 가까운 상황이라 현재로서는 빙 궁주의 눈치를 보는 자들이 넘쳐나고 있답니다. 그만큼 간신배도 많아졌을 거라는 게 천뇌당의 분석입니다.”
“잠깐만요. 지금 조사한 사람이 빙 궁주…… 그러니까 빙하운이 맞아요?”
“그렇네.”
제갈승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천이 미간을 푹 구겼다.
‘그 빙하운이 정말 그런 짓을 했다고?’
자신이 알던 인물을 떠올리면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남궁천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자, 남궁검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느냐? 네가 빙 궁주와 아는 사이라도 되더냐?”
“예, 좀…….”
“아는 사이라고?”
“아? 예?”
무심결에 나온 대답에 남궁검도 놀라고, 남궁천도 놀라서 되물었다. 제갈승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고 쳐다보았다.
‘이런, 무심코 나도 모르게…….’
그만큼 빙하운의 변심이 충격적이란 뜻이리라.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네가 어떻게 빙 궁주를 아느냐? 만나본 적이라도 있더냐?”
“아…… 그게 책으로 배웠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무슨 책을 읽고 다니는 것이야?”
“하하하. 그러게요.”
“저잣거리에 돌아다니는 잡서 따위는 제멋대로 지어낸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책도 가려서 읽어야 한다. 자칫 잘못된 정보로 선입견이 생기면 네가 위험해질 수 있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남궁천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괜히 말이 길어져 봐야 남궁검의 걱정만 늘어날 게 뻔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정말로 북해빙궁으로 가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도대체 북해빙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왜 그 빙하운이 그렇게 변해 버린 것인지.
남궁검이 제갈승을 향해 물었다.
“하면 저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적랑단주 생포령을 받은 건 사실인 듯합니다. 설규 역시 빙궁 출신이 맞습니다. 다만 한빙검과 빙설이 남궁 단주의 도움을 원하는 것도 사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흐음. 빙 궁주가 내 손자를 노렸단 말이지. 그 추측이 틀릴 가능성은?”
“일 할 미만으로 보고 있습니다.”
“거의 확신한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제갈승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실제로 천뇌당에서 구 할의 가능성을 얘기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들에게 일 할은 정말로 만에 하나를 의식한 것일 뿐이니까.
지나간 과거가 아닌 이상 그들은 언제나 일 할 정도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혹자는 그것을 두고 비겁한 예측이라고 하지만, 그 일 할의 가능성을 남겨둠으로 인해서 늘 변수에 대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되니 남궁검은 더욱 빙궁에서 온 두 사람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빙 궁주에게 병환이 있는가?”
“좀 더 조사해 봐야겠지만, 현재 천뇌당이 수집한 정보에는 그런 사실이 파악되지 않습니다.”
“빙 궁주가 건강하다?”
“수집한 정보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다만…….”
“다만?”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는 빙 궁주에게 광증(狂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광증?”
“예, 선량하고 뛰어난 인품을 지닌 빙 궁주가 세월이 흐르면서 너무 변해 버리니 그런 소문이 도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지. 아니, 변하는 게 아니라 나이가 들고 지위가 오르면서 가려졌던 본색이 드러나는 게지.”
싸늘하게 말을 뱉은 남궁검이 이젠 남궁천에게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어찌할 것이냐? 이래도 갈 것이냐? 저들을 따라가면 너는 빙궁에서 죄인 취급 당할 것이다.”
“제가 안 가면 빙궁이 여기까지 치고 올 수도 있습니다.”
“막으면 된다.”
“하나 제가 가면 불필요한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마교의 준동에 조심해야 할 시기고요.”
“……흐음. 알았다. 네 의지가 확고하니 더는 말하지 않겠다. 단, 이 또한 적랑단주의 임무라고 했으니 적랑단 대주들은 모두 데리고 가라.”
“대원들만 남길 수는 없어요.”
“그럼 손우곤 대주만 남기고 데리고 가도록.”
“으음. 꼭 그래야만 할까요?”
“천아.”
“예, 할아버지.”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맹주로서 적랑단주에게 내리는 명령. 대주들과 함께 북해빙궁을 방문하여 그들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알아 오라는 것이다.”
남궁검의 목소리와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다.
남궁천이 포권하며 대답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언제부터 준비할 것이냐?”
“내일 바로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빨리?”
남궁검의 표정에 아쉬움이 역력했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죠. 참, 한 명 더 데리고 가도 됩니까?”
“그게 누구냐?”
* * *
똑…… 똑…….
묘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저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만 같다.
예전에도 그랬는데, 이번에는 그 증상이 더 심해진 것만 같다.
저벅저벅……!
마침 인기척이 들리더니 철창 너머로 그림자가 나타났다.
상대를 확인한 백묘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더니 표정이 대번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네놈은…… 천마시여!”
“이상한 인사법이구나. 백묘.”
“닥쳐라!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러는 거지?”
“네가 그러는 걸 왜 나한테 묻나?”
“왜 온 거냐? 남궁천! 내가 이런 꼴로 잡혀 있는 걸 보니 재미있어?”
“백묘.”
“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마시여.”
확실히 백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었다.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나하고 어디 좀 가자. 먼 곳에 다녀와야겠다.”
“네가 그딴 식으로 말하면 내가 절대 충성하며 따르겠습니다!”
“으음. 그래.”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청명단 효과가 좀 묘하게 들어간 모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