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 왜 이렇게 고생을 하나?
“읍! 으읍! 왜, 왜…… 읍!”
결국 설은 노인의 손에 이끌려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겨우 노인의 품에서 벗어난 설이 발끈해서 나직이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장로님! 들킬 뻔했잖아요!”
“하아, 그냥 넘어가자.”
누구 때문에 들킬 뻔했는지 제대로 따지자면 할 말이 넘쳐났지만, 우선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생각이 바뀌었다. 이대로 숨어서 지켜보는 게 낫겠구나.”
“정말 변덕쟁이시라니까.”
‘때릴까?’
순간 욱하는 감정이 올라왔지만 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빙궁 후원에 조각해 두었던 얼음 불상을 떠올렸다.
‘그래.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히자.’
어쨌거나 다행인 점이라면 남궁천이 무슨 생각에 골몰히 빠진 것인지 이 두 사람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이 골목에서 고개만 빼고는 노인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다행히 우리를 눈치채지 못했나 봐요.”
“그러게. 운이 좋았다.”
“생각보다 둔하네요.”
“글쎄. 어쩌면 둔한 게 아니라…….”
노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정도로 내면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은 무인에게 흔한 증상이 아니다. 옆구리에 칼을 찬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주변을 의식하게 되어 있고, 조금이라도 평소와 다른 낌새가 보인다면 긴장하게 마련이니까.
한데 강호신룡이라고도 불리는 남궁천이 자신들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역시…….
“모종의 깨달음을 앞두고 있는 것인지도.”
“깨달음이라고요?”
“강호신룡이라고도 불리는 적랑단주다. 성장 속도가 가히 일반 무인에 비할 바가 아닐 테지. 저건 분명 무인이 깨달음을 앞두고 심연에 몰두하는 침사 단계다.”
“침사 단계…… 아, 그래서 장로님이 그렇게 수상하게 굴어도 모르는 거군요?”
“설아, 네가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쉿! 지금 남궁천이 뭔가 말하려고 해요!”
“흐음, 그럼 뭐라고 하는지 잘 들어보아라. 깨달음을 얻은 자의 첫마디는 많은 뜻을 함유하고 있으니.”
“네!”
마침 남궁천이 뭔가 떠오른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때리며 고개를 들었다.
“좋아, 정했다! 역시 오늘 저녁은 고기국수에 술이지! 고민 끝!”
순간 노인과 설이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렇게 신룡객잔으로 들어가는 남궁천을 보면서 노인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생각한다는 게 고작 그쪽이냐!”
“흐응. 적랑단주의 침사 단계는 참으로 오묘하군요.”
설이 곁눈질을 흘기며 말하자,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변명했다.
“커흠! 적랑단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장로님이 헛다리짚은 걸 수도 있죠.”
“끄음. 저녁 요리 생각하기 전에는 깨달음에 몰두하고 있었을 게야.”
“네에, 네에. 그렇다고 치죠. 그나저나 적랑단은 어쩌고 혼자 복귀한 걸까요?”
“글쎄다. 아무래도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저녁 고민요?”
“끄응. 그만하지?”
“호호호. 재미있어라. 우리도 들어가요. 우선은 감시해야죠.”
“그래, 하지만 눈에 띄게 행동하면 안 된다. 우선 남궁천이 혼자 있을 때를 노려야 한다.”
“물론이죠, 다른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그렇지. 남궁천은 무림맹의 요직에 있는 녀석이다. 그저 그럴싸한 말로 구슬려서 본 궁에 끌고 갈 수 있는 녀석이 아니란 말이지.”
“궁주님은 이왕이면 산 채로 잡아 오라고 하셨지만…….”
“여차하면 시체라도 가져가야겠지.”
“정말 그러실 건가요?”
“못할 건 없다.”
이번 대답만큼은 노인도 싸늘하게 식은 표정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슨한 농담을 주고받던 두 사람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종의 결의가 눈빛에서 엿보인다.
“우선 홀몸으로 객잔에 들어갔으니, 기회는 많이 있을 거다. 일행이 없다는 건 우리에게 좋은 일이지. 곧바로 맹으로 돌아가지 않고 객잔을 들른 것 역시 천우의 기회구나.”
“왜 맹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반역자들을 토벌했으니 환대를 받으며 금의환향해도 될 텐데.”
“글쎄. 지금까지 남궁천의 행보로 보아서는 굉장히 소탈한 성격인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떠받드는 걸 즐기기보단 혼자 조용히 스스로를 곱씹어보는 성격이란 말이지.”
노인이 말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신룡객잔으로 향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사색을 즐기고 있을 때 접근하면 되겠네요.”
“그렇지. 우선은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아, 말은 내가 직접 걸 테니 너는 나서지 말아라.”
“장로님은 좀 불안하긴 하지만 그럴게요.”
“끄음. 잘 생각했다. 아무튼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서 둘만의 장소로 옮길 생각이다. 거기서 힘으로 제압할 수밖에.”
“저도 함께 갈 거예요.”
“흐음. 아무래도 나 혼자 행동하는 게 편할 것 같다만.”
“싫어요! 저도 함께 갈 거예요. 원래 이건 제 임무였잖아요!”
“알겠다. 대신 너는 내 손녀다. 절대적으로 내 손녀. 나를 장로라고 부르면 안 된다. 할아비라고 불러야 해.”
“그거야 어렵지 않죠. 어려서는 장로님을 할아버지라고 불렀으니까요.”
“하긴. 그나마 다행이구나. 그래도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네, 장로…… 아니, 할아버지.”
“끄음. 정신 단단히 차리고!”
“넵! 할아버지!”
거듭 다짐을 받아낸 노인이 신룡객잔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말했다.
“가능한 빠르게 움직이도록 하자. 홀로 귀환했다는 것은 틀림없이 조용하게 생각할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분명 남궁천은 지금 갑자기 삶의 회의감을 느꼈거나, 모종의 깨달음이 찾아왔거나, 인생의 큰 전환점을 앞둔…….”
“으하하하하! 축하합니다! 단주님! 역시 단주님은 지상 최고이십니다!”
“옳습니다! 우리 적랑단주님이야말로 황학루처럼 우뚝 솟은 분이시죠!”
“우리 객잔도 신룡객잔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나서부터는 대박 행진 아닙니까요? 이게 다 주군…… 아니, 적랑단주님 덕분이죠! 와하하핫!”
객잔 안에서 왁자한 소리가 갑자기 쏟아져 나왔다.
노인과 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바라보니, 일 층에서 주인장과 점소이를 비롯하여 몇몇 손님들까지 술판이 거하게 벌어졌다.
흥에 겨운 남궁천은 그새 취기가 잔뜩 올랐는지 탁자 위로 우뚝 올라서서는 허리에 손을 얹고 턱을 한껏 치켜들었다.
“하하하! 옳지! 나야말로 아주 높은 남자지! 자, 마음껏 우러러보아라! 목이 꺾이도록 우러러보도록!”
“오오오! 단주님! 눈이 부십니다!”
“역시 반역자를 퇴치하신 적랑단주님이십니다!”
“반역자를 퇴치하셨으니, 우리 신룡객잔 매출도 오를 일만 남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단주님!”
“감축드립니다!”
객잔 주인장을 비롯한 점소이와 손님들이 연신 박수를 치며 축하 인사를 건넨다.
남궁천은 한껏 취한 사람처럼 술병을 나발 불면서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한참이나 빙벽처럼 서 있던 노인과 설이 겨우 서로를 돌아보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설이었다.
“대단한 고찰 중이네요.”
“쿨럭, 쿨럭!”
“중원인들은 삶의 회의감을 다 함께 즐기나 봐요. 깨달음이나 인생의 전환점도 함께 나누고.”
“커흠! 흠! 여기 손님 안 받으시는가!”
할 말이 궁해진 노인이 다소 짜증스럽게 소리치자,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설이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따졌다.
“눈에 띄게 행동하지 말자면서욧!”
“어…… 그러게 말이다…….”
노인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데, 점소이 하나가 다가와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야? 늙은이가 노망났어? 왜 들어오자마자 큰 소리야? 이 즐거운 분위기가 보이지도 않아? 어엉?”
“자, 자네는 여기 점소이가 아닌가?”
“맞아! 맞는데 그게 어쩌라고? 뭐 하러 온 거야?”
“묵을 방을 찾으러…… 왔네만…….”
“그럼 용건부터 말을 했어야지! 영감 손녀가 예뻐서 봐주는 줄 알아! 알겠어?”
그러자 이번엔 설이 참지 못하고 발끈하며 나섰다.
“이봐요! 최소한 손님을 받으려면……!”
하지만 설이 말을 마저 잇기도 전에 노인이 손을 뻗어 제지했다.
대신 차분한 얼굴로 따졌다.
“자네는 손님을 늘 이런 식으로 대하는가?”
“당연하지! 그게 여기 방식이니까!”
“그게 이곳의 방식이라고?”
“허어! 아직도 모르는 영감이 있다니. 어디 북해빙궁에서 온 거야? 왜 이렇게 기본적인 설정도 몰라?”
“아니, 그걸 어떻…… 읍! 읍읍!”
무심결에 말을 꺼낸 설의 입을 장로가 손으로 틀어막았다.
장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많이 변했군. 어쨌거나 알았으니 방 하나 주게.”
“여기 열쇠 가져가슈.”
점소이가 여전히 퉁명스레 말하면서 열쇠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 와중에도 노인은 서투른 척 열쇠를 놓쳐 버리는 치밀함을 보였다.
“올라가자꾸나.”
“예. 장로…… 아니, 할아버지.”
그렇게 두 사람이 계단을 타고 올라가려는데, 마침 귀왕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불렀다.
“거기 잠깐.”
“무슨 일인가?”
“보아하니 멀리서 온 것 같은데…….”
꿀꺽……!
역시 들켜 버린 건가?
이렇게 되면 남궁천을 납치하거나 죽인다는 계획이 아주 어렵게 돌아갈 터였다.
귀왕이 헤벌쭉 웃었다.
“이왕 무한에 왔으니 우리 단주님을 위해 축배나 같이 듭시다! 크하하하! 어떻소? 영감! 보아하니 노망난 것 같진 않으니 같이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오늘만은 특별히 이 술이 다 공짜요!”
“흘흘. 괜찮네. 먼 길을 와서 좀 쉬고 싶군.”
“쩝, 늙은이가 저리 비실비실해서야. 곧 뒈질 때가 된 모양이군. 그럼 가서 쉬시오.”
역시나 발끈한 설이 뭐라고 나서려는 것을, 노인이 억지로 끌고 올라갔다.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면서 노인은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세상을 등지고 살았구나. 중원에 이런 문화가 자리 잡혔을 줄이야. 말세다, 말세야.’
여비를 아끼겠다고 그간 노숙만 한 게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 * *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남궁천은 술자리를 파하고 객실로 들어왔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분위기를 즐기긴 했지만, 사실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천중산에서부터 떠올렸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못 구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렇게 애를 쓰는가?’
이제 모든 걸 접어두고 객잔이나 운영하면서 여생을 유유자적 보내도 되지 않을까?
전생에 그토록 갈망했던 삶.
많은 사람과 아무렇지도 않게 부대끼며 그저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인생.
한데 이상하게 손을 놓지 못하겠다.
아직까지는 무림맹도.
남궁세가의 위상도.
‘인생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남궁천이 침상에 벌러덩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창밖으로 휘영청 떠오른 달이 보였다. 그 달빛에 여전히 기억이 선명한 남궁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아, 이제 난 뭘 위해서 살면 되는 거지?”
만약 남궁선이 옆에 있었으면 뭐라고 할까?
아직 마교가 남아 있다고?
소림과 무당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볼지도 모른다고?
아니다.
아마 남궁선은 그저 말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을 것이다.
남궁선은 그런 사람이니까.
마치 남궁선의 손길처럼 열린 창틈으로 쏟아지는 달빛이 남궁천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 전각 지붕.
납작 엎드린 그림자가 살짝 움직였다.
그 그림자는 바로 노인과 설이었다.
노인이 설을 향해 전음을 흘렸다.
[보아라.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술에 취한 게 아니다. 사색하고 있지 않느냐?]
[정말 그런 것 같네요. 뭔가 생각이 많아 보여요.]
[이제 노부의 촉을 믿을 수 있겠느냐?]
[네, 장로님!]
[저런 상태라면 곧 침사 단계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옆에서 불러도 모를 정도로 깊은 생각에 빠지는 게지.]
[그때를 노리시려고요?]
[왜? 비열해 보이느냐?]
[좀…….]
[강호가 원래 비열한 곳이다.]
[네…….]
그렇게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이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남궁천이 눈을 감은 채로 반각 이상 꼼짝도 하지 않았다.
노인의 말대로 완전한 침사 단계로 접어든 듯했다.
“가자!”
순간 노인이 지붕을 박차며 새처럼 날아갔다. 그 뒤를 설이 바짝 따라붙었다.
마치 부드러운 밤바람처럼 실내로 들어선 두 사람은 침상에 드러누운 남궁천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제 알겠느냐? 이것이 침사 단계다. 아주 깊이 심연에 가라앉아서 깨달음을 탐구하는 단계. 해서 무인은 침사 단계가 올 시기에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괜히 폐관수련을 하는 게 아니지. 언제 어느 때든 심연에 몰두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니까.”
“과연 그렇군요.”
“남궁천은 아직 어려서 그걸 조절하지 못한 게다. 보아라. 우리가 바로 옆에서 말을 하는데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빠져…….”
“드르르렁……! 쿠울! 드르르르러엉! 쿠우울!”
느닷없이 코를 고는 남궁천을 보며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새끼…… 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