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 왜 이렇게 고생을 하나?
상우춘은 돌처럼 굳은 자세로 눈만 연신 끔뻑였다.
‘정말로…… 살려냈다고?’
그는 가늘게 떠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마지막으로 진맥했을 때 악후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맥이 너무 불규칙해서 당장 발작을 일으키다가 사망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상태였다.
한데 지금 악후의 모습은 평온하기 짝이 없다.
조금 전의 급박한 상황들이 전부 거짓말 같다.
‘이게 정말 가능한 건가……?’
상우춘의 멍한 시선이 천독노의 등으로 향했다.
등이 구부정하고 키가 작달막한 노인이다.
무림맹에서 종종 보는 선풍도골의 풍채와는 거리가 멀다.
한마디로 추남에 가깝다.
외모에서는 어떠한 위엄이나 품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얼굴만 봐도 오랜 세월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온 아집과 독선이 묻어나온다.
하나 그가 의술을 펼치는 순간, 선입견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신묘한 경지였다.
그가 왜 강호에서 그토록 유명한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죽어가고 있던 환자를 살렸다.
마치 바늘은 살아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았고, 실은 바늘의 움직임에 따라 춤을 추는 듯했다.
그리고 천독노는 연주를 지휘하는 사람 같았다.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하는 그 모습에서 경탄이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단박에 중독 상황을 눈치채는 것도 모자라, 독의 종류를 파악하고 해독제까지 순식간에 만들어내다니!
봉합술에 해독술까지 완벽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다른 세상 사람이군.’
인정하기 싫지만 저절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사실 지금까지 상우춘은 스스로에게 어느 정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약천당에서 자신보다 의술이 뛰어난 자는 한 손에 꼽힐 정도였으니까.
심지어 지금은 달아나고 없는 약천당주를 보면서도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출 수 있다고 믿었다.
한데 천독노는?
그냥 차원이 다르다.
저 작은 등이 한없이 광활해 보인다.
마침 시선을 느낀 것인지 천독노가 눈살을 슬쩍 구기며 돌아섰다.
“뭐야? 할 말 있나?”
퉁명스럽게 던진 한마디.
원래라면 지금쯤 한껏 비아냥거려야겠지만, 상우춘은 움찔 떨고는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그렇게 한참 만에 입이 열렸다.
“……습니다.”
“뭐라고?”
“고맙…… 습니다.”
상우춘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천독노가 귀에 손을 대고는 짓궂게 반문했다.
“대체 뭐라는 거야? 모기를 잡아먹은 게야? 왜 이렇게 엥엥거리기만 하고 하나도 안 들려?”
결국 상우춘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고맙습니다! 노 선배가 본 맹의 청랑단주를 살려주었습니다! 의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봉합술에 약재술이었습니다!”
실내에 상우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천독노에게 가장 강하게 반발했던 그였기에 그가 외친 소리는 많은 의원에게 자극이 되었다.
그제야 천독노가 킬킬거리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걸 이제 안 게야? 이제 좀 본좌를 우러러 보겠느냐?”
“선입견을 가진 것은 사실이나, 보는 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선배께서는 확실히 대단한 분입니다.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상우춘이 솔직하게 인정하고 나오자, 기분이 좋아진 천독노가 그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크하하하! 이 친구, 이제 보니 아주 꽉 막힌 친구는 아닌가 보군! 그렇지! 나는 한껏 우러러볼 사람이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저기 황학루처럼 우뚝 솟은 남자랄까? 앞으로 마음껏 우러러보도록! 으하하하!”
“저어…… 약천당주로 오시는 건 확실한지요?”
“그건 또 왜 물어? 아직도 불만이야?”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어르신께 의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흥!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파 나부랭이가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염치도 좋군.”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상우춘은 확실히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사내였다.
그는 이제 완전히 달라진 태도로 천독노를 대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천독노가 당주가 되어주길 바라기도 했다.
‘이런 사람이라면…… 배울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독노는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었다.
그가 고개를 홱 돌리고는 말했다.
“일없네. 내가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남을 이유가 없지. 자네 말대로 나는 사파 나부랭이니까 유유자적 사는 게 좋겠지.”
“제 실언을 용서해 주시지요. 부디 당주님으로 남으셔서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흐음. 그 정도로 간절한가?”
“예, 진심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이야. 그걸 해주겠나?”
“그게 뭔지요?”
“흐흐. 대가리 박아.”
“예……?”
“대가리 박아보란 말일세. 크으, 나도 이걸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단 말이지.”
순간 상우춘의 머릿속에 ‘정말로 이 영감으로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 * *
한편 천독노가 환자를 치료하는 동안 정수리로 한기를 불어넣어 열을 식혀주던 노인은 약천당을 빠져나와 유유자적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분주하게 스쳐 가는 무인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난장판이군. 하긴 이제 막 반역자들을 진압했으니 정신이 없을 만도 하겠지.’
그렇게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며 걷던 그가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확실히 중원은 덥구나.’
초여름도 되지 않은 날씨였음에도 노인은 그렇게 땀을 흘리면서 내공을 운기했다.
몸을 차갑게 식혀서 더위를 날리려는 속셈이었다.
그 바람에 그가 내딛는 곳마다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지만, 그걸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맹원들 모두 지금은 맹을 정비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그렇게 넓디넓은 장원을 거닐며 구경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장로님!”
어디선가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노인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았다.
“설아. 왔느냐? 허허.”
그가 보는 곳에는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서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푸른 무복에 백옥같이 하얀 섬섬옥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비록 면사로 가려져 있다지만 그 너머로 얼핏 보이는 그림자만 가늠해도 상당한 미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인이 발끈한 목소리로 따졌다.
“장로님! 이렇게 자꾸 마음대로 돌아다니시면 어떡해요? 제가 얼마나 찾았다고요? 맹원들 눈에 너무 띄지 말아야 한다니까요!”
“허허, 지금 네 목소리가 더 눈에 띄는 것 같다만.”
“아……!”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여인이 주위를 얼른 둘러보았다.
그녀가 곧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좀 어딜 가시더라도 말은 해주세요.”
“알겠다. 한데 그 면사는 무엇이냐?”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려고요.”
“흐음. 오히려 이목이 더 집중될 것 같다만.”
“아…… 그럴까요? 그럼 차라리 면사를 벗어버리는 게 나을까요?”
말을 마친 설이 면사를 휙 벗어 던졌다.
그러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얼굴이 훤하게 드러났다.
노인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이러나저러나 비슷하구나.”
“그럼 그냥 벗어버리죠. 어차피 똑같을 거면요.”
“그나저나 찾아보았느냐?”
“예, 일단은 무인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는데, 그자는 이곳에 없는 것 같아요.”
“하면?”
“반역자들을 쫓아서 천중산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어요.”
“흐음. 천중산이라.”
“그곳에서 반역자들을 대략 정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니 아마 이르면 내일 돌아올 것 같아요.”
“그렇군. 하필 때를 잘못 맞췄군.”
“이제 어쩌실 거예요? 인근 객잔으로 돌아가서 기다릴까요? 그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래도 되지만, 좀 더 맹을 구경해 보고 싶구나. 빙궁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니.”
“그럼 이제부터는 혼자 다니지 마세요.”
“오냐, 오냐. 이렇게 마음껏 맹을 돌아다닐 기회도 적을 테니 오늘은 좀 둘러보자꾸나.”
“예, 장로님.”
설이 맑은 목소리로 답하고는 노인 곁으로 가서 섰다.
만약 누군가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유심히 엿들었다면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리라.
노인이 말한 빙궁이 어디겠나?
강호에서 빙궁이라 부를 만한 곳은 단 한 곳.
북해빙궁밖에 없다.
새외세력 중에서도 가장 먼 곳.
몽골 땅 너머에 자리 잡은 북해빙궁에서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단 말인가?
게다가 그들의 대화로 유추해 본다면, 틀림없이 적랑단주 남궁천을 찾는 게 아닌가?
어쨌거나 두 사람은 그렇게 두런 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어딜 가셨던 거예요?”
“약천당을 잠시 들렀다.”
“거긴 왜요?”
“재미있는 일이 있더구나.”
“……?”
설이 봉목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천독노라는 영감이 사파인 것 같더구나. 한데 그 영감이 약천당주로 임명이 된다더구나.”
“맙소사! 사파 무인이 무림맹 당주로 임명된다고요?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다고 들었다.”
“정말 놀라운 얘기네요. 중원에서는 정사지간이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이번 반역도 이런 파격적인 변화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후유, 정말 세상일은 모르겠어요. 빙궁을 나설 때만 해도 맹주는 묵천악이라는 노인이었는데, 지금은 남궁세가주가 맹주라니. 거기에 흑무련 무인들이 맹내에 득실거리고. 반역까지…… 본 궁의 사정만 복잡한 게 아닌가 봐요.”
“허허. 사람 사는 세상이야 어디든 비슷한 법이지.”
“그런가요? 여기도 이런저런 사정이 많은 걸까요?”
문득 설의 얼굴에 아주 잠깐 그늘이 드리워졌다.
노인은 모른 척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그 천독노라는 자의 의술이 상당한 경지였다. 여태 그토록 뛰어난 의술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와아, 장로님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엄청 대단한가 봐요.”
설이 진심으로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며 장원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다만 내원으로 향하는 계단은 차마 오르지 못했는데, 외원과 달리 나름 경계가 삼엄한 탓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맹을 빠져나와 인근 객잔으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노을에 물든 무한의 전경을 보던 설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경치는 정말 다채로운 것 같아요.”
“그렇구나.”
“맨날 눈과 얼음만 보다가 이렇게 파릇파릇하고 생동감 있는 경치를 보니 정말 여행 온 기분도 나고요.”
“허허, 나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 여행 온 것 아니었느냐?”
“장로님! 우린 임무를 받아서 온 거잖아요. 또 이러신다.”
“흐음. 무슨 임무였지? 빙궁을 떠나온 지가 너무 오래된 모양이야.”
“아이참, 자꾸 이러시면 어떡해요? 당장 내일이면 임무에 본격적으로 돌입해야 하는데!”
“나이가 드니 깜빡깜빡 하는구나. 그러니까 우리 임무가 맹주와 협약을 맺는…….”
“아뇨!”
“그럼?”
“정말 장로님도 참. 언제까지 절 애로만 보신다니까.”
사실 설은 노인이 자신을 놀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지만, 한빙검(寒氷劍)이라 불리는 냉이겸이 그 정도로 무른 사람은 아니다.
“우리가 맡은 임무는 원수인 남궁천을 사로잡아서 빙궁으로 끌고 가는 것이죠!”
“옳거니!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야 객잔에서 먼저 좀 쉬다가 남궁천이 나타나면 잽싸게 납치 시도를…….”
“가만.”
“왜요?”
“우리가 노리는 녀석이 나타난 것 같다만?”
“예? 어디……? 엇!”
순간 설이 화들짝 놀라서는 저만치 저잣거리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그녀가 얼른 품에서 용모파기를 꺼내 보고는 속삭이듯 소리쳤다.
“장로님! 정말이에요! 똑같이 잘생겼어요!”
“못생겼으면 못 알아봤겠구나.”
“그야 당연하……! 아니, 아무튼! 이제 어떡하죠? 뭘 해야 하죠? 밧줄로 묶어야 하나? 아니면 빙공으로 얼려 버릴까요? 아니면 제가 미인계로…….”
“일단 지켜보자.”
“예? 아, 예!”
설이 얼른 골목 쪽으로 몸을 숨기면서 노인에게 손짓을 했다.
“장로님, 어서! 숨어야죠! 우리가 들키면 모든 계획은 수포로…….”
“흐음.”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궁천은 우리가 누군지 모를 텐데 왜 숨느냐? 오히려 너의 행동은 되레 눈에 띄고 있어.”
“아…… 그, 그럼 자연스럽게?”
“그래. 자연스럽게.”
그러자 설이 얼른 골목에서 달려오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한빙검 장로 같지만 전혀 다른 어르신! 참으로 오랜만이군요! 이 더운 지방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어쩌면 이렇게 매우! 자연스러운! 우연이 다 있을까요?”
그녀의 발연기에 주변 사람들이 시선을 모았다.
노인이 ‘끙’ 소리를 내고는 이마를 짚었다.
‘정말 이 아이……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