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 왜 이렇게 고생을 하나?
상우춘의 눈이 흔들렸다.
“청랑단주가 위독하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치료를 마쳤을 때만 해도 호흡이 안정되어 있었는데! 대체 누가 무슨 짓을 했단 말이야?”
젊은 의원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청랑단주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건 제가 보장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정각에 줄곧 머물면서 청랑단주의 몸 상태를 수시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까닭도 없이 갑자기 위독해졌단 말인가?”
“예, 지금 호흡이 가빠지고, 고열에 시달리는 중입니다. 맥도 빨라졌다가 느려지길 반복하면서 몹시 불규칙적입니다. 어서 확인해 보심이!”
“앞장서게!”
상우춘이 소리치자 젊은 의원이 얼른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애초에 청랑단주를 치료한 사람이 바로 상우춘이었다.
한데 갑자기 청랑단주가 위험하다고 하니 그로서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모여 있던 의원들이 너도나도 나서며 걸음을 옮겼다.
“선배님! 보조하겠습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의원들이 천독노를 한차례 노려보면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천독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개판이네?”
“죄송합니다. 아직은 반발이 심할 겁니다. 우선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셨다가 다음에 차차 저들을 설득하시는 게 어떨…….”
“아니. 그건 내 성격과 맞지 않네.”
비량의 말에 천독노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비량이 말릴 틈도 없이 천독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설득이 안 되면 알아서 인정하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 재수 없는 진천랑 아들놈이 한 것처럼 말일세.”
천독노의 걸음이 보정각을 향했다.
* * *
“끄으윽……! 으음……!”
청랑단주 악후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연신 신음을 내질렀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과 새우처럼 둥글게 말고 있는 몸만 봐도 그가 얼마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를 지켜보는 의생들은 우왕좌왕하며 안절부절못했고, 젊은 의원은 애타는 마음으로 발만 동동 굴렸다.
“냉수! 어서 냉수를 떠 와라!”
“예, 예!”
의생들이 서둘러 달려 나가더니 잠시 후 커다란 그릇에 냉수를 잔뜩 담아왔다.
하지만 급하게 준비한 물은 그다지 차갑지도 않았다.
일찌감치 준비되어 있던 냉수는 수많은 환자를 보살피면서 턱없이 부족한 실정.
그나마 미지근한 물이라도 천에 적셔서 몸을 닦아주었지만, 펄펄 끓는 열은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그때 마침 모여든 의생들 너머에서 거친 고함이 들려왔다.
“비켜라! 물러나라!”
젊은 의원이 돌아보니 마침 상우춘이 긴장한 표정으로 병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선배님!”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가슴을 움켜쥐면서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우선 똑바로 눕혀보아라!”
“예, 선배님!”
의원 몇 명이 달려들어 악후의 몸을 바로 눕혔다.
악후는 저항할 기력도 없는 것인지 의원들이 잡아주는 자세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얼른 맥을 짚은 상우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큰일이로군! 이대로면 한 시진도 버티지 못해 사망할 수도 있겠어!’
그리되면 상우춘으로서도 책임을 피할 수 없으리라.
애초에 심장 어림에 가벼운 자상을 입은 줄 알았다.
해서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바늘과 실로 잘 꿰매어 주었다.
한데 갑자기 이런 위독한 상태라니?
마침 옆에서 나직하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상처를 다시 열어봐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소리! 이제 겨우 회복하고 있는 와중에 다시 상처를 벌리라는 것이냐?”
“이게 지금 회복하는 모습은 아니잖나?”
“그렇다고 상처를 다시 벌리면 더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을……!”
퍼억!
순간 상우춘은 옆구리에 묵직한 충격을 느끼면서 한옆으로 튕겨 날아갔다.
쿠당탕탕!
종잇장처럼 구겨진 상우춘을 의원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상우춘이 발끈해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짓이야? 대체 누가……! 으응?”
상우춘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가 부들부들 떠는 손가락으로 눈앞의 노인을 가리켰다.
언제 들어온 것인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는 바로 천독노였다.
천독노가 콧잔등을 팍 구기며 말했다.
“염병할.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의원이 안절부절못하면 어쩌자는 거야? 정신 똑바로 안 차려?”
“당, 당신이 여긴 왜……!”
“시끄럽다. 기력이 있으면 와서 은접시라도 들어라!”
날카롭게 소리친 천독노가 손을 불쑥 뻗어 악후의 손목을 진맥했다.
그러자 상우춘이 와락 달려들며 소리쳤다.
“그 더러운 손을 당장 떼지 못해!”
“이런 미친.”
퍼억!
콰당탕탕!
천독노가 가볍게 휘두른 일수에 상우춘이 다시 나가떨어졌다.
이번엔 코피까지 줄줄 흘리면서 벌떡 일어났다.
“천독노오오! 이게 무슨 짓……!”
상우춘이 분기탱천하여 달려들려고 하자, 비량이 그 앞을 막아섰다. 비량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했기에 상우춘도 지레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
“비 대주! 이게 무슨 짓이오?”
“우선 지켜보시지요. 악 단주가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자는 아직 정식 약천당주도 아니지 않소? 내 환자를 저런 사파 나부랭이에게 맡길 수는…….”
“그럼 상 의원께서 악 단주를 반드시 살릴 수 있습니까?”
비량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어조로 말하자, 실내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내공이 담겨 있었기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비량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실내를 둘러보았다.
“여러분들이 좋든 싫든 천독노는 약천당주로 내정된 분이십니다. 현 상황을 비상시로 간주하여 감찰대주의 권위로 명령합니다. 천독노의 치료를 도와주시오. 그게 싫다면 나가도 좋소.”
비량의 말에 몇몇 의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하지만 다수의 의원들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개중에서도 두어 명은 천독노 곁으로 걸어왔다.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말씀하시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사명감이 투철한 자들이었다.
하나 대부분의 의원들은 그 자리에 남아서 천독노가 과연 얼마나 잘해낼 수 있을지 두고 보자는 심정이 컸다.
상우춘도 마찬가지.
그래도 차기 보정각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의술이 뛰어난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이 최선을 다했지만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진맥 결과 이대로면 악후는 한 시진도 버티지 못해 사망할 각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천독노가 뭘 어쩌겠는가?
‘차라리 잘된 건지도. 어차피 악 단주가 죽을 운명이라면, 천독노가 모든 걸 뒤집어쓸 수도 있을 테니.’
원래 상우춘이 이 정도로 독한 마음을 품은 자는 아니었다. 그 역시 나름의 사명감을 가진 의원이었다.
다만 천독노에게 두 차례나 얻어맞는 치욕을 당하자 반발심이 슬쩍 올라온 것이다.
결국 그가 팔짱을 끼고는 두어 걸음 물러나서는 턱짓을 했다.
“좋소. 어디 한 번 해보시오. 차기 당주께 한 수 배우는 심정으로 지켜보지. 맹주님께서 그리 기대를 거는 분이니, 무조건 악 단주를 살릴 수 있을 테지요?”
천독노가 피식 실소를 흘리고는 악후의 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그의 반응이 은근히 무시하는 듯해서 상우춘은 내심 발끈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천독노가 의원 한 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먼저 상의를 벗기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의원 하나가 서둘러 악후의 상의를 완전히 벗겨냈다.
가슴 부근에 선명한 봉합 자국이 보였다.
‘봉합술은 딱히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서 탈이 난 건가?’
천독노가 등에 메고 있던 혁낭을 풀더니 가죽으로 말린 도구함을 꺼내 옆의 탁자에 촤라라락 풀어 놓았다.
도구함 안에는 온갖 종류의 침과 실, 그리고 약재 등이 들어 있었다.
“은쟁반으로 비추게.”
“예!”
말을 마친 의원 하나가 곧바로 은 쟁반을 가져와 환자의 몸에 비췄다. 은쟁반의 용도는 빛을 집중시켜 환부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절개하겠네.”
“……!”
의원들이 긴장한 얼굴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정말 위급한 순간에는 피부를 절개하여 수술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약물과 침술로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천독노의 방식은 조금 과격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독노는 빠르게 절개 수술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진통과 부종을 줄이는 백지, 순환 진통 효과를 가진 감초, 마취 효과를 위한 복령 등을 꺼내 접시에 담고 기를 운기했다.
구오오오오……!
진득한 양기가 가해지자 접시에 담긴 약재들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액체 상태로 변했다.
곧이어 천독노는 접시를 들어 악후의 입술과 코로 흘려보내고, 나머지는 상처 부위에 넉넉하게 발랐다.
이 일련의 과정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주변의 의원들은 감시한다는 생각도 잊어버리고는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탁탁.
순식간에 악후의 훈혈을 점한 천독노가 금날을 꺼내 쥐었다.
마침내 절개를 할 순간.
푸욱!
망설임 없이 꽂힌 칼날이 악후의 가슴팍을 가르기 시작했다.
주우욱.
피가 울컥거리며 배어 나온다.
절개 수술에 익숙하지 않은 의원들이 저마다 마른침을 삼키고는 악후와 천독노를 번갈아 보았다.
가슴을 열어젖히자 근육층 사이로 폐가 보였고, 다시 그 사이로 숨은 듯이 자리 잡은 심장이 펄떡이고 있었다.
천독노의 손길이 빨라졌다.
우선 자철석(紫鐵石)으로 만든 집게를 이용해 불에 구운 진달래 잎으로 상처 부위를 한 번 더 소독했다.
그리고 벌어진 상처를 다시 꿰매기 위해 도구함으로 손을 뻗을 때였다.
“이런! 고열이 더 심해졌습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천독노가 손을 대니 살이 데일 것처럼 전신이 뜨거웠다.
이쯤 되자 지켜만 보던 상우춘이 불쑥 나섰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어서 썩 물러나시오! 괜히 엄한 짓을 해서 사람을 고통 속에 몰아넣지 말고! 이제라도 내가 고통만이라도 경감…….”
“나서지 마라!”
순간 천독노가 버럭 외치자, 주변의 모든 의원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눈치를 보았다.
상우춘도 마찬가지.
냉랭한 천독노의 얼굴은 그 어떠한 항거도 불능케 하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천독노가 젊은 의원을 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일렀다.
“냉수에 젖은 천으로 몸을 닦아주게.”
“예!”
의원들이 얼른 젖은 천으로 몸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체온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천독노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젖은 천을 만져보더니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이렇게 미지근한 물을 가져오면 어떡하나?”
“하지만 지금 냉수가 부족해서…….”
“이런 답답한! 이딴 천으로 닦아봐야 하나 마나야!”
“그럼 어쩌죠?”
“허!”
천독노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의원들을 노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불청객 취급하더니, 이젠 환자 앞에서 어떻게 하냐고 묻다니?
게다가 가장 기본적인 것도 갖춰져 있지 않은 약천당이라니! 그간 무림맹이 얼마나 썩어 있었는지 알 만한 순간이었다.
그때 의원들 사이에서 나이가 지긋한 사내가 몸을 비집으며 나섰다.
“내가 좀 도와줘도 되겠소?”
“으음?”
천독노가 미간을 찌푸리고 돌아보니 백은색의 머리카락에 역시나 백염이 성성한 노인이었는데, 푸른 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천독노가 비량을 슬쩍 돌아보았다.
하지만 비량 역시 처음 보는 인물이었기에 조심스레 나서며 물었다.
“실례지만 뉘신지요?”
“지금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 한 사람의 생사가 달린 문제 아닌가?”
무뚝뚝하게 말을 뱉은 노인이 악후의 머리맡으로 가서 서자, 천독노가 얼른 손을 뻗었다.
“잠깐. 함부로 손을 대면…….”
“손대지 않을 거요. 걱정 마시오. 나도 그 정도 생각은 있으니.”
“그럼 어찌 돕겠다는…….”
노인이 대답 대신 악후의 정수리 부근에 손바닥을 대더니 기운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구오오오오.
슈우우우우!
순간 주변의 공기가 서늘하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이어서 모종의 기운이 노인의 손바닥에서 뻗어 나오더니 악후의 정수리를 통해 흘러 들어가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호오? 대단하군. 빙공이라도 익힌 것인가? 그나저나 누군지도 모를 노인이 태연히 약천당까지 들어오다니. 이거, 뭐 개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