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71화 (471/508)

471. 왜 이렇게 고생을 하나?

남궁천은 땅에 대가리를 박은 반역자들을 무심한 얼굴로 둘러보았다.

호기롭게 무림맹을 공격했을 그들이 지금은 처량하게 구겨진 얼굴로 흙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나 매서운 칼바람이 자신들을 향해 불어올까 싶어서 어깨를 움찔거리는 꼴을 보면 가소로움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결국 이런 꼴이 될 것을.’

그러고 보면 사람 욕심이라는 게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구파일방이 각자의 위치에서 현실에 만족하며 살았더라면 이런 개고생은 안 해도 될 텐데 말이다.

‘나 같으면 등 따뜻하고 배부른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뒹굴겠는데.’

전생 도망자 시절, 남궁천은 그야말로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그때 소원은 딱 하나였다.

원 없이 꿀잠 자는 것.

아무 생각 없이 밥 먹어보는 것.

넋 놓고 노을 감상하기.

하나 그런 생각조차도 남궁천에게는 사치였다.

누군가 밥이나 물에 독을 타진 않았을지 의심해야 했고, 자신의 정체를 들키진 않았는지 신경 써야 했다.

지나가는 행인이 칼을 들이밀며 돌변하진 않을지, 어디선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진 않을지, 깜빡 조는 사이에 살수가 뻗어오진 않을지 노심초사했다.

정말이지 잠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하다못해 길바닥에 거적때기 하나 깔고 낮잠을 자는 거지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다시 태어나면 거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그러고 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새로운 삶이 주어진다면 절대로 애쓰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던 그 시절이 있었는데.

한데 지금 자신은 왜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일까?

‘이것저것 다 때려치우고 초야에 묻혀 아무 관심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게 소원이었는데 말이지. 이래서야 더 눈에 띄는 것 아닌가?’

갑자기 때아닌 허탈감이 몰려온다.

원래 하나의 언덕을 넘으면 주변을 둘러볼 정신이 생기는 법.

지금껏 가문의 성장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남궁천은 새삼 삶의 방식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그것은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애를 쓰는가?’

이만하면 자신이 더 이상 나서지 않아도 남궁검이 무림맹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으리라.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가문을 정점에 올려둔 셈이 아닌가?

천하가 남궁세가를 우러러보게 되었고, 남궁검 가주는 무림맹주가 되었다.

하면 다 끝난 것인가?

모르겠다.

아직 마교가 남아 있고, 구파일방의 반응도 눈여겨봐야겠지만 알게 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침 남궁천 곁으로 손우곤이 다가왔다.

“드디어 다 정리했군요. 생각보다 무림맹을 평정하는 과정이 길었습니다. 이 정도로 반발이 거셀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반발이 아니지.”

“그럼요?”

“반발은 전임 맹주에 대한 충성심이 과한 자들이 일으키는 거고. 이건 그저 자기 욕심 채우려고 발악한 거니까.”

“듣고 보니 그렇네요. 말 그대로 반역밖에 되지 않는군요.”

“욕심에 눈이 먼 자의 최후라고 볼 수 있지.”

“이제 어떻게 처리하실 건지요? 곤륜파 장문인이 반역의 선두에 섰으니 죽여 마땅했지만, 그렇다고 멸문을 시킬 수도 없을 텐데요.”

“그건 일단 맹주님께 판단을 맡기자고.”

“알겠습니다. 다른 문파들도 마찬가지죠?”

“그래야지. 모든 판단은 맹주님께 맡긴다.”

“예. 그런데…….”

“뭐?”

“괜찮으신 거죠?”

“왜?”

“아뇨, 그냥…… 어딘지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런가? 잠깐 딴생각을 했다.”

“무슨 생각요?”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나?”

“예?”

“이제 내가 뭘 하면 되겠냐?”

“어……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가끔은 내가 갈 길을 남에게 묻는 것도 신선하잖아. 대답해 봐.”

“흐음.”

손우곤이 침음을 흘리면서 남궁천을 힐끔거렸다.

원래 남궁천이 조금 독특한 성격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이상하다.

하긴.

기나긴 싸움의 정점을 찍은 마지막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나?

목적을 이룬 자의 허탈감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남궁천이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손우곤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마교의 준동에 대비해야지요. 이것들은 한 번 움직였다 싶으면 강호에 혈겁을 불러일으키니까요.”

“왜?”

“그야 이놈들이 잔악무도하고…….”

“아니, 내가 왜 앞장서야 하냐고.”

“예?”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많잖냐?”

“어음…… 그건…… 단주님이 강하시니까요!”

“강하면 개고생해라?”

“아니…… 음…… 그건 아닌데…… 아! 어디서 들은 말인데요. 강한 힘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 고 하더라고요.”

“누가 그래?”

“예전에 유난히 거미를 좋아하던 어떤 사내가…….”

“됐고. 난 이제부터 생각을 좀 정리해야겠다. 내가 왜 이 지랄을 계속해야 하는지.”

“어…… 단주님?”

“아, 갑자기 은퇴 선언을 하는 건 아냐. 그럴 생각도 없고. 다만 이유를 한번 알아보고 싶은 거지.”

“예, 조금 휴식기를 가지실 때도 됐습니다.”

그때였다.

남궁천 곁으로 유현이 잰 걸음으로 다가왔다.

“단주, 와서 직접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무당의 덕양 장로가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남궁천이 유현의 뒤를 따라가니 조그마한 전각이 나타났다.

전각 내부가 엉망진창이었는데, 안에서 뭘 한 것인지 불에 탄 듯 그을음도 보였고, 창가에는 서리가 낀 것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탁자와 의자는 완전히 가루가 된 것처럼 부서져 있었고, 창문은 완전히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주변을 꼼꼼히 살피던 남궁천이 턱을 괴고는 중얼거렸다.

“양의무극신공을 익히던 중이었나?”

“양의무극신공이라면……?”

“무당파에서도 대성한 자가 없다는 심법이지.”

“덕양 장로가 성공했을까요?”

“글쎄.”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그을음과 살얼음이 낀 현장을 보면 아주 실패한 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 성공하진 못한 것 같은데. 절반의 성공이려나?”

“만약 덕양 장로가 양의무극신공을 대성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림칠성보다 더 대단한 절대고수가 되겠지.”

하지만 양의무극신공은 익히기 쉬운 게 아니다. 더구나 지금 덕양은 모종의 깨달음을 얻고 익히려는 것이 아니다.

분명…….

‘내가 사용한 창벽공의 영향이겠지.’

남궁천은 창벽공의 묘리를 이용해서 마공과 정공의 조화를 이루었다.

이를 보고 자극을 받은 덕양이 양의무극신공을 익히려고 하는 것이리라.

이럴 경우 자칫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으니 어쩌면 덕양에게는 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곤 해도 한 번 보고 싶긴 하군. 양의무극신공을 직접 본다면 창벽공의 묘리를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면 창벽공과 양의무극신공을 이용해 새로운 무공을 창안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생각에 빠져 있는 남궁천에게 손우곤이 다가와 물었다.

“쫓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지금은 늦었어. 일단 지켜보자고.”

“알겠습니다.”

“자자, 이제 슬슬 돌아가자. 배고프다.”

남궁천이 손을 짝짝 마주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맹은 잘 돌아가고 있으려나?’

* * *

약천당 장원은 온통 앓는 소리로 가득 찼다. 정말이지 다친 환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모두 전쟁에서 다친 부상자들이었다.

물론 반역자들을 상대로 무림맹은 대승을 거두었지만, 상처 없는 전쟁은 없는 법.

여기저기 중상을 입은 환자들이 제시간에 치료 시기를 놓쳐서 생사지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럼에도 의원들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약천당 소속 수뇌 인사들 대부분은 우위광과 한통속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위광이 후퇴할 때 다수가 함께 달아난 탓이다.

약천당 소속 의원인 상우춘은 시름 섞인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이지 환자가 너무 많다.

전쟁이 끝나면 약천당은 그때부터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고 봐야 했다.

비지땀이 흘러내리는데도 닦아낼 여유조차 없을 정도다.

하루 종일 환자를 치료하면서 돌아다녔더니 머리가 핑글 돌아간다.

겨우 중심을 잡고 섰는데, 마침 저만치 웬 노인이 환자들의 맥을 짚는 게 보였다.

“음? 누구지?”

눈살을 찌푸린 상우춘이 노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거 뉘시오?”

하지만 노인은 대답 대신 환자의 맥을 살피는 것에만 집중했다.

살짝 부아가 치민 상우춘이 손을 휙 뻗었다.

“누군데 감히 약천당에 함부로 들어와서 환자를 진맥한단 말이……!”

탁!

상우춘의 손목을 낚아챈 사람은 다름 아닌 비량이었다.

그를 알아본 상우춘이 눈을 부라렸다.

“비 대주!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체 이자는…….”

“천독놉니다.”

“천독노라니? 듣도 보도…… 뭐, 뭣? 천독노라고!”

“그렇습니다.”

“아니, 천독노가 여길 어떻게! 그보다 왜 무림공적 따위가……!”

그러자 환자의 맥을 짚었던 천독노가 눈썹을 성큼 치켜올리고는 성질을 부렸다.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에 무림공적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수준이라니! 이러니 무림맹이 이 모양 이 꼴이지! 에잉!”

“뭐, 뭐라고 했소? 지금!”

두 사람이 소란스럽자, 순식간에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

마침 근처에 있던 의원들이 하나둘 모이면서 천독노를 알아보고는 대경실색했다.

“저자는 정말로 천독노잖아?”

“천독노가 여긴 왜 온 거야?”

너무 놀란 탓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천독노는 그 와중에도 환자의 몸에 침을 꽂아넣으면서 대꾸했다.

“이 한심한 것들아. 노부를 구경할 시간에 환자 한 명을 더 봐라! 너희들이 그러고도 무림맹 의원들이냐!”

“닥치시오! 무림공적이 어디서 함부로 입을…….”

“천독노는 더 이상 무림공적이 아니오.”

불쑥 끼어든 사람은 다름 아닌 비량이었다.

그가 멈칫거리는 의원들을 훑어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에 특별 사면됐소. 애초에 천뇌당의 조사 결과 천독노는 무림공적이라 할 수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소.”

“하지만 온갖 악랄한 사파 놈들을 살려준 전적이 있는 자가 아니오!”

이번엔 천독노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닥쳐라! 의원으로서 눈앞에 사람이 죽어가면 응당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사람을 가려가면서 의술을 쓰면, 그게 어디 의원이라고 할 수 있느냐?”

“아무리 그래도 우린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약천당에서 썩 나가!”

“옳소! 당신 따위가 신성한 약천당에 들어와서 설치는 걸 볼 수는 없지!”

“무림공적이 아니라고는 하나, 악랄한 독공까지 익힌 자가 아니외까?”

의원들이 너도나도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하나 고분고분 기가 죽어 돌아갈 천독노가 아니었다.

그가 시뻘게진 얼굴로 벌떡 일어나더니 부리부리한 눈으로 의원들을 훑어보다가 소리쳤다.

“닥쳐라! 네놈들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해 두마! 나는 앞으로 이 빌어먹을 약천당주가 될 몸이시니까!”

“뭐, 뭣이?”

“지금 뭐라는 거야? 저 늙은이가?”

“설마. 노망난 건가?”

사람들이 당황하는 사이, 상우춘이 비량을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도 의원들 중에서는 나이 지긋한 상우춘이 가장 선배였다.

“저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천독노가 노망난 것이오?”

비량이 얕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의 말이 사실입니다.”

“뭐, 뭐라고? 하면 정말 천독노가 본 당의 주인이 된단 말이외까?”

“예, 현재 맹주님은 약천당을 책임질 사람으로 천독노를 내정하신 상태입니다.”

“아니, 그 무슨!”

“납득할 수 없다! 당장 맹주님을 찾아가 항의합시다!”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다시 의원들이 성난 목소리로 외쳐댔다.

그때 보정각 쪽에서 의원 하나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상 의원님! 큰일 났습니다! 어서 와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상우춘이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자, 젊은 의원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청랑단주가…… 위독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