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70화 (470/508)

470. 축배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우위광이 청풍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청풍은 이제 분노가 극에 달한 듯 우위광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뭐? 사과할 준비를 하라고?

도대체 당신이 제대로 하는 게 뭐야!

청풍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욕을 퍼붓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남궁천이 다시 물었다.

“대답 안 합니까? 좀 쉬셨냐고 묻잖아요.”

“어떻게 네놈이 북천금제를 구슬린 것이지?”

우위광의 질문에 남궁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질문을 질문으로 답하는 아주 못된 버릇이 있군요. 영감님.”

“…….”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여러분은 제게 목숨을 한 번 빚진 겁니다.”

“뭐라?”

“생각해 보세요. 저도 여러분처럼 못된 마음을 먹고 거기에 벽력탄을 매설해 두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

우위광과 청풍이 흠칫거리며 서로를 잠깐 돌아보았다.

하나 우위광은 곧 차분한 이성을 되찾았다.

일순간 정말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했지만, 벽력탄이 어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던가?

그 짧은 시간에 벽력탄을 매설하긴 어려우리라.

가만, 북천금제가 배신을 하고 남궁천과 손을 잡았다면……?

‘정말 벽력탄이 매설된 건 아니겠지?’

다시 불안한 마음이 슬금슬금 일어나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폭음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꽈아아아앙!

우위광은 물론 청풍도 화들짝 놀라면서 몸을 움츠렸다.

하나 두 사람은 곧 그것이 벽력탄이 아니라, 덕양의 거처에서 터진 굉음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멋쩍게 몸을 폈다.

다만 그 폭음에 놀란 것은 남궁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말에 앉은 채로 화들짝 놀라면서 떨어질 뻔한 남궁천이 가슴을 쓸며 중얼거렸다.

“어우씨, 깜짝이야. 정말 벽력탄이 매설된 줄 알았네.”

“…….”

그런 남궁천을 다소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우위광이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덕양은 뭘 하고 자빠진 건지……!”

“영감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소.”

청풍이 차갑게 비웃더니 한 걸음 나서며 남궁천에게 물었다.

“남궁 단주. 혼자 오셨는가?”

“노안이 오셨나? 내 뒤로 적랑단 안 보입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발끈해서 소리치던 청풍이 이내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나직이 뇌까렸다.

“맹주께서 오시진 않았느냐고 묻는 걸세.”

“맹주님이 뭐 하러 이런 누추한 곳에 오겠어요? 저와 적랑단만 왔습니다. 이게 제가 하는 일이잖아요.”

“그렇군.”

“자, 어쩌시겠습니까? 그간 좀 편히 쉬시면서 생각 좀 정리하셨습니까? 순순히 투항하신다면…… 살려는 드릴게.”

그러자 우위광이 다시 발끈해서 소리쳤다.

“갈! 네놈 따위를 두려워해서 투항할 것 같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북천금제를 어찌 구슬렸는지 모르겠지만, 이런다고 내게 길이 없는 줄 아느냐? 청풍진인! 걱정 마시오. 내게는 또 다른 계책이 있소. 적랑단이 왔다지만 장문인의 무위라면 충분히 여길 뚫고 나갈 수 있을 거요. 우선은 방어선을 구축하고…….”

우위광이 침을 튀며 떠들어댄다.

청풍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우위광을 쳐다보았다.

이 늙은이는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많았던 것일까?

아니, 처음부터였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이 늙은이의 말에 넘어가서 모든 일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곤륜파의 오랜 설움을 씻게 해주겠다는 그 말 한마디에.

새외세력으로 분류되어 중원에서는 소외되던 지난 세월을 생각도 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뭐, 그래. 덕분에 지난 세월이 생각나지 않는다.

요즘처럼 벼랑 끝으로 몰린 적이 없으니까.

정말이지 당장 내일을 걱정하기도 벅찬 판국에 과거 생각 따위는 사치다.

“……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그러니 내 말만 들으시오. 모든 계획은 어긋날 수 있는 법. 그 어긋남까지 계산하여 철저하게 세운 계획들이 아직도 많이 있소. 그러니…….”

우위광은 혓바닥도 아프지 않은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피곤하군.’

청풍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등 뒤로 문도들이 대문 앞으로 나와서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자신을 믿고 이 먼 곳까지 따라온 문도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도 든다.

우위광은 여전히 격앙된 얼굴로 떠들고 있다.

아무래도 자신을 설득하는 모양인데, 아까부터 청풍은 그의 말을 단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지친다고나 할까?

저 늙은이의 주둥이 때문에 곤륜파가 역대급 파국을 맞이한 상황인데, 아직도 저 주둥이가 나불거리는 걸 보고 있어야 한다니.

“그러니까 내 말을 들으시오! 장문인은 여기서 포기하기에 아까운…….”

“……하지 않았소이까?”

문득 들린 목소리에 우위광이 말을 멈추고는 눈살을 구겼다.

“음? 뭐라고 하셨소?”

청풍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리듯 말한다.

“진작 내 목을 치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그, 그게 무슨…….”

“그러지 않으면 내가 먼저 당신 목을 칠 것 같다고.”

“장문인?”

“애쓰셨소. 아까 마신 술이 마지막 축배였다고 칩시다.”

“무슨……!”

쉬아아아아악!

순간 우위광은 눈앞에서 하얀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철컥!

청풍의 검집에서 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청풍이 오른손으로 검파를 쥐고 잠깐 멈칫거렸다.

그게 전부였다.

한데 새하얀 빛이 번쩍였고, 검집에서 철컥 소리가 울렸다.

“설마…….”

우위광의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다.

스르르.

이내 우위광의 목이 미끄러지더니 머리가 몸에서 굴러떨어졌다.

툭, 데굴데굴……!

츄아아아아아!

피를 분수처럼 터뜨린 우위광의 몸이 이윽고 ‘쿵!’ 소리와 함께 넘어갔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

몸을 잃어버린 우위광의 머리는 여전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한 번 끔뻑이고는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이런, 원주님!”

“원주니이임!”

이곳까지 함께 도망쳐 온 몇몇 장로들이 울부짖으며 달려오다가 청풍의 싸늘한 시선을 받고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청, 청풍진인!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오!”

“어찌 원주님을……!”

그들이 원망 섞인 목소리를 쏟아내면서도 차마 무림칠성 중 한 명인 청풍에게 더 따지진 못했다.

청풍은 그런 늙은이들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코웃음을 치더니 허리를 굽혀 우위광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락바락 악을 써대던 우위광은 그렇게 얌전히 청풍의 손에 들어 올려졌다.

예상외의 반응에 남궁천도 놀랐는지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살벌하네요. 둘이 친한 거 아니었어요?”

“후후. 남궁 단주. 그간의 일을 사과하겠네. 본 파는 이 늙은이의 농간에 놀아났을 뿐일세. 사과의 의미로 이 늙은이의 목을 단주에게 넘기겠네.”

청풍이 저벅저벅 걸어오자, 남궁천도 말에서 휙 뛰어내리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마침내 한복판에서 마주친 두 사람.

휘이이이잉.

유난히 싸늘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쳤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도 맨손으로 사과할 수는 없지 않나?”

“그렇다고 벽력탄을 퍼부었던 사실이 사라지진 않죠.”

“그것도 이 늙은이의 짓일세.”

청풍이 우위광의 머리를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남궁천이 손을 저으며 인상을 썼다.

“냄새나는 건 좀 치우시고.”

“후후. 내가 어쩌길 바라나?”

“잘 아시면서. 일단 대가리부터 박으시죠?”

“흐음. 자넨 대가리 박는 걸 참 좋아하는군.”

“아, 제가 도망자 시절 버릇처럼 중얼거리던 거라서요.”

“도망자 시절?”

“뭐, 대충 넘어갑시다.”

“흐음.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나?”

“이미 벽력탄을 썼을 때부터 선을 넘으신 거죠.”

“…….”

청풍이 침음을 흘리고는 남궁천을 빤히 노려보았다. 남궁천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마주 보았다.

결국 청풍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상관없다.

애초에 진심으로 굴복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우위광을 죽인 것도 어찌 보면 진정한 사과라기보단 분풀이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알겠네. 자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지. 그 전에 이왕 수고를 했으니, 선물은 받아주게나.”

휙.

청풍이 우위광의 머리를 던졌다.

그 바람에 날아오는 우위광의 머리에 가려져 청풍의 모습이 잠깐 보이지 않았다.

찰나지간 청풍은 단전에서 공력을 끌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바닥을 차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남궁천이 적랑단만을 데리고 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벼르던 순간이었다.

우위광의 머리는 애초에 수단에 이용될 셈이었다.

쒜에에에엑!

‘네놈이 초견파공안이어도 투시는 못 할 터! 그 늙은이 얼굴이나 쳐다보고 있어라!’

청풍이 회심의 일격을 내지르는 순간이었다.

번쩍!

“응?”

일순 짙푸른빛이 세로로 터졌다.

마치 하늘에서 바로 코앞으로 벼락이 떨어진 것만 같다.

그 순간 청풍은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주 잠깐 정말로 벼락을 맞은 게 아닌지 의심했다.

곧이어 그는 눈앞에서 세로로 쩍 갈라지는 우위광의 머리를 보았다. 그 사이로 악귀처럼 미소 짓는 남궁천의 얼굴까지.

‘어……? 이게 아닌데…….’

그 생각을 끝으로 그는 세상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츄아아아아아!

쿠우우웅!

우위광과 함께 머리가 갈라진 청풍이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장원 밖으로 나와 지켜보던 문도들이 저마다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무림칠성 청풍진인.

그가 죽었다.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적랑단주의 손에!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남궁천이 바닥에 엎어진 청풍을 보며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조심 좀 하시지. 냄새나는 것 좀 치우시라니까. 뒤에 있어서 못 봤잖아요.”

“장, 장문인이……!”

“이럴 수가…….”

곤륜파 문도들뿐만 아니라 다른 문파의 수장들과 문도들도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이윽고 남궁천이 서늘한 시선을 들어 올리자, 장원에서 나와 있던 사람들 모두 헛바람을 삼키며 주춤 물러났다.

“아직 할 말 더 있는 사람?”

“…….”

“순순히 대가리 박으시면 살려는 드릴게.”

남궁천이 활짝 웃는다.

그 웃음이 마치 악귀처럼 보여 저마다 소름이 끼쳤다.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쿠웅!

마침내 누군가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는 바로 우위광과 함께 피난을 왔던 장로 중 한 명이었다. 그를 필두로 장로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마다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박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댔다.

쿵! 쿵! 쿠웅!

결국 장원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이익! 이 무슨 비굴한 짓인가! 차라리 난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촤아아악!

개중에는 끝까지 저항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도 있었다. 그는 청풍과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곤륜파의 일대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렇게 대략의 정리가 끝나자, 남궁천이 적랑단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가서 정리해.”

“존명!”

적랑단원들이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장원으로 노도처럼 밀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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