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 축배
무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몇몇 맹원들이 성난 고함을 지르며 그 뒤를 쫓았다.
“쫓아라!”
“반역자들을 처단하라!”
전세가 뒤바뀌자 지금껏 웅크리고 있던 맹수들이 성난 포효를 내지른다.
기세 좋게 내원까지 밀고 들어왔던 반역자들은 맹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도륙당했다.
벽력탄을 쓴 시점에서 이미 맹원들의 도검은 자비를 싣지 않았다.
그들은 맹주전이 산산이 부서져 나간 것을 보고 그 어느 때보다 격분했다.
“크아악!”
“히익! 살, 살려…… 아악!”
추격조 중에는 맹원들뿐만 아니라 흑무련 무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나 흑무련 무인들은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는 각오로 악착 같이 쫓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쫓을 수만은 없었다.
나름 치열한 전투였던 만큼 여기저기 부상자가 많았고, 잔당들을 더 학살한다고 해봐야 수장들이 몸을 빼낸 상황이었기에 큰 의미가 없었다.
결국 추격조들도 무한의 외곽 지역까지 쫓은 후로 다시 걸음을 돌렸다.
결론적으로 전투는 대승리였지만 승리감에 도취될 상황은 아니었다.
일찌감치 청풍에게 당해서 부상이 깊었던 비량은 마지막 전투에서 활약이 미미했던 만큼 뒷수습에 최대한 신속하게 대응했다.
“거기 무너진 잔해는 저쪽으로 옮기도록 해라.”
“예, 대주님!”
“그리고 중상자들은 약천당으로 옮기도록 하고, 가벼운 부상을 입은 자들은 천뇌당으로 가서 금창약을 비롯한 응급약으로 치료하라!”
“알겠습니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또 다른 전쟁이었다.
뒷수습을 얼마나 빨리 하느냐에 따라서 맹의 안전을 유지할 수도 있고, 다시 무너질 수도 있는 법이다.
원래 방어가 가장 취약한 순간이 바로 공성전에서 승리한 직후가 아니겠는가?
모두가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무너진 방벽을 수습하지 않는다면 적들이 다시 쳐들어올 때 위태로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으로서는 다른 세력들이 약점을 노려올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혹여 마교가 이 순간을 틈타서 강하게 밀고 들어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흑무련과 손을 잡은 상황이랄까?
비량이 내원의 성벽에 올라서 먼발치를 보고 있는데, 마침 옆으로 남궁검이 날아와 멈춰 섰다.
“맹주님, 죄송합니다.”
비량이 얼른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사죄했다. 만약 자신이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보탬이 되지 않았을까?
하나 남궁검은 부드럽게 웃으며 비량의 어깨를 도닥였다.
“아닐세. 고생했네. 이번 싸움에서 자네는 큰 힘이 되었네. 지금도 여러모로 수고를 해주고 있고.”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그보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지겠군. 여러모로 바쁠 것 같네.”
“아무래도 거의 모든 조직이 개편되겠지요.”
“그렇겠지. 혹시 남문각주가 어디에 있는지 보았나?”
“아, 마침 저기 오고 있습니다.”
비량의 말에 남궁검이 고개를 돌려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남문각주 유백랑과 호법당주 윤첨산이 이쪽으로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비량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그로서는 남문각주가 배신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궁천은 남문각주가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예측했다.
결국 남궁천의 예측이 맞았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 같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유백랑은 끝까지 맹원과 한편이 되어 싸웠다.
그것이 자신의 실리를 추구한 것이든, 충성심과 의리를 지킨 것이든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유백랑도 더 이상 줄을 갈아탈 수 없는 신세라는 것이 중요할 뿐.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먼저 도착한 유백랑이 서둘러 안부를 물었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분히 대꾸했다.
“난 괜찮네. 자네는 어떤가?”
“덕분에 괜찮습니다.”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네.”
“부탁이라니요. 그저 명령을 내리시면 됩니다!”
확실히 유백랑은 이번 일을 계기로 어느 쪽이 튼튼한 동아줄인지 깨달은 듯했다.
남궁검이 희미하게 웃고는 말했다.
“외원에서 이탈자가 상당히 많을 거라고 보네. 아마 우위광과 한통속이겠지.”
“그렇습니다. 천옥각주 탁붕호는 이미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많을 걸세. 자네는 그들을 모두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하게. 어떤 조직에 얼마나 많은 이탈자가 생겼는지. 앞으로 조직을 재정비하려면 많은 돈이 들어갈 걸세. 그 역시 준비할 수 있도록 하게.”
“예? 아…… 예.”
순간 뜨끔했던 유백랑이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대꾸했다.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뭐지? 내가 묵 맹주의 자금을 관리하고 있다는 걸 맹주님도 아시는 건가?’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남궁천은 자신을 마치 돈주머니처럼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걸핏하면 찾아와서 돈을 내놓게 한다.
그러다 보니 그저 남궁천의 돈줄이 된 상황이다.
한데 이젠 남궁검마저 자신에게 대놓고 자금을 준비하라고 이르다니. 남궁천과 남궁검이 조손지간인 만큼 그가 모든 걸 알고 있을 가능성은 꽤 크다.
만약 이 모든 걸 알고 있다면 왜 남궁세가 사람들은 자신에게 자금을 다 내놓으라고 하지 않는가?
유백랑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곧 결론을 내렸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지금껏 자신이 돈을 잘 관리해 왔으니까, 앞으로도 유백랑에게 돈을 관리하도록 맡길 생각인 것이리라. 천우당주를 지냈던 만큼, 돈 관리 하나는 철저하게 할 테니까.
둘째, 그 자금을 양지에서만 사용할 생각이 없는 것이리라. 온갖 구린 일에도 그 자금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묵 맹주의 비자금을 공식적으로 압수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곶감 빼먹듯 야금야금 갉아가는 것이 좋을 테니.
셋째, 자신을 향한 무언의 압박이리라. ‘너는 돈줄이다. 그 역할을 하지 못하면 쓸모없는 존재다. 그러니 돈이 떨어지지 않도록 잘 관리해라’.
한마디로 묵 맹주의 비자금이 바닥나면 자신의 쓸모는 없어질 터. 그때까지 유백랑은 최대한 모든 충성심을 보여야 하리라.
‘하아, 살벌한 인생이로구나.’
유백랑은 어딘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서두르게.”
“명 받듭니다, 맹주님!”
유백랑이 짐짓 씩씩하게 대꾸하고는 얼른 걸음을 돌렸다.
어쨌거나 벼랑 끝에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 아닌가?
어떻게든 충성을 다해 살아남아야 한다.
이번에는 남궁검과 비량의 시선이 윤첨산에게 향했다.
비량은 윤첨산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정말이지 이번 싸움에서 윤첨산의 성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애초에 당주 자리에 앉는 자들은 일선에서 물러난 자들로 무공보다는 정치나 행정 업무에 사리가 밝은 자들이었다.
윤첨산이 무위가 강하지 않음에도 호법당주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연유도 있었다.
한데 무림칠성인 청풍에게 가장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자가 윤첨산이 아니던가?
마음 같아서는 업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폭풍 칭찬을 퍼붓고 싶지만…….
“으하하하! 맹주님, 다치신 곳은 없으시지요?”
“나는 괜찮네. 자네는 어떤가?”
“아, 저는 여기 조금…… 여기도 조금…… 이런, 이제 보니 어깨도 좀 베였군요. 언제 베인 거지? 으하하핫, 워낙 격전을 벌이다 보니 어깨가 베인 줄도 모르고 싸웠나 봅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청풍 그 양반이 생각보다 허세가 많은 모양입니다. 제 혁련검법으로 치명상을 입혔으니까 한동안은 등짝이 아파서 똑바로 누워서 자지도 못할 겁니다. 아주 따끔따끔할 테니까요.”
역시나 윤첨산은 스스로를 폭풍칭찬하고 있었다.
비량이 ‘풋’ 웃었지만 곧 표정을 단정히 했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이젠 어딘지 귀엽게 느껴진달까?
‘하긴 무림칠성을 베어 버렸으니 그럴 만도 할 테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운이든 실력이든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 바람에 청풍이 본격적으로 후퇴를 결정한 셈이 아닌가?
이 정도 자랑질쯤이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 않겠는가?
남궁검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자신감을 되찾은 모습이 보기 좋군. 자네에게도 내가 맡길 일이 있네.”
“아, 말씀만 하십시오! 무림칠성을 베어낸 그 각오로 무엇이든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크흠. 흠. 좋은 각오로군. 앞서 말했다시피 자네도 내원에서 이탈자들을 찾아내주게. 그리고 포로로 사로잡은 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뇌옥으로 일단 보내도록 하게나. 그들의 신원에 따라서 어찌 처리할 것인지는 추후 논의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무림칠성 중 한 명인 청풍진인을 제 검으로 쓰러뜨렸듯이! 그때의 그 각오로 모든 일을 책임감 가지고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럼 수고해 주게나.”
“물론입니다! 무림칠성을 베는 것에 비한다면 이런 건 일도 아니지요!”
“그렇군. 그럼 어서 가보시게.”
“예! 맹주님! 무림칠성을 벨 때만큼이나 신속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윤첨산이 굳게 포권을 하고는 돌아섰다.
비량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분 입에서 무림칠성이라는 말이 몇 달간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아무렴 어떤가? 사람이 악하지는 않아.”
“그렇지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껄껄 웃었다.
* * *
콰자앙!
사당의 잡기가 부서져 나갔다.
청풍이 주먹을 쥔 채로 어깨를 들먹일 정도로 씨근거렸다.
그의 몸에 천을 감아주던 문도가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장문인, 고정하십시오. 상처가 덧나겠습니다.”
“흥! 이깟 상처가 덧날 게 뭐가 있더냐? 자네도 내가 우스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작은 상처도 한 번 덧나면 걷잡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디 마음을 다스리시지요. 이번 거사는 운이 나빴습니다.”
“제기랄! 이 먼 곳까지 와서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거칠게 말을 뱉어낸 청풍이 시선을 돌려서 한 쪽에서 치료 중인 우위광을 노려보았다.
우위광은 팔 하나가 잘려 나간 채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고, 그 뒤에서 덕양이 운기행공을 도와주고 있었다.
우위광의 얼굴을 보니 다시 부아가 치민다.
애초에 우위광이 내원을 제대로 장악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젠장! 계획도 엉망진창에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군!”
“쿨럭! 쿠웨에엑!”
그 순간 우위광이 기침을 격하게 하더니 피를 토해냈다.
청풍의 말에 심사가 뒤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탁기를 배출하는 과정이었다.
그제야 조금 속이 시원해진 것인지, 우위광이 눈을 스르르 뜨고는 청풍을 돌아보았다.
“미안하게 됐소.”
“미안하게 됐소? 지금 사태가 이 지경인데 고작 그런 말로 되겠습니까? 원주! 아니, 이젠 원주도 뭣도 아니신가?”
“장문인!”
“아니, 대체 남궁검이 어떻게 거기서 살아난 거요? 맹 내에 비밀 지하로가 있기라도 한 거요?”
“그건 알 수 없소. 맹주만이 아는 사실일 테지. 하나 그 점을 간과한 것은 내 책임이외다.”
“그럼 책임을 지시오! 이대로라면 사문으로 돌아갈 때 원주의 목이라도 들고 가야 할 판이니까!”
“말이 지나치군!”
“당신의 안일한 계획 때문에 본 파가 무림공적이 될 판국에 지나칠 게 뭔가!”
후우우우웅!
두 사람 사이에서 뜨끈한 기운이 불어닥쳤다.
부상을 치료 중이었음에도 숨 막힐 듯한 살기와 투기가 휘몰아친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 한참이나 노려보는 두 사람.
먼저 이성을 찾고 차분한 목소리를 꺼낸 자는 우위광이었다.
“장문인. 아직 불씨가 꺼진 게 아니오. 진정하시오.”
팔 하나를 잃은 중에도 우위광의 눈매는 싸늘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제야 청풍도 조금은 이성을 되찾은 것인지 씨근거림을 멈추고는 차갑게 물었다.
“하면 이제 어쩔 생각이시오? 진정하게 할 만한 말씀을 해보시란 거요.”
“이대로 북동쪽으로 올라가서 북천금제를 만날 거요. 북천금제와는 혹시 모를 실패를 대비해서 두 번째 계획을 논의해 두었소. 그곳에서 우리는 충분히 재기할 수 있소.”
“하면 다시 무림맹을 치자는 거요?”
“그건 어렵겠지. 하나 새로운 맹을 건립하는 건 가능하지 않겠소?”
“뭐라?”
“무림맹은 지금 잡탕이 되었소. 흑무련까지 섞여서 엉망진창이지. 게다가 남궁가가 실권을 장악해서 독불장군이 되었소. 이러한 점을 강호에 피력해서 많은 무인이 우리를 인정하게 만드는 거요. 새로운 맹! 사파나 마교 따위가 끼어들 수 없는 순수한 정도! 하여, 정도맹(正道盟)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만드는 거외다.”
그제야 어느 정도 납득이 된 것인지 청풍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도맹이라…… 실현이 가능하긴 한 거요?”
“우리에겐 북천금제가 있지 않소이까?”
“그가 실패한 우리를 반기겠소?”
“애초에 실패를 가정한 두 번째 책략이오. 지금쯤 북천금제도 우리 소식을 듣고 다음 계획을 준비 중일 거요. 무림맹은 이 두 번째 계획을 생각도 못 하고 있을 거요. 그러니 또 다른 방식으로 뒤통수를 치는 거요. 그땐 우리가 축배를 들게 되겠지.”
“흐음. 정도맹이라. 이름은 마음에 드는군.”
청풍이 그제야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입매를 치켜올렸다.
그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는 감정이 조금 격했소. 내가 다혈질이라 그러니 이해하시오.”
“계획은 항시 틀어지게 마련 아니겠소이까? 이번에야말로 무림맹의 뒤통수를 쳐봅시다.”
“물론 그래야지.”
그제야 청풍의 입가에도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그 시각 북천금제가 진소홍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