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 축배
몇 시진 전, 황학루.
밤바람이 소슬하니 불어왔다.
강바람이어서 그런지 제법 쌀쌀하다.
북천금제 홍금호는 황금빛 술잔에 채워진 술을 바라보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소식이 늦다.
애초에 우위광이 내원에서 협조를 하기로 했는데, 거기부터 틀어졌으니 이렇게 오래 걸린 것이다.
게다가 외원에 포진한 상태에서 식량 부족이라니.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실소가 먼저 터졌다.
처음으로 자신의 결단에 후회가 살짝 들었다.
그의 좌우명이라고 하면 후회 없는 선택을 하자는 것이었다.
한데 이렇게 금방 후회를 하게 되니 짜증이 일어났다.
줄을 잘못 선 게 아닐까?
그때 마침 벽력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일차 보고가 올라왔다.
“회주님, 반역군이 벽력탄을 사용했습니다.”
“알고 있네.”
홍금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발치 무림맹을 보았다.
아스라이 먼 곳에서 들려온 굉음.
그리고 밤임에도 불구하고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게 보인다.
결국 맹주가 고집을 부린 것이리라.
북천금제가 황금빛 잔을 들고는 무심한 목소리를 흘렸다.
“결국 이렇게 끝이 났군. 이차 보고가 올라오는 대로 작업을 시작하라. 여론 조성을 하기 위해서 맹주의 어리석음을 중점적으로 퍼뜨려야 한다. 북천상회에 속한 모든 상인들은 이 일을 맹주 탓으로 떠들어야 한다. 만약 맹주가 맹원들을 아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투항을 했을 것이라고 떠벌려야 한다.”
“예, 회주님!”
홍금호는 술을 입에 털어 넣고는 먼발치 무림맹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룻밤 사이에 수많은 목숨이 날아갔지만, 그로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고 있었다.
이걸로 북천상회는 천하를 장악할 힘을 얻은 셈.
먼저 새로 세워질 무림맹과 동업자가 되어서 천하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참으로 요상한 게 바로 이 부분이다.
무림의 생리가 묘하게 돈의 생리와도 닮았다는 부분이다.
양지바른 곳에서 검을 부리는 자들은 명분이 중요하다.
돈도 마찬가지.
어둠의 경로를 통해 돈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면, 역시나 명분이 중요하다.
때문에 세간의 지지를 얻어야만 한다.
홍금호는 머릿속으로 주판 알을 튕겼다.
“어디 보자, 두당 위로금을 최소 천 냥부터 십만 냥까지 배분한다면…… 대략 들어갈 돈이…….”
맹주의 고집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맹원들이다.
그 유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한다면 새로 세워질 무림맹의 지지율은 올라갈 수밖에 없으리라.
또한 이 일에 거의 무관했던 북천상회가 나서서 보상까지 해준다면?
북천상회에 대한 인식은 좋아질 수밖에 없다.
호감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돈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장 유가족들에게 얼마간의 액수가 지출되면서 만만찮은 비용이 지출되겠지만, 결국 나중을 위해 거름을 뿌려두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 투자는 후에 몇 배가 되어서 돌아오리라.
‘그걸로 강남을 얻을 수만 있다면야.’
자세한 건 유가족들과 대화를 하면서 책정하겠지만, 결코 부족하지 않게 줄 셈이다.
지금껏 내부 분열로 인해 피해를 본 유가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한 신흥 세력이 있기나 했던가?
북천상회는 그 첫 번째 유형이 되리라.
또로로롱.
황금빛 잔을 술이 채운다.
달빛이 담긴 술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제야 그의 입매가 슬그머니 말려 올라간다.
오래 기다렸다. 이 순간을.
강남을 삼킬 수 있다니.
금왕의 여식이 천우당주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못내 배가 아팠는데, 오히려 그 바람에 자신이 천하를 먹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하하하하!”
느닷없이 시원한 웃음이 터져 나오자, 주변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과 시종들이 움찔거리다가 이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호신위가 넌지시 물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왜 좋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마음을 좀 졸였는데, 역시 천하를 삼키려면 그 정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해야 하는 모양이군.”
“만약 우위광 장로와 청풍 진인이 혁명에 성공했다면, 정말 천하가 회주님의 품으로 들어오겠군요.”
“하나 아직 방심할 수는 없지. 마지막 보고로 확정을 지어야 한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벽력탄이 터진 마당입니다. 지금 아스라이 들려오는 함성도 아마 승리의 기쁨일 겁니다.”
“후후후. 그렇겠지.”
무위가 약한 홍금호는 함성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지만, 호신위의 말에 그저 기분 좋게 웃을 따름이었다.
때마침 시종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래층에서부터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린 것인지 숨이 턱끝까지 차 올라 있었다.
“무슨 일이냐?”
호신위가 눈살을 구기며 물었다.
시종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아서는 영 좋지 못한 소식인 것 같았기에.
하필 지금 회주가 가장 기분 좋을 시기에 어지간한 용무라면 물리고 싶었다.
시종이 숨을 가누면서 말했다.
“후우, 후우. 이차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한데 왜 직접 오지 않고?”
“그것이…… 상태가 좀…….”
“상태라니?”
그 순간 아래층 계단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쩌다 보니 상태가 좀 그렇게 됐어요.”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에 호신위가 긴장한 표정으로 휙 돌아섰고, 홍금호도 미간을 찌푸리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마침 계단으로 모습을 드러낸 자는 시선을 떼기도 어려울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눈으로 보기도 힘든 은잠사로 한 사내를 꽁꽁 묶고 있었는데, 바로 이차 보고를 했어야 할 무인이었다.
“자네는…….”
홍금호가 눈살을 가늘게 여미고는 입을 열자, 여인이 빙긋 웃으면서 끌고 온 무인의 등을 떠밀었다.
“커헉!”
팽그르르르. 쿠당탕탕!
떠밀린 무인은 은잠사가 풀어지면서 팽이처럼 돌더니 아무렇게나 나가떨어졌다.
유성추를 거둬들인 여인이 포권을 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북천금제 홍 회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림맹 천우당주 진소홍이라고 합니다.”
“역시 자네가 금왕의 여식이었군.”
“지금은 천우당주입니다.”
금왕의 딸이라는 신분보다는 무림맹 천우당주의 신분으로 봐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북천금제가 피식 웃었다.
다 끝난 마당에 허세라도 부려서 마지막 도박이라도 할 셈일까?
‘그렇다고 해도 과연 대단하군. 지금쯤 허망함에 넋을 놓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는데. 이 정도의 총기를 가지고 날 찾아오다니.’
물론 헛된 도박이다.
하나 어린 진소홍이 이만한 강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역시나 상재를 타고났다는 증거이리라.
문득 정신 못 차리고 도박 중독에 허우적대는 자신의 아들이 생각나서 홍금호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한심한 놈. 내가 저를 위해 쓴 돈이 얼마인데. 이리 다르게 컸을까?’
괜히 금왕은 자식에게 돈을 얼마나 쏟아부었을지 궁금해지는 홍금호였다.
그가 그런 잡생각을 잠시 떨치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 천우당주께서 여긴 무슨 일이신가? 이 야심한 시각에 늙은이에게 청혼을 할 생각은 아닐 테고.”
일부러 질 나쁜 농을 던졌다.
실제로 홍금호는 여인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이만큼이나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여인을 돌처럼 본 영향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이런 짓궂은 말을 던진 것은 진소홍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위해서였다.
모든 걸 잃은 진소홍은 지금 마지막 살길을 찾아서 자신에게 온 것이리라.
당연히 굉장한 집중 상태일 테고.
그렇다면 격장지계로 심중을 어지럽혀 둘 필요가 있다.
그래야 실수가 나오게 마련이니까.
하나 진소홍은 의외로 여유 있게 대꾸했다.
“죄송하지만 회주님은 연세가 너무 많으십니다. 회주님이 젊음을 돈으로 사지 않는 이상 저와는 어울리지 않지요.”
“이런 무엄한……!”
호신위가 발끈해서 나서려는데, 홍금호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대신 흥미로운 표정으로 진소홍을 빤히 응시했다.
“당돌하군. 늘 자신감에 차 있는 건 좋은 것이지. 반반한 외모를 믿는 것이든, 실력을 믿는 것이든. 어느 쪽이든 간에. 하나 상황도 살펴야 할 지혜가 필요한 법일세. 남에게 부탁을 할 입장에서 자신감이 지나치면 무례로 보일 테니 말일세. 때론 모욕도 참을 용기가 필요하다네.”
“모욕을 참을 용기라. 좋은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용건은 무엇인가?”
“애석하게도 저는 회주님께 부탁을 드리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하면?”
“기회를 드리러 왔습니다.”
“기회라? 내게 무슨 기회를?”
홍금호가 말을 하면서도 피식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곧 천하가 손 안에 들어올 텐데, 제까짓 게 무슨 기회를 제공한다는 건가?
그 반반한 얼굴로 시집을 온다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을 텐데, 그건 진작 매몰차게 거절해 놓고 무슨?
그런데 진소홍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떨어졌다.
“회주님이 지금까지처럼 살 수 있는 기회입니다.”
“허허허!”
홍금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긴장한 채로 지켜보던 주변 무인들과 시종들도 툴툴 웃었다.
한참이나 호탕하게 웃던 홍금호가 천천히 표정을 굳히고는 입을 열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지금까지처럼 못 산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모든 걸 잃을 겁니다. 북천금제라는 말은 사라지겠지요. 북천걸개가 될 수도 있고요.”
말을 마친 진소홍은 스스로 뱉은 말이 웃겼는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뭇 남성들이 넋을 놓고 바라볼 지경이다.
하나 홍금호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진소홍이 조금씩 선을 넘고 있었기에.
그리고 상재를 타고난 자가 이렇듯 선을 넘는다는 것은 그만한 확신이 있다는 뜻이기에.
그게 아니면 완전히 인생 끝자락에서 내건 도박이라는 말인데…….
‘어느 쪽인가?’
도박으로 보기에는 어린 여인의 눈빛이 너무나 확고하지 않나?
진소홍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반역군에 대한 모든 지원을 끊어 주시지요. 아마 잠시 후 반역군은 후퇴할 것입니다. 실패할 경우 어디서 모이기로 하셨나요? 그것만 알려주시지요. 그리고 더 이상 이 일에 손을 떼시고요.”
“허허, 내가 자네의 이런 허무맹랑한 말을 믿고 도박에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벽력탄이 터졌다는 보고를 들었네. 맹은 끝이야. 한데 후퇴를 한다고?”
“벽력탄이 터진 건 사실이지만 반역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자네 말을 어찌 믿고?”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확실하게 보시라고 가져왔습니다.”
타앙!
진소홍이 품에서 옥구슬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탁자가 조금 깨지면서 옥구슬이 박혔다.
옥안영오와 연계된 옥구슬이었다.
“이건…….”
옥구슬에 비친 상황을 지켜본 홍금호는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진소홍의 말이 맞았다.
갑자기 개방 거지들이 떼로 나타나서 반역군들을 일망타진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 남궁천과 남궁검, 그리고 만취개와 패력궁도 막강한 무위를 자랑하고 있다.
홍금호는 어금니가 부서져라 입을 꽉 다물었다.
“어째서 이런……!”
“보시다시피 조만간 후퇴할 겁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대로 뒤를 쫓고 싶지만, 이쪽도 꽤 타격을 입어서요.”
실제로 남궁천은 옆구리 관통상까지 입는 바람에 정신력으로 싸우는 중이나 다름없었다.
“재기할 시기와 장소가 어디인지만 알려주시죠. 그럼 여전히 지금처럼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흥! 내가 입을 다문다고 한들 본 회가 무너질 것 같은가?”
“무너집니다.”
“뭐라?”
“적랑단이 왜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을까요? 사태가 이 지경인데 왜 흑무련은 여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을까요? 남의 집안싸움이라서? 하지만 이미 부련주가 휘말렸다는 소식이 들어가고도 남았을 텐데요.”
“설마…….”
홍금호의 눈이 흔들렸다.
진소홍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참고로 적랑단은 북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흑무련은…….”
“…….”
“총타가 북쪽이지요.”
빌어먹을.
북천금제 홍금호가 황금빛 술잔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