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 고로 존재한다
쉬이잇!
쩌어어엉!
고막을 터뜨려 버릴 것만 같은 금속성과 함께 청풍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날아갔다.
촤르르르르르륵!
그가 미끄러지면서 지붕의 기왓장이 마구 떠밀려 날아갔다.
콰가가가각!
마침 검을 거꾸로 세워서 꽂아 몸을 지탱하자 그의 몸이 용마루 끄트머리까지 밀려서 간신히 멈췄다.
후우우우웅!
차가운 밤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하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열기 때문에 하얀 김이 어깨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훅, 훅……!”
숨을 몰아쉬는 청풍이 싸늘한 시선으로 방해자를 응시했다.
“맹주…….”
그랬다.
패력궁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순간, 느닷없이 나타난 것은 바로 맹주 남궁검이었다.
그는 덕양 장로를 향해 달려가던 중이었다.
한데 마침 먼발치에서 만취개 장로를 따돌리며 패력궁을 향해 무섭게 질주해 오는 청풍을 본 것이다.
청풍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싸우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고수들의 영역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그였다.
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다 보니 신경질이 날 수밖에.
이번 혁명이 실패했다는 것은 진작 느끼고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패력궁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래도 나름 건진 게 있다고 자평할 터였다.
하나 이래서야…….
‘죽도 밥도 안 됐군!’
휘이이이잉!
다시 바람이 불었다.
바람결에 살기가 묻어 나온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살기다.
남궁검.
저자가 저렇게 강했던가?
어찌 된 영문인지 이놈의 남궁세가 것들은 싸우면서 자꾸만 성장하는 것 같다.
물론 젊은 무인들 중에는 그런 경우가 왕왕 있다.
아직 한참 깨달음이 부족할 때이니까 실전을 겪으면서 한 단계씩 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궁검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노인이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어디까지 성취를 이루려고 계속 성장하는 건가?
“징그럽군.”
청풍이 나직이 읊조리니, 남궁검이 새파란 안광을 뿜어내며 피식 조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다문 채 천천히 검을 앞세웠다.
마치 개가 짖는 소리에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이다.
청풍이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서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노려보았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남궁검은 그저 고집 센 깐깐한 늙은이에 불과했다.
자신과 정면 대결을 펼친다면 오초지적도 되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한데 단 며칠 만에 다른 사람이 됐다.
어찌 이럴 수가 있나?
청풍이 반쯤 찢어져 나간 장삼을 완전히 벗어 던져 버리고는 검을 앞세웠다.
“맹주, 후배들에게 양보도 하고 그래야지. 언제까지 추한 욕심을 부릴 거요?”
“이 자리를 탐내서 벽력탄까지 쓴 개새끼가 짖어댈 소리는 아닌 것 같군.”
“뭐, 뭐요?”
청풍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발끈했지만, 그는 곧 평정심을 되찾고는 심호흡을 했다.
상대의 격장지계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남궁검은 이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무림칠성의 수준에 오른 자가 아닌가?
피식.
청풍이 실소를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하나 물어나 봅시다.”
“…….”
“어찌 그만한 성취를 단시간에 이룬 거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맹주 자리에 오르니 깨달음이 왔소?”
“왜? 하면 자네도 이 자리에 오르면 깨달음이 올 것 같은가?”
“그럴지도 모르지.”
남궁검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걸 바로 개소리라고 한다네.”
“맹주…… 입이 좀…….”
“닥쳐라. 무슨 말을 해도 개새끼가 무의미하게 짖는 것보다는 의미 있다.”
“맹주…….”
“개새끼가 맹주 자리에 앉아서 짖어대면 정승이라도 된다던가? 깨달음? 내 깨달음은 자리가 만들어준 게 아닐세.”
“……?”
“자네는 자식이 없어서 모르겠군. 위만 바라보지 말고 때론 아래도 굽어 살피게. 진정한 깨달음은 아주 낮은 곳에서 시작되니 말이야.”
“대체 뭔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건 자네가 개라서 그렇다.”
“뭐요? 아까부터 듣자 듣자 하니까……!”
“원래 개새끼의 귀에는 개가 짖는 소리로만 들리는 법. 사람 말귀를 알아들을 리가 있겠는가? 자네는 타고난 무재였지. 하나 그걸 전적으로 믿었고. 나는 무재는 아니었으나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했지. 해서 자네는 날 못 이기는 것이야.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럴 테지.”
“늙은이가 되지도 않는 말을 주절대는 걸 보니 노망이 났구나!”
파아앙!
결국 청풍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차며 쏘아져 나갔다. 그 바람에 용마루의 머리가 우지끈 부서지면서 떨어져 나갔다.
쿠웅!
쒸에에에에엑!
용 한 마리가 용마루를 따라 몸을 비틀며 날아간다.
거침없는 쇄도를 마주하면서도 남궁검은 실눈을 뜬 채로 묵묵히 지켜만 보았다.
어떠한 미동도 없다.
그리고 일순간 기가 폭발적으로 일어나자!
쿠우우웅!
육중한 소리와 함께 주변의 기왓장이 둥실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전신에서 내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주변이 진공 상태로 변해 버린 것.
동시에 남궁검이 쥔 검신이 짙푸른 광휘로 휩싸였다.
천뢰제왕신공을 운기하여 만든 천뢰기라는 강기!
남궁세가 무공의 정수가 담긴 검강이다.
쉬이이이잇, 쩌어어어엉!
마침내 두 사람의 검신이 맞부딪쳤다.
뒤에서 지켜보던 패력궁은 일순간 전신의 호신강기를 끌어 올리면서 지붕을 차고 멀어졌고, 전각 지붕은 기의 충돌을 이기지 못해 산산이 터져 나갔다.
쿠콰콰콰콰콰콰아앙!
기왓장이 조각조각 깨지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나간다.
그야말로 혜성이 땅으로 떨어져 충돌한 것만 같은 현장이다.
“크으읏!”
“우아악!”
“이게 뭐야?”
주변에서 싸우던 무인들도 대경실색하면서 몸을 사렸다.
그들은 격전을 벌이다가도 몸을 둥글게 말고는 고개를 들어 간신히 전각 지붕 위를 올려다보았다.
떠엉! 쩡! 쩌어엉!
천둥벽력이 울리면서 두 절대고수의 검이 연신 부딪친다. 검신이 서로 부딪칠 때마다 빛이 번쩍번쩍 터지면서 하늘을 떨쳐 올리는 것만 같다.
“저, 저것이…….”
“진정한 고수의 싸움……!”
적아가 뒤엉켜 싸우던 사실도 잊은 채 많은 무인들이 넋을 놓고 구경하기 바빴다.
워낙 쟁쟁한 두 고수의 싸움이 눈앞에서 펼쳐지니 자신들의 싸움은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남궁검은 중(重)과 쾌(快)의 균형을 이루며 검을 휘둘렀고, 청풍은 곤륜파 장문인답게 극한의 쾌에 모든 정수를 담아내고 있었다.
따다다다다당! 쩡! 쩌엉!
까라라라랑!
두 사람은 무너진 지붕에서 아직까지 세워져 있는 기둥과 벽을 밟아가며 싸우고 있었다.
대부분의 싸움이 허공에서 격돌하는 중이었음에도 남궁검이 밀리지 않았다.
이는 청풍이 만취개와 싸우면서 힘을 많이 소진한 탓도 있었지만, 남궁검이 진정으로 남궁세가 무공의 오의를 깨달은 탓도 있었다.
제왕의 검법.
그의 검법은 확실히 쾌와 중을 모두 아우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극한의 쾌로 덤벼오는 청풍을 어떻게든 자신의 범위에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상대의 무공마저 품는 제왕의 품격!
그랬다.
남궁검의 싸움을 지켜보노라면 왠지 모르게 품격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감탄을 금치 못한 채 두 사람의 싸움만 보았다.
당장 죽고 죽이던 싸움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보다는 지금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초고수의 싸움을 두 눈으로 담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한데 그 와중에도 인파 사이를 터벅터벅 걸으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몸을 낮게? 그럼 그게 우연이 아니었단 말인가? 거참, 우리 가문의 무공이 그 정도였나? 하긴 승이가 하는 걸 보면 그런지도?”
연신 중얼거리면서 걷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윤첨산이었다.
그는 조금 전 지붕에서 격전을 치르다가 남궁천으로부터 구해지고 나서 간신히 자리를 피한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남궁천은 윤첨산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기분에 휩쓸려서 용마루로 올라가서 싸우니까 당연히 당하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싸울 때는 무게 중심이 낮아야 유리한데,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으니 균형 잡기도 어렵고 불리할 수밖에요. 특히 혁련검법과 혁련장은 더욱 중심을 낮춰야 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당연한 이치입니다. 연꽃은 아래에서 위를 보며 피지 않습니까? 매화 같은 꽃과 다르지요. 철저하게 무게 중심을 낮춰서 위를 향해 기운을 끌어 올릴 때 그 위력이 배가 될 겁니다.”
“호오!”
윤첨산은 지금 남궁천이 해준 조언을 거듭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빠진 채로 걷다 보니 자신이 향하는 곳에서 엄청난 싸움이 벌어진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인파를 헤치면서 걸음을 옮기자, 옆에서 다른 무인들이 당황해서 손을 뻗었다.
“어어?”
“저, 저…… 어디로 가는……?”
“지금 저기로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하지만 대부분의 무인들이 지붕 위의 싸움에 넋을 놓고 있던 터라 윤첨산을 제때 말리지 못했다.
더구나 윤첨산은 자아에 과몰입하여 주위에서 아무리 불러도 눈치를 챌 수 없는 침사(沈思) 단계의 상태였다.
“연꽃은 아래에서 위로 핀다. 확실히 그렇지. 하면 모든 기운을 아래에서 위로 향할 때 폭발적으로 일어나기 좋겠지. 하면 지붕에서 내 공격이 잘 먹혔던 것도 처마 끝에서 내려오는 자들만 상대해서 그렇다는 건가? 그럼 이를 응용하려면…… 중얼중얼…… 중얼중얼…….”
그렇게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일순간 ‘꽈앙!’ 소리가 들리더니 등 뒤에서 비명이 솟구쳤다.
“으악! 위험!”
“저, 저……!”
그제야 침사 단계에서 깨어난 윤첨산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엉?”
순간 여기가 어딘지 잠깐 생각했다.
이것이 깨달음의 직전에 자아마저 잊는다는 그 단계인가, 싶었다.
그런데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저 시커먼 그림자는 뭐지?
욕을 하네?
“빌어먹을! 썩 비켜라!”
이상하게 그 목소리가 매우 천천히 고막을 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다.
그리고 떨어지는 청풍이 검을 후려 오는 과정이 매우 느릿하게 보인다.
사실 청풍은 지금 남궁검의 일검에 충격을 이기지 못해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경공술과 별개로 그는 자유낙하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청풍의 얼굴을 미처 확인도 하지 못한 윤첨산은 저도 모르게 혁련공의 기운을 끌어 올리면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기운을 폭발시키면서 검신을 하늘 높이 올려 쳤다.
개화(開花)!
순간 붉은 연꽃이 활짝 피었다.
촤아아아아악!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튄다.
촤촤촤아아악!
연이어 연꽃이 피어난다.
지금껏 윤첨산은 이렇게 빨리 검을 휘두른 적이 없었다.
한데 이번 싸움에서 모종의 깨달음과 반사 신경을 얻은 것인지, 몸이 저절로 알아서 움직인다.
세 개의 연꽃이 피어버리자, 청풍이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쿠당탕탕!
마침내 청풍이 육중한 소리를 울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무심결에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던 윤첨산이 바닥에 쓰러진 청풍을 보고는 뒤늦게 화들짝 놀랐다.
“어이쿠야! 이, 이게 뭐야? 헉!”
윤첨산은 자신이 한 행동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깜짝 놀라며 물러났다.
하마터면 쥐고 있던 검마저 놓칠 뻔했다.
‘내, 내가 지금 청풍을……?’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잘못 본 게 아니다.
분명 저기 쓰러진 자는 청풍이 아닌가?
죽은 것 같지는 않지만 꽤나 깊은 부상을 입힌 것 같다.
마침 누군가 옆으로 내려와 어깨를 탁 짚었다.
“으헉!”
깜짝 놀란 윤첨산이 휙 돌아서다가 남궁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뒤늦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남궁검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하네. 성취가 있는 것 같군.”
“아…… 예. 예? 제가요? 어……? 그런가?”
윤첨산이 어리둥절하게 반문하자, 남궁검도 조금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성취가 있다는 걸 스스로 모르다니.
‘이건 또 신선한 경험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