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 고로 존재한다
따다당!
촤악! 촤촤악!
“큽! 크흐흐!”
파바바밧!
쉭! 쉬쉬쉭!
쾅! 콰당탕!
눈으로 좇기도 힘든 격전이 벌어진다.
파육음과 금속성이 어지럽게 뒤섞이고, 이따금씩 기괴한 웃음소리도 들린다.
덕양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정말이지 놀랍군!’
그는 남궁천을 보면서 내심 혀를 내둘렀다.
남궁천은 이미 전신이 피에 젖은 상태.
남궁천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칠 때마다 혈향이 훅 풍겨져 온다.
상처투성이다.
성한 곳보다 검에 베인 흔적이 더 많다.
그럼에도 남궁천은 미친개처럼 달려들었다. 이상한 웃음마저 흘리면서.
‘위험한 놈이로고!’
손을 섞으면 섞을수록 분명하게 느껴진다.
주체하지 못하는 살성이!
처음에는 얕은 상처를 입으면서 조금은 소극적으로 덤벼왔다.
하지만 남궁천은 점점 과감해졌다.
덕양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기 위해서라면 본인의 살을 얼마든지 내어주겠다는 각오로 부딪쳐 왔다.
모순되게도 무모한 그 행동에서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무엇이 이 아이를 이렇게……!’
남궁천의 전생을 알 수 없는 덕양으로서는 그저 이 기이한 현상을 겪으면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허어, 죽음으로 돌진하는 자에게서 삶에 대한 집착이 느껴진다니.’
그 묘한 조화가 덕양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이러다가 깨달음이 오면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이고, 결국 손에 닿지 못하면 영원히 머무는 것이다.
해서 깨달음이 오려는 순간은 기회이자 위기이기도 하다.
다만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오로지 생각에 집중해야 할 때가 있는데, 지금은 그럴 만한 환경이 아니니 덕양의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키햐아!”
남궁천이 기괴한 탄성을 터뜨리며 다시 달려든다.
혈귀가 따로 없다.
따다다다다당!
거친 쇳소리에 이어 남궁천이 다시 벽라검을 내지른다.
덕양은 얼른 허리를 젖히면서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남궁천의 벽라검을 빙글 돌려세웠다.
휘청!
남궁천이 중심을 잃은 순간 덕양이 재빨리 검을 내질렀다.
푸욱!
간발의 차이로 급소를 피한 남궁천.
하지만 다음 순간 남궁천이 왼손을 휙 뻗어 옆구리를 관통한 검신을 움켜잡았다.
“아니……!”
덕양이 두 눈을 부릅떴다.
시뻘겋게 충혈된 남궁천의 눈을 마주친 순간, 그는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죽음도 불사하는 무모한 정신과 생에 대한 갈망이 절묘하게 혼재된 눈빛이라니.
‘허어,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머릿속에서 어쩔 수 없이 도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는 그 찰나, 남궁천이 검신을 확 끌어당기며 그대로 벽라검을 내질렀다.
‘위험……!’
생각지도 못한 공격 방식에 덕양이 얼른 검을 뽑아내고 물러나려고 했지만, 남궁천의 손에 쥐어진 검신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동귀어진이라도 할 각오인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덕양이 발을 들어 남궁천의 가슴팍을 걷어차면서 검파를 놓고 물러났다.
파파팟!
쉬이잉!
남궁천이 내지른 벽라검은 결국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크헉, 헉, 헉……!”
왼손으로 무릎을 짚은 남궁천이 벽라검을 거꾸로 땅에 꽂은 다음 어깨를 연신 들먹였다.
히죽!
여전히 옆구리에 검신을 꽂아둔 상태인데도 웃는다.
‘미친……!’
거친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저런 모습을 보고 미치지 않았다고 할 인간이 얼마나 되겠나?
당장 내장이 쏟아져 내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에 피투성이 된 몸으로 웃고 있다니.
그때였다.
파바밧!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능허자의 등이 남궁천과 툭 부딪히고 말았다.
마침 남궁검을 상대하고 있던 능허자가 씨근거리며 돌아서서는 눈을 부라렸다.
“네놈은 뭐냐?”
“강호에서 제일 센 불나방이오.”
“뭐라? 미친……!”
능허자가 사일검법을 발현하려는데, 덕양이 재빨리 손을 뻗으며 외쳤다.
“안 돼!”
하지만 이미 남궁검을 상대하면서 약이 바짝 올라 있던 능허자는 발검과 동시에 남궁천을 노렸다.
쒸아아아앙!
강기가 화살처럼 날아가자, 남궁검이 얼른 검을 올려 쳐 강기를 막아냈다.
콰아아앙!
“크크크.”
남궁천이 입매를 찢으며 웃자, 능허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웃어?”
“웃으면 복이 오거든.”
“뭔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
능허자가 다시 바닥을 찼다. 아니, 차려고 했다.
하지만 남궁천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코앞까지 날아왔다. 정말이지 귀신같은 경신법이었다.
물론 그것은 운룡대구식이었다.
한데 더 놀라운 것은 피투성이가 된 남궁천의 표정이었다.
어딘지 광기 서린 웃음을 짓는 남궁천. 저절로 한 단어가 떠오른다.
“혈귀…….”
쉬컥!
순간 짙푸른 광휘가 능허자의 목을 베며 지나갔다.
능허자에게 달려오던 남궁검도, 방금 소리쳤던 덕양도 순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
능허자는 그 자리에 서서 잠시 눈을 끔뻑였다.
목 언저리가 서늘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아니, 짐작은 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세상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툭, 데굴데굴……!
츄아아아아아!
머리를 잃은 능허자가 그 자리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더니 이내 쿵 넘어갔다.
남궁천이 검을 한차례 휘둘러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무심히 돌아서던 남궁천의 시선이 마침 남궁검과 딱 마주쳤다.
“할아버지.”
그제야 남궁천의 눈동자가 조금은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었다.
남궁검이 남궁천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남궁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목을 잃은 능허자를 보았다.
구파일방의 장문인을 죽였다.
이건 보통 큰일이 아니다.
어쩌면 남궁검은 그것을 두고 나무랄지도 모른다.
너무 분위기에 휩쓸려 버렸다.
일순 희열과 안온함에 도취해서 망나니 칼춤을 춘 것이다.
마침내 남궁검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눈앞에 멈춰 섰다.
“천아.”
“예, 할아버지.”
“잘했다.”
“예. 응? 예?”
“감히 너에게 살검을 펼치는 자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너 자신이다.”
“…….”
남궁천이 멍하니 쳐다보자, 남궁검이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고는 돌아섰다.
그러자 덕양이 지켜보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손자에게 잘 가르치는구려! 지금 구파일방의 장문인을 죽여놓고서……!”
“죽이지 않았다면 내 손자가 죽었을 테지. 보아하니 당신도 살검을 펼치던데?”
“……!”
“다른 걸 떠나서 내게 벽력탄을 쏟아부은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있는가?”
“그건……!”
“듣기 싫다. 개 짖는 소리도 이젠 지겹다. 각오하시게.”
구오오오오오!
남궁검이 전신에서 공력을 끌어 올리자, 장삼 자락이 크게 부풀면서 펄럭였다.
그런데 마침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으음? 무엇이냐?”
남궁검이 슬쩍 돌아보자, 남궁천이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앞을 가로막아 섰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 놓고?”
하면 지금까지는 마음 놓고 싸우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게 귀신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혹시나 할아버지께 피해가 될까 봐 참고 있었는데…… 지금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무엇이냐?”
“그 전에. 정말 제가 마음껏 싸워도 괜찮은 겁니까?”
“괜찮다.”
“아무리 사악한 무공을 쓰더라도요?”
“무공이 사악하다고 네가 사악한 것은 아니다. 그리 따지면 애초에 칼자루를 쥐어서도 안 되겠지. 무공은 곧 칼이다. 어떤 칼을 쥐었느냐보다 어떻게 칼을 휘두르느냐가 중요한 법.”
“좋습니다. 모든 고민이 해결됐습니다.”
“그럼 지금 생각한 것을 하려는 것이냐?”
“예, 지금 해보겠습니다. 지켜봐 주시죠.”
“알았다. 물러나 있으마.”
남궁천의 말에 남궁검이 팔짱을 끼고는 서너 걸음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덕양은 기가 찼다.
지금까지 남궁천은 자신을 누르지 못했다. 오히려 살아남는 것에 급급할 지경이었다.
한데 팔짱을 끼고 물러나?
대체 뭘 믿고 저러나?
한데 남궁검의 표정에는 강한 신뢰가 담겨 있다.
이쯤 되니 덕양도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뭘 믿고 그리 여유로운지 모르겠지만, 큰 실수를 하는 게다.”
“그건 끝나고 나서 보면 될 일이고.”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뱉더니 일순 단전에서부터 천마신기를 끌어올렸다.
후우우우웅!
벽라검에 시뻘건 마기가 넘실거리며 맺혔다.
순간 덕양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네, 네놈……! 분명 그건 마기……!”
“바보는 아니군요. 마기 맞습니다. 이번에 용취곡에 갔다가 초견파공안으로 좀 흉내를 내봤습니다.”
물론 마공을 운기한다고 곧바로 기운이 마기로 바뀌는 건 아니다. 때문에 남궁천이 천마신단을 복용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마기를 드러낼 수가 없다.
하지만 초견파공안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덕양으로서는 남궁천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간 마공을 써먹어야 했다.
창벽공으로 완전히 갈무리한 마공을 써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천마신기의 온전한 힘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지금이 적기이리라.
마교를 소탕하러 간 사이, 반역자들이 외조부이자 가주이자 맹주인 남궁검을 벽력탄으로 죽이려고 했다.
이보다 완벽한 명분도 만들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 아니면 보이기도 어렵다.
남궁천은 이번 기회에 마기와 정기를 함께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맹원들에게 벽력탄을 퍼부었다는 이유 하나로도 명분은 충분한 셈이 아닌가?
츄아아아아!
탁탁탁!
남궁천이 옆구리를 관통한 검을 뽑아내고는 얼른 점혈을 해서 피가 흐르는 것을 막았다.
우우우우우웅!
이번에는 왼손에 쥔 검신에 천뢰기를 둘렀다.
푸른 광휘가 연신 넘실댄다.
오른손에는 붉은 마기.
왼손에는 푸른 천뢰기.
‘호오, 이게 되네?’
생각만 해보고 직접 운용해 본 것은 처음이다.
‘뭐 그동안 너무 바빴지.’
이 두 개의 상반된 기운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창벽공 덕분이다.
평소 창벽공으로 수련된 몸이 어느새 제왕의 품격을 갖춰가고 있는 것이다.
한 나라에는 정예군이 있고, 용병도 있듯이.
여기서 나라는 바로 남궁천의 몸이었고, 정예군은 천뢰기, 용병군은 천마신기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기운을 양손에 두른 남궁천이 히죽 입매를 말아올렸다.
덕양이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나니까 가능하지.”
씨익 웃은 남궁천이 일순 바닥을 찼다.
파아아앙!
순간 남궁천의 신형이 빛살처럼 뻗어갔다.
쉬쩌어어어어엉!
“크아아악!”
단 일격!
양손에 쥔 검이 동시에 내려치는 것을 막아낸 덕양이 비명을 터뜨리며 포탄처럼 튕겨 날아갔다.
쾅!
전각 벽을 부수고,
콰콰앙!
또 다른 벽을 부수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갔다.
쿠당탕탕!
전각 안쪽인지 너머인지에서 구르는 소리에 이어 천장이 무너져 내린다.
쿠구구구궁……!
마침 뒤에 서 있던 남궁검이 눈을 부릅뜨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거…… 나도 할 수 있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