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8. 금선탈각(金蝉脱殻)
쿠르르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담벼락마저 무너지면서 맹주전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주변을 자욱하게 채웠던 연막도 이젠 흔적이 없다.
벽력탄이 폭발하면서 휘몰아친 바람 탓에 모두 휩쓸려간 것이다.
먼지로 뒤덮였던 맹주전도 이제 어슴푸레 처참한 광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과연 얼마나 살았을까?
우위광과 청풍 주변으로 다른 강호 노숙들도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맹주전을 응시했다.
청풍이 입매를 비틀었다.
“뭐, 온전한 시체나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소.”
“어쨌거나 청소는 해야 할 테니 가봅시다.”
“청소라. 후후. 그렇지요. 쓰레기는 청소를 해야지요.”
청풍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뗐다.
그런 그를 보며 우위광이 기분 좋게 덕담을 건넸다.
“이왕 맹주전도 무너졌으니, 어떻게 지을지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겠소? 앞으로 오래도록 지내야 할 곳이 아니오?”
은연중에 차기 맹주로 지지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실상 이런 와중에 장로원주의 지지는 차기 맹주 확정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물론 총군사의 의견도 중요할 터다.
하나 천뇌당은 현재 봉인된 상태.
그들은 내원이 뚫린 직후부터 일절 이번 전투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는 총군사를 휘말리지 않도록 하려는 남궁검의 배려이기도 했지만, 장로원주 역시 천뇌당을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이건 묵시적인 동의라고 할 수 있다.
천뇌당은 그만큼 민감한 영역이었으니까. 뜻이 맞지 않다고 몰살시킬 수 없는 조직.
백도무림에서 똑똑한 자는 죄다 긁어모은 곳이니 그럴 만도 했다.
어쨌거나 천뇌당은 언제부턴가 권력 암투에서는 자연스럽게 한 걸음 물러나 있는 조직이 되어 있었다.
청풍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차차 생각해도 될 부분 아니겠습니까? 우선은 시체도 수습하고 장례부터 치러야겠지요.”
“역시 차기 맹주다운 말씀이오.”
우위광이 듣기 좋은 소리를 한마디 더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매캐한 냄새가 자욱했다.
아직도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시체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정말 벽력탄의 위력이 어마어마하구려.”
우위광의 말에 청풍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까지 시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전부 녹아 버리기라도 한 건가?”
“혹시 무너진 잔해 더미 아래에 대거 매장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요. 물론 온전한 형태는 아닐 것 같습니다만.”
“어디 한 번 더 찾아봅시다.”
우위광의 말을 끝으로 청풍이 수신호를 내리자, 무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전각이 가루가 될 정도로 폭삭 주저앉은 상태.
기둥이 통째로 타 버려서 들어 올리려고 하면 ‘파스스’ 소리를 내면서 허물어지기 일쑤였다.
강호노숙들은 팔짱을 끼고는 인근에서 수색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흐음.”
우위광이 무겁게 침음을 흘렸다.
왜일까?
모든 게 다 끝이 났는데 이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청풍 역시 깔끔하지 않은 여운 때문인지 우위광을 슬쩍 돌아보고는 넌지시 물었다.
“원주께서는 이전에도 벽력탄을 사용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주 오래전이오. 마교대전 중에 벽력탄을 사용한 기억이 있소.”
“커흠. 그때도 이만한 화력이었겠지요?”
청풍의 목소리에서 애써 불안을 억누르는 게 느껴진다.
시체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위광이 잠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물론 벽력탄의 화력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요. 그야말로 화마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하지. 하나…….”
“이 많은 시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정도는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모르겠소. 내가 사용했던 벽력탄은 이미 수십 년이 지났소. 그 이후로는 벽력탄을 쓸 일이 없었고. 그러니 그 긴 세월 동안 벽력탄도 발전이 있었을 터. 더구나 철심당주는 폭약에 꽤나 관심이 많았으니 분명 화력이 예전에 비해 월등해졌을 거요.”
“그렇군요.”
청풍이 조금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백번 양보해서 우위광의 말이 옳다고 해도 분명 이상한 점이 있긴 했다.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원주.”
“흐음. 무슨 말씀이오?”
우위광이 청풍을 돌아보았다.
청풍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맹주전의 잔재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껏 시체가 나뒹구는 전장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비록 곤륜파가 새외 지역이라고는 하나 험준한 산맥에 위치한 까닭에 걸핏하면 도적 떼와 싸우고 산채와 부딪치는 일이 잦았지요.”
“고생하셨구려.”
“그러다 보면 화공을 쓰기도 하는데, 그땐 어김없이 시체가 불에 타는 냄새를 맡곤 했습니다. 원주께서도 아실 테지만, 그 냄새는 한 번 맡으면 잊기가 힘들 만큼 강렬합니다.”
“…….”
“처음에는 고기 굽는 냄새와 비슷하게 시작되지요. 하나 곧 피부와 근육, 다른 인체 조직이 타면서 고약한 냄새로 변합니다. 쓴 냄새 같기도 하고. 머리카락과 손톱 따위가 타들어가고 뼈와 내장이 탈 때는 악취가 더욱 심해지지요. 극도로 불쾌한 냄새.”
“한데 지금…….”
“그렇소이다. 그 냄새가 안 납니다.”
“흐음. 혹시 벽력탄의 위력으로 그 냄새마저 날아간 게 아닐는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무심히 대꾸한 청풍이 눈살을 더욱 가늘게 여몄다.
마침 현장을 수색하던 무인이 얼굴을 온통 시커멓게 칠하고는 달려왔다.
“장문인, 시체를 전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흔적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화력이 너무 강해서 전부…….”
“그만. 추측은 나중이다. 사실만 보고하면 된다.”
“죄송합니다. 시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수고했다.”
청풍이 대충 대답하고는 강호 노숙들을 향해 돌아섰다.
“다들 어찌 생각하십니까?”
“과연 장문인이오. 수색이 끝나기도 전에 눈치를 채시다니…….”
“우 원주님.”
청풍이 우위광의 말을 끊으며 불렀다.
“왜 그러시오?”
“지금 제 얼굴에 금칠을 하실 때가 아닙니다. 있어야 할 시체가 사라졌다는 것은 죽었어야 할 사람이 살아 있다는…….”
“왜? 얼굴에 금칠하는 거 좋아하잖아? 금면인.”
순간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온 목소리!
하나 청풍만 그 목소리를 들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순간 모여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주변을 살폈다.
다음 순간!
“저, 저깁니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휙 돌아선 무인들.
맹주전 맞은편 전각 지붕에 우뚝 선 그림자가 보였다.
청풍은 물론 우위광을 비롯한 강호 노숙들도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저, 저, 저놈은……!”
“남궁천!”
이름도 입에 올리기 싫은 그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다.
우위광은 자신이 헛것을 보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 아니…… 도대체 어떻게?”
내원으로 들어오는 문은 완전히 봉쇄해둔 상태였다.
그런데 대체 언제 남궁천이 왔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출발을 하지 않았던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면 임무를 떠났던 남궁천이 마인들에게 뒈져서 귀신이 되어 날아온 건가?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니 이젠 별생각이 다 든다.
어쨌거나 눈앞에 남궁천이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청풍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오옴! 네놈이 어째서 그곳에 있는 것이더냐!”
“어째서긴. 받은 만큼 돌려주려고 왔지.”
“뭐라?”
다음 순간 남궁천이 공력을 가득 실어서 사자후로 쩌렁쩌렁 외쳤다.
“거, 너무한 것 아니오! 반역을 일으켜도 곱게 일으킬 것이지! 맹주님과 맹원을 맹주전에 몰아넣고 벽력탄을 쏟아부어 터뜨리다니! 어찌 그리 잔인하단 말이오? 그러고도 세상이 당신들을 용납할 것 같은가!”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강호 노숙들조차 공력을 끌어 올려 고막을 보호해야 할 지경이었다.
몇몇 무인들은 미처 대처가 늦어서 비틀거리며 피를 토했다.
내상을 입은 탓이다.
모르긴 해도 남궁천의 목소리는 무림맹 밖까지도 들렸으리라.
그야말로 천둥이 울리는 것처럼 큰 소리였다.
우위광이 뱀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마주 소리쳤다.
“흥! 모든 결과는 자네 조부가 자처한 일이다! 이쪽에서는 남궁 맹주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하나 남궁 맹주는 끝까지 탐욕을 내려놓지 못해서 모든 맹원들과 함께 지옥행을 택한 것이다! 탓을 하려거든 욕심에 눈이 멀었던 자네 조부를 탓하게!”
“흐음.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려.”
“뭐?”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자 이번엔 우위광과 다른 노숙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어진 남궁천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면 나도 기회를 드리겠소! 어차피 하루를 드리든, 일각을 드리든 마찬가지일 것 같으니, 셋을 세겠소.”
“대체 뭔 소리를…….”
“셋을 셀 동안 당신들 모두 대가리를 땅에 박으시오! 그리고 석고대죄하고 참회하시오! 그러면 살려는 드릴게.”
“뭔 개소리냐! 고작 네놈 따위가 우리를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어떻게 하긴? 받은 대로 돌려 드리겠다니까. 벽력탄을 퍼부어 드려야지.”
“뭐, 뭣이? 벽력탄 스무 개는 우리가 철심당에서 모조리 가져왔는데 남아 있을 리가…….”
“그리 따지면 내가 여기 있을 리는 있었소? 크크.”
“그런……!”
그러고 보니 남궁천이 여기 있는 것부터 말이 안 되긴 한다.
정말 벽력탄을 가지고 있는 거라면……!
“하나!”
남궁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멈칫!
무인들의 몸이 굳었다.
“두울!”
“어, 어떻게 합니까? 정말일까요? 벽력탄이 날아오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을 거요!”
“셋. 다들 잘 가시오.”
말을 마친 남궁천이 지체 없이 수신호를 내렸다.
투투투투투투투우웅!
슈슈슈슈슈슈슈우욱!
순간 전각 뒤의 투석기에서 시커먼 벽력탄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헉!”
“이런 젠장!”
“엎, 엎드려라앗!”
벽력탄이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데 엎드린들 무슨 소용이랴? 그렇다고 이제 와서 경공을 펼친다고 해도 범위 밖으로 달아나기도 힘든 상황.
달리 방법이 없다.
폭발을 하면 무시무시한 화력과 파편이 사선으로 튀어 오를 것이기에 바닥에 엎드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살 가능성이 있다.
모두들 대처법에 따라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귀와 코를 막고 입을 벌렸다.
곧이어,
툭! 투두두둑! 투둑……!
데굴데굴……!
벽력탄 스무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굴러와서 바닥에 엎드린 청풍의 눈앞에 멈췄다.
“……!”
순간 청풍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눈앞에 멈춘 것은 벽력탄이 아니라, 내원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무인의 목이 아닌가?
“헉! 이, 이게 무슨……!”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니 벽력탄이 아니라 전부 내원 정문을 지키던 무인들의 머리가 아닌가?
순간 청풍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이익! 이노오오옴!”
그가 노호성을 터뜨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이 배를 잡고는 낄낄거렸다.
“으하하하! 아이고, 배야. 제 수하의 머리를 보고는 저리 쫄다니. 천하가 비웃겠소! 크하하하!”
“야이 미친놈아! 네놈이 이딴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네놈이 무슨 재주로 정문을 뚫고 올라와서 이 지랄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시끄럽소.”
“뭐, 뭣이?”
남궁천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청풍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어디 열받으면 덤비시던가?”
“이노오오옴! 뭣들 하느냐? 저놈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청풍이 외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무인들 중 상당수가 기합성을 터뜨리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남궁천이 그 모습을 보다가 입매를 비틀었다.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 하시네.”
다음 순간 남궁천이 수신호를 내리자,
“우와아아아아아아!”
“미친개를 때려잡을 시간이다앗!”
“반역자를 처단하라앗!”
벽력같은 함성이 들리더니 전각 사이사이마다 이루 셀 수 없는 무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노도처럼 밀려드는 개방 거지들을 보면서 청풍과 우위광을 비롯한 강호노숙들이 입을 딱 벌렸다.
“이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