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 금선탈각(金蝉脱殻)
내원이 완전히 봉쇄됐다.
이번엔 무림맹의 입장에서 봉쇄한 것이 아니라, 청풍과 덕양을 주축으로 한 반역자들에 의해 봉쇄된 상태다.
장로원 역시 봉인에서 해제되었다.
장로원을 감시하던 무인들이 일제히 후퇴하면서 그동안 꼼짝도 못했던 장로들이 자유를 얻었다.
자유를 얻은 장로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쩝쩝…… 꿀꺽, 꿀꺽……!”
“우물우물…… 쩝쩝…… 와구와구……!”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는 장로들.
사흘을 내리 굶고 고기 한 점 맛을 본 게 전부였다.
그것도 운이 좋은 자들만 그랬다.
다수의 장로들은 고기 냄새만 맡고 내리 굶었다.
한데 이제야 자유를 얻어서 먹을 걸 대접받으니 눈이 돌아갈 수밖에.
우위광 원주 역시 체면불고하고 삶은 닭고기를 물어뜯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청풍이 넌지시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우물우물…… 쩝쩝…… 이미 반역을 눈치챈 것인지…… 꿀꺽!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장로원부터 봉쇄하더구려. 우물우물…… 쩝쩝!”
굶주림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더니, 그토록 꼬장꼬장한 고집을 보여주던 우위광도 먹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닭고기를 입에 가득 넣고 말을 하니, 음식이 다시 튀어나왔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
이래서야 거지가 따로 없달까?
청풍이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우위광은 상대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쨌거나 장로원의 존재는 필요하다.
세간의 인정을 받기 위한 첫 단추라고 봐야 한다.
만약 장로원이 인정하지 않으면 이건 정말 명분 없는 반역이 되고 말 테니까.
“천천히 드시오. 체하시겠소.”
은근히 비꼬면서 한 말이었지만, 우위광은 여전히 허겁지겁 음식을 먹으면서 한 귀로 흘려버렸다.
대신 청풍을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하나 외원에서도 식량을 구비하지 못해 힘들었을 텐데. 그나마 북천금제의 도움으로 해결하지 않았소? 그러니 이번 거사에서 내가 한 일이 아예 없진 않은 셈이지.”
구차한 변명 같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청풍이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북천금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이번엔 뜻밖의 난관에 부딪힐 뻔했지. 다만, 애초에 잘 풀렸다면 북천금제가 그리 고생할 일도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쩝쩝…… 어쩔 수 없소. 모든 계획은…… 쩝쩝…… 꿀꺽! 조금씩 어긋나게 마련이니까.”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아무튼 나는 이제 맹주전으로 가봐야겠습니다.”
“맹원들이 전부 맹주전에 밀집했소?”
“그렇죠. 천뇌당 쪽 무인은 그쪽으로 갔고. 나머지는 맹주전으로.”
“흐음. 차라리 벽력탄으로 한 방에 보내 버리면 편할 텐데.”
“뒷수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다면야 우리도 편하죠.”
“흐음.”
달그락!
이제야 어느 정도 배를 채운 것인지 우위광이 수저를 내려놓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꺼억!”
길게 트림을 한 우위광이 옆에 놓인 천으로 기름칠이 된 입가를 대충 닦아냈다.
“이제 좀 살 것 같군. 후우. 그렇게 한심한 눈으로 보지 마시오. 이쪽에선 남궁검과 패력궁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일이었소. 쉽지 않았지.”
“뭐, 이해해 드리지요.”
“흐음. 뒷수습이라. 하긴 벽력탄을 써서 맹주전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면 확실히 명분이 필요하겠지.”
“그러지 않으면 세상의 외면을 받을 겁니다. 세상이 등을 돌리면 어찌 되는지 남궁가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옳은 말이외다. 세상과 싸울 수는 없소. 하나 그 세상을 설득하려면 뭐가 필요하겠소?”
“명분 아니겠습니까?”
“그렇소. 명분이 없다면 만들면 되지 않겠소? 아니, 충분히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 보여도 되지 않겠소?”
“어찌……? 묘안이 있으십니까?”
“묘안이라기엔 그저 늙은이의 꼼수 정도로 생각해 주시오.”
말을 마친 우위광이 청풍에게 얼굴을 가져가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청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한 번 시도해 보지요.”
* * *
후우우우웅!
맹주전 근처로 가면 후끈한 바람이 불어온다.
맹주전에 밀집한 맹원들이 뿜어내는 바람이다.
거기에 여신우를 비롯한 흑무련 무인들 역시 사기를 풀풀 풍기면서 담벼락에 올라서 있었다.
먼저 맹주전 정문 앞으로는 비량이 이끄는 천응대가 창궁혈화검진(蒼穹血花劍陳)을 구축하고 있었다.
천응대에 속한 무인 다수가 남궁세가 소속이었기에 가능한 검진이었다.
방어보다는 공격에 초점이 맞춰진 검진이었는데, 적어도 맹주전 밖에서는 공격적으로 싸워서 상대의 투기를 꺾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리고 담벼락에는 흑무련 무인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고, 안마당에는 맹원들이 오와 열을 갖춰 항시 대기 상태로 날을 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패력궁 천무류를 비롯한 궁수들은 맹주전 지붕 위에 빼곡하게 포진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벌집을 연상케 하는 구도.
누구라도 툭 건드리기만 하면 성난 벌떼들이 사정없이 공격을 가하리라.
그런 맹주전 앞으로 강호 노숙들이 모여들었다. 청풍과 덕양, 정극과 정혜, 그리고 능허자와 우위광까지.
그들이 걸음을 멈추지 않자, 비량이 내공을 실어 고함을 질렀다.
“멈추시오! 거기서 더 움직이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거요!”
“흥! 궁지에 몰린 쥐새끼 주제에 주둥이도 잘 터는구나!”
청풍이 차갑게 힐난하면서 한 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찰나!
쒸에에에에엑!
떠어어어어엉!
강기를 머금은 화살 한 자루가 날아들면서 청풍의 검신에 부딪쳤다. 동시에 청풍의 몸이 밀려나는 것을 다른 노숙들이 얼른 막아주었다.
촤츠츠츠츳!
청풍이 미간을 찡그렸다.
손아귀는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저 짜증 나는 인간!’
경공술이 극에 달하고 나서부터 어지간한 싸움에서 그는 불리하다는 걸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한데 활을 쏘는 천무류만큼은 정말 짜증이 난다.
근접전을 펼치기만 하면 별것 아닐 텐데, 저놈의 화살을 자꾸 쏘아대니 접근이 불가능하다.
“내가 나서겠소.”
뒤에서 말을 마친 우위광이 헛기침을 하고는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한번 비량이 소리쳤다.
“멈추시오.”
“알겠네. 흥분하지 말게.”
우위광이 비릿한 미소를 짓고는 손을 들어 보였다.
비량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노려보자, 우위광이 한쪽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말했다.
“우리는 싸움을 원하지 않네. 이왕이면 대화로 풀어가면 좋겠군.”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대화를 운운하다니. 낯짝도 두껍군요, 원주님.”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정녕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야 당연히…….”
“주위를 둘러보게! 지금 여기에 누가 있는가? 구파일방의 명숙들이 계시네. 그리고 자네 뒤에는 누가 서 있나?”
“…….”
“그렇지. 사파 놈들이 서 있네. 사파 나부랭이와 손을 잡고 맹을 마음대로 주물러댄 것을 어찌 원주로서 좌시할 수만 있겠나? 내 마음을 헤아려주게.”
“아직도 그런 개소리를 하십니까?”
“누가 뭐래도 맹이 사파와 손을 잡은 것은 눈살 찌푸려지는 행위일세.”
“그건 마교를 견제하기 위해 일시적 화친을 맺은 것이고, 굴욕적인 외교가 아니라, 상납금까지 받은…….”
“마교가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건가? 아직까지 마교의 횡포로 피해를 본 지역이 보고되지 않았지. 혹시 마교를 운운하는 것도 맹주가 맹을 장악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그런 말을 하시면 스스로도 창피하지 않습니까?”
“맹주에게 전해주게. 야욕을 내려두고 순순히 투항한다면, 맹원들만큼은 모두 살 수 있다고. 더 이상의 불필요한 희생은 막자고.”
“전할 필요가 없는 말 같군요.”
“하면 자네들 모두 지옥을 보게 될 걸세. 죽음을 앞두고 후회해 봐야 늦은 일. 마지막까지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생각인가?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내가 기회를 주는 걸세. 만약 따르지 않으면…….”
“……?”
“이쪽에서는 벽력탄을 쓸 생각이네.”
“……!”
“그럼 자네들은 손 한 번 섞을 기회도 없이 전멸할걸세. 알겠나? 부디 이 노부의 제안을 무시하지 말게나.”
우위광이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는 확실히 보았다.
그 능글맞은 비량이 흠칫거리며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벽력탄을 퍼부으면 맹주전은 몇 번이고 박살 날 만큼의 화력일 테니까.
비량이 굳은 표정을 짓는데, 우위광이 몸을 돌리다 말고 멈칫거리고는 물었다.
“참, 다쳤다고 들었는데 좀 어떤가?”
“신경 쓸 것 없습니다.”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지만, 비량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우위광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시간을 얼마나 주면 되겠는가?”
“사흘 주시지요.”
“호오, 사흘씩이나?”
“맹주님과 맹원의 목숨이 달린 문제니까요.”
“흐음. 그래도 사흘은 길군. 사실 칠주야도 줄 수 있네만, 결정을 내리는 건 결국 한순간이 아닌가? 그래도 자네 말대로 맹주가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맹원들과 소통도 해야 할 테니 하루 주겠네. 내일 이 시간, 맹주가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이쪽에선 벽력탄을 사용할 걸세.”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마친 우위광이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그의 입가에는 야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걸로 명분은 충분할 터. 벽력탄을 사용했다는 비난을 피하긴 어렵겠지만, 충분한 기회를 제공했다는 명분은 챙길 수 있겠지. 뭐, 이대로 남궁검이 투항한다면 가장 좋은 일이고.’
물론 그렇다 해도 남궁검은 죽겠지만.
* * *
“허어! 정말 놀랍군. 대단해. 무한 지하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만취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연신 딸꾹질을 해댔다. 취기 때문에 딸국질이 나오는 것도 있었지만, 놀란 마음을 가누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만큼 등하로는 충격적이었다.
중원 곳곳에 개방의 눈이 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어느 세가에서 가주가 똥을 며칠이나 싸지 못했는지도 알 수 있을 정도다.
한데 무한에 이만한 지하로가 생길 때까지 개방은 무얼 했단 말인가?
“에잉, 본 방도 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군!”
만취개가 술병을 나발 불고는 넌지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나?”
“뭘 말입니까?”
“등하로를 공유해도 괜찮겠냐고 묻는 걸세.”
“물론이죠. 대신 개방의 정보도 본 맹과 공유해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그럴 걸세. 앞으로 개방은 맹과 뜻을 함께할 걸세. 적어도 남궁세가가 맹에 머무는 한.”
그 이후는 만취개도 장담할 수 없다는 뜻.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곤 가볍게 대꾸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때 마침 맞은편에서 기척이 들렸다. 두 사람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개방도 눈치채지 못한 등하로다.
누가 나타나든 이 등하로를 이용할 사람이라면, 불명회원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나타난 사람은 불명회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긴장해야 할 상대도 아니었다.
“엇! 주군! 드디어 오셨군요!”
반색하며 소리친 사람은 다름 아닌 귀왕.
남궁천이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물었다.
“귀왕? 네가 왜 여기서 나오는 거야?”
“아, 이왕이면 전쟁 중인 맹주님과 맹원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직접 요리를 했습니다!”
귀왕이 뿌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남궁천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다시 나오는 거고?”
“아참! 지금 사태가 좀 심상치 않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 미친놈들이 벽력탄을 쓰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벽력탄을?”
“예! 맹주전을 통째로 날려 버리겠다는 심산입니다!”
“흐음. 약이 바짝 올랐나 본데. 그럼 여론이 좋지 않을 텐데?”
“그래서 맹주님께 투항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러기만 한다면 맹원은 모두 살 수 있다고요.”
“만약 거절하면 맹원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결국 맹주라는 식으로 뒤집어씌울 속셈이군.”
“예, 그래서 불명회주를 만나 이 안건에 대해 말하려고 했는데, 마침 주군이 오셨네요.”
“흐음.”
남궁천이 팔짱을 끼고 침음을 흘리다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터뜨려 버리라고 하지, 뭐.”
“역시 주군이십니다! 당장 벽력탄을 터뜨려 버려…… 응? 예?”
“벽력탄 터뜨리게 하자고.”
“그럼 맹주전이 통째로 날아가는데…….”
“그걸 보여주자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럼 우리는 충분히 명분을 갖춘 셈이니까. 안 그렇습니까? 장로님.”
만취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궁천을 보다가 이내 파안대소했다.
“크하하하하! 확실히 자넨 미친놈이야! 아주 재미있다니까! 킬킬킬! 거, 볼만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