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49화 (448/508)

449. 슬슬 돌아가자

남궁천의 예상대로 백묘는 무한 쪽으로 내달렸다. 그 뒤를 느긋하게 뒤쫓는 남궁천은 당고륜이 했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망심독은 당장 효과를 발휘하지 않겠지만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를 지속하게 만드네. 특히 이해하기 힘든 현상을 본다거나 정신적 충격이 있을 때 효과는 극에 달하지.”

당고륜의 말대로라면 백묘는 지금도 이미 망심독의 영향을 받고 있을 터였다.

도망자가 악바리같이 굴어도 내심은 항시 불안증에 시달린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남궁천이었으니까.

‘거기에다가 귀신 놀음이라도 해준다면…….’

아마 멀쩡한 사람도 미칠 지경이 될 텐데, 망심독까지 먹었으니 오죽하랴.

‘그나저나…….’

유난히 몸이 가볍다.

경공도 상당히 빨라진 느낌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공이 빨라졌다기보단 경공을 펼쳐도 힘들지가 않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지나치는데도 유유히 걸으며 산책하는 기분이다.

신체의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용취곡에서 머무는 동안 뭔가 변화가 생긴 걸까?

아무 이유 없이 몸이 좋아지진 않았을 터.

달라진 게 있다면 용취곡에서 유독 천마신기를 자주 운공했다는 것뿐이다.

남궁천은 경공을 펼치면서 적혈마공을 운기해 보았다.

후우우우웅.

남궁천의 눈빛이 붉게 물들었다.

그의 신형이 전체적으로 붉은 잔상을 남기면서 쭉쭉 나아간다.

‘그럼 이번엔 다시 창벽공으로.’

후우우우웅.

붉게 물들었던 눈동자가 이번엔 푸른색으로 변했다.

역시나 남궁천의 신형이 바람처럼 나아간다.

‘이거 잘하면…….’

우우웅. 우우웅.

천마신기와 천뢰기를 동시에 운용해 본다.

단전이 뜨끔뜨끔하다.

천마신기는 극음의 기운이라 할 수 있고, 천뢰기는 극양의 기운이라 할 수 있다.

한데 이걸 동시에 운용하니 몸에 무리가 가는 게 느껴진다.

잠시 시도하던 남궁천이 곧 창벽공으로 몸을 다스렸다.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아직은 갈 길이 남아 있으나, 이걸 동시에 해낸다면 비약적인 성취가 있으리라.

흥미로운 관심사가 하나 생긴 셈.

‘그나저나 당 가주가 꽤 살뜰히 치료를 해준 모양이네. 지치지도 않고 잘 달리는군.’

남궁천이 나뭇가지를 박차면서 저만치 앞서가는 백묘의 뒤를 가만히 쫓았다.

* * *

백묘는 쉬지 않고 달렸다.

그녀가 지쳐갈 때쯤 이미 동녘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척!

마침내 경공을 멈춘 그녀가 무릎을 짚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헉……!”

언덕 아래로는 제법 큰 마을 전경이 펼쳐져 있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농사일을 하러 나가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부지런한 상인들도 저잣거리로 나와서 좌판을 깔기 시작했고, 만두를 찌거나 국을 끓이는 자들도 보였다.

“후우…….”

백묘가 허리를 펴고는 다시 한번 길게 호흡을 내쉬었다.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어느 정도 추격을 따돌렸으리라.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자신이 탈옥한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희망에 가깝긴 하지만.

어쨌거나 백옥 분타를 벗어나면서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던 것은 천운이었다.

‘우선은 마을에서 간단히 요기만 하자. 적당한 곳을 찾아 운기조식을 하고는 곧장 떠나야겠다.’

마음을 굳힌 백묘는 곧장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 어귀에 위치한 민가에 몰래 들러서 마당에 널어놓은 빨랫감을 걷어다가 갈아입었다.

그렇게 마을 저잣거리로 내려오니 어느새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제법 인파가 있었다.

백묘는 대충 주변을 둘러보다가 노상의 탁자에 앉아서 국수 한 그릇을 주문하고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국수 나왔습니다요!”

무심히 젓가락을 집어 들던 백묘가 흠칫거리고는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노리개를 파는 보부상과 오가는 행인만 보일 뿐이었다.

백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잘못 본 걸까? 방금 남궁천을 본 것 같았는데?’

아주 잠깐 스친 듯이 본 느낌이다. 한데 다시 확인하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애초에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인지, 헛것을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겠지. 그럴 리가.’

남궁천은 당가의 수면독을 먹고 곯아떨어지지 않았던가?

두드려 패도 깨지 않을 수면독이라고 했다.

한데 벌써 깨어나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을 리가 없다.

백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이마를 짚었다.

도망을 다니면서 예민해진 모양이다.

한숨을 내쉰 백묘가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허기가 졌던 터라 국수 한 그릇을 단숨에 비웠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니 점소이가 다가왔다.

“손님, 맛있게 드셨습니까요? 계산은 어떻게…….”

탁탁탁.

민첩하게 손을 놀려 점소이를 점혈한 백묘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외상이야.”

그렇게 훌쩍 몸을 날리려는데,

탁!

백묘가 움찔거리고는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점소이가 손을 뻗어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분명 마혈을 점했을 텐데!’

하지만 점소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 가게가 노상점이다 보니 외상은 안 됩니다요. 이리저리 옮겨 다니거든요. 헤헤.”

“너…… 어떻게…….”

“예?”

탁탁탁!

다시 한번 백묘가 손을 뻗어 점소이의 마혈을 점했다.

하나 이번에도 점소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제 몸을 두드리시는지?”

주춤……!

콰당탕!

저도 모르게 물러서던 백묘가 의자에 걸리면서 넘어졌다.

“이런, 괜찮으십니까요?”

점소이가 얼른 다가와서 부축하려고 하자 백묘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이것 놔!”

“저, 저어…… 손님 왜?”

“어딜 만져!”

백묘가 앙칼지게 소리치자, 점소이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저, 저는 아무것도…….”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이미 점소이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백묘가 몸을 휙 돌리더니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엇! 소, 손님!”

하지만 백묘가 멈출 리가 없었다.

그렇게 인파 속으로 빠르게 사라진 백묘는 저잣거리를 한참이나 헤매다가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헉, 헉, 헉……!”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어째서 마혈을 점했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생기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지금 너무 예민해진 상태야!’

입술을 질끈 깨문 백묘가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선 운기행공을 해서 공력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객잔에 들어가서 방을 빌려야 한다. 이후에는 창문을 통해 달아나면 될 일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객잔으로 가는 길에 소매치기를 해서 돈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침착하자. 실수해선 안 돼!’

마음을 다잡은 백묘가 다시 번잡한 저잣거리로 나섰다.

사람들은 아까보다 훨씬 많아졌다.

백묘는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옷차림새를 가만히 살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값비싼 옷을 입은 귀공자를 발견하고는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익힌 묘도보법(猫道步法)을 이용해서 귀공자로 보이는 사내의 뒤를 가만히 밟았다.

그리고 마침내 적절한 순간이 되었을 때, 마기를 끌어 올려 장삼 자락으로 손을 뻗었다.

날카로운 기운이 장삼을 베면서 소매에 있던 돈주머니가 툭 떨어졌다.

‘좋았어.’

백묘가 돈주머니를 품에 넣고는 잰걸음으로 귀공자로부터 멀어졌다.

묘한 희열마저 느껴진다.

원래 백묘는 이런 정도로 일희일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망자 신세가 되었기 때문일까?

하나하나의 성과에 기분이 오락가락한다.

물론 이것은 당가에서 제조한 망심독의 영향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백묘가 알 리 없었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인파를 헤치고 가는데, 어느 순가 그녀가 돌처럼 굳어서 우뚝 멈췄다.

그 바람에 다른 행인과 부딪치면서 거친 소리가 날아들었지만, 백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몸을 홱 돌리고는 한쪽 골목을 노려보았다.

“……!”

또 없다.

분명 남궁천이 저쪽에 서 있었던 것 같은데.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

만약 정말 남궁천이라면 사람이 이 정도로 신출귀몰할 수가 있단 말인가?

‘빌어먹을! 너무 예민해!’

마른침을 꿀꺽 삼킨 백묘가 어금니를 꾹 씹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다시 빠르게 걸음을 놀려 조금은 한적한 곳에 위치한 객잔으로 들어섰다.

“조용한 방 하나.”

“예, 예, 손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요!”

점소이가 신바람이 나서 백묘를 데리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점소이가 방을 안내해 주고는 손을 비비며 말했다.

“저어, 손님. 요즘 그냥 튀는 놈들이 많아서 그런데…… 선불이 가능할깝쇼?”

“얼마지?”

“닷 냥만 주십쇼.”

백묘가 돈주머니를 풀고는 은자를 꺼냈다. 그런데 돈주머니 안에 웬 종이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점소이가 돌아간 후 백묘는 침상에 걸터앉아서 돈주머니에 들어 있던 종이를 꺼내 보았다.

종이를 펼쳐 보니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진짜 천마가 지켜보고 계신다.]

“……!”

화들짝 놀란 백묘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밖을 살피는데 마침 저만치 남궁천이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게 아닌가?

‘진, 진짜 남궁천이……?’

눈을 휘둥그레 뜬 백묘가 창틀을 밟고 몸을 날리려는데, 마침 등 뒤에서 점소이 목소리가 들렸다.

“손, 손님? 돈도 다 내셔놓고 왜……?”

“다시 올 거야.”

말을 남긴 백묘가 얼른 몸을 날려 남궁천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남궁천은 어느새 골목을 끼고 돌면서 사라졌다.

백묘가 빠르게 남궁천의 뒤를 추격했다.

그렇게 골목으로 들어서자 남궁천의 뒷모습이 저만치 보였다.

‘잡았다!’

백묘는 빠르게 달려가서 남궁천의 어깨를 낚아채고는 홱 돌리며 소리쳤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헉, 뭐, 뭐요?”

당황한 사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소리쳤다.

백묘도 당황하긴 마찬가지.

분명 남궁천이지 않았나?

한데 옷차림과 얼굴이 조금 닮았을 뿐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래?”

“글쎄, 저 여자가 저 남자를 홱 낚아채던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바라본다.

시선이 집중되자 불편해진 백묘가 얼른 걸음을 옮겼다.

“이, 이보시오! 실수를 했으면 사과를 하든가!”

사내가 소리쳤지만 백묘는 입술만 잘근 깨물 뿐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신경이 과민한 상태다.

‘내가 자꾸 왜 이러지? 빨리 돌아가서 운기행공을 해야 해.’

그간 지나친 고행으로 인해 심신이 지친 상태인 것이리라.

잠이 부족한 것도 원인일 테고.

뒤숭숭한 마음을 추스르고 객잔으로 돌아오니, 마침 점소이가 침상에서 침구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 오셨군요. 볼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요?”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가.”

“예에, 예. 숙면이 필요하실 것 같아서 베개를 좀 더 좋은 것으로 가져다 드렸습니다요.”

“뭐?”

“오늘 하루 종일 까칠하셨잖아요. 도망 다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잠깐. 네가 그걸 어떻게? 너 누구지?”

백묘가 성큼성큼 걸어가서 점소이의 어깨를 잡고 홱 돌렸다.

빙글 돌아선 점소이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누구긴. 본좌는 천마라고 하지 않았느냐?”

“……!”

남궁천의 얼굴을 확인한 백묘가 온몸이 굳어버리더니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어, 어떻게…… 여기에……?”

“본좌는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네가 있는 객잔, 네가 걷는 저잣거리, 네가 국수 먹는 노상점, 그리고 너의 마음속까지. 본좌가 신이다.”

“말, 말도 안……! 컥!”

정신적 충격을 받은 백묘가 기혈이 뒤틀리면서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털썩 쓰러졌다.

입에 거품까지 물고 쓰러진 그녀를 보면서 남궁천이 혀를 찼다.

“쯧…… 이리 신앙이 약해서야. 하나 걱정 마라. 본좌는 길 잃은 양을 친히 보살피니까.”

남궁천의 입매에 얄궂은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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