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 풍전등화
“맹주. 지금이라도 진심 어린 충고를 하겠소. 나는 남궁세가에 아무런 원한이 없소. 단적으로 남궁세가가 몰락할 때도 우리 곤륜은 그 어떠한 모함도 하지 않았소. 그건 알고 계실 거요.”
“하여?”
남궁검이 나직이 되묻자, 청풍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의 과오는 전부 덮어주도록 하겠소.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법.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걸음을 돌리시오. 이대로 황산으로 돌아간다면 무림맹은 당신에게 어떠한 죄도 묻지 않을 거요.”
피식.
남궁검이 실소를 흘리자, 청풍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찌 웃소?”
“이런 상황이 웃겨서 웃었네.”
“상황이 웃겨서?”
“노부가 살면서 이렇게 개가 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은 처음이라서 말일세.”
“맹주, 입이 거칠어지셨군. 과거에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워낙 잘난 손자를 둔 덕에 나도 많이 변한 것 같네.”
“기어이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는 거요?”
청풍의 목소리에 은근한 노기가 서렸다.
범인이라면 그런 그를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살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나 남궁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되물었다.
“이왕 들은 개소리니까 마저 들어보지. 본 맹이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죄를 운운하는가?”
“흥! 정녕 모르고 하는 말이오? 신성한 무림맹에 사파 나부랭이들이 들어와서 눌러앉은 것부터가 문제 아니요!”
“새삼스럽군. 연회 때까지만 해도 일절 문제 삼지 않더니.”
“물론 그땐 지켜만 보았소! 내가 모를 줄 아시오? 그 썩어빠진 사파 나부랭이들과 화친을 맺은 것은 사실 당신이 맹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위한 것이 아니오? 어디 손잡을 데가 없어서 더럽고 천한 흑무련 따위와 결속을 맺는단 말이오? 백번 양보해서 진정 마교를 쓰러뜨리기 위한 수단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오물보다 못한 것들과 손을 잡느니, 차라리 똥물을 퍼 마시고 말겠소!”
신랄한 비난에 남궁검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청풍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하아, 거 듣자듣자 하니까 말씀이 좀 심하시네.”
어디선가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사람들이 눈길을 던진 곳은 청풍이 올라선 전각 맞은편이었는데, 역시나 지붕 위에서 두 사내가 달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바로 여신우와 혈검단주 백시랑이었다.
백시랑이 입에 뭔가를 물고 ‘삐익!’ 소리를 내자, 붉은 무복을 갖춰 입은 혈검단원들이 그 아래쪽 골목을 빼곡하게 채우며 나타났다.
여신우가 팔짱을 척 끼며 말했다.
“어지간하면 남의 밥그릇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야. 그런 쌍욕보다 심한 모욕을 들으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뭐? 우리와 손을 잡느니 똥물을 퍼 마셔? 어디 줘 터지고 나서 피똥 싸고 퍼 마셔 보시던가?”
여신우가 으르렁대자 청풍이 미간을 좁히고는 싸늘하게 일렀다.
“부련주. 이 싸움에 끼어들 생각인가?”
“그쪽이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 강호에서는 말 한마디에 목숨이 오간다고. 왜? 막상 오물보다 못한 사파 나부랭이들이 나타나니 쫄리시는가?”
여신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혈검단원들이 살벌한 기운을 거세게 뿜어냈다.
청풍이 코웃음을 쳤다.
“흥! 가소로운. 네깟 놈들이 합류한다고 해서 전세가 달라질 거라고 보느냐? 오냐, 차라리 잘됐다. 이참에 너희 역겨운 사파 놈들도 다 쓸어 버려주마.”
“라고 하신다. 듣고만 있을 거냐?”
여신우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혈검단원들이 살기를 피워 올리며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껏 상황만 지켜보던 정혜 사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 같으니! 저 어리석은 것들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내려라!”
“옛!”
아미파 비구니들이 일제히 대답하더니 밤새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혈검단원들도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며 마주쳐 갔다.
여신우가 백시랑을 보며 말했다.
“애들 잘 이끌고. 모처럼 몸 좀 풀어보자고.”
“복명!”
대답을 마친 백시랑이 지붕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곧이어 정혜 사태가 뛰어내리는 것을 본 여신우가 얼른 몸을 날려 곧장 정혜 사태를 향해 화살처럼 달려갔다.
파바바바밧!
쉬따앙!
불꽃이 일어나면서 청명한 금속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촤츠츠츠츳!
두 사람이 동시에 멀어졌다.
콰가가각!
정혜가 삽처럼 생긴 방편산을 땅에 거꾸로 박아 넣으면서 몸을 멈춰 세웠다.
여신우 역시 천근추의 술법을 이용해서 몸이 밀려나는 것을 막아냈다.
정혜가 방편산을 바닥에서 뽑아 들고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노옴!”
“할멈, 귀 안 먹었소. 요즘 아미파 비구니들은 목소리 큰 걸로 싸우시오? 하긴 그게 어울리기도 하지만.”
“이 천박한!”
파앙!
방편산을 디딤 축 삼아 몸을 튕긴 정혜가 바람처럼 날아갔다.
후우우우웅!
어둠을 가르며 떨어진 방편산이 조금 전까지 여신우가 서 있던 바닥을 그대로 때렸다.
따아아아앙!
얼핏 보면 여신우가 무난하게 피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 이 공격의 핵심은 그 직후에 일어날 일이었다.
파콱!
바닥을 때린 방편산이 그대로 흙더미를 퍼 올리며 주변으로 흩뿌렸다.
촤아아악!
“칫!”
여신우가 얼른 팔로 얼굴을 가리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자칫 흙먼지가 눈에 들어갈 뻔한 위기를 모면한 그가 손으로 허공을 한 차례 휘젓고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보통 스님들은 수양 다니다가 길에서 발견한 시체를 묻어주고 염불이나 외려고 삽을 들고 다닐진대, 할멈은 이딴 식으로 무기처럼 휘두르는구려.”
“흥! 네 말이 왜 아니겠느냐? 아직도 모르겠느냐? 여기가 네놈의 시체가 묻힐 장소라는 것을? 이 삽은 네놈의 무덤을 파는 중이다!”
말을 마친 정혜가 다시 한번 바닥의 흙을 퍼 올리더니 그대로 여신우를 향해 부딪쳐 왔다.
퍼콰콰콰!
이리저리 휘둘러지는 방편산 때문에 주변이 온통 흙먼지로 자욱했다.
“니미럴, 정말 더럽게 싸우네!”
“네깟 놈들이 할 말은 아니지!”
“이런 흙장난에 비하면 본 련의 사술은 세련된 편이지!”
“닥쳐라! 네놈을 묻어줄 흙이다!”
“거, 할멈 성격이 괴팍해서 오래 살기는 글렀소!”
두 사람은 어지럽게 공방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서로에 대한 욕설과 인신공격이 끊이지 않았다.
만약 이 모습을 류난이나 총군사 지강이 보았더라면 여신우다운 싸움이라며 놀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이 악에 받쳐 서로에게 살공을 퍼붓는 사이, 남궁검과 청풍도 치열한 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떠어어어엉!
두 사람의 검이 서로 부딪치면서 기파가 사방으로 훅 불어나가자 주변의 기왓장이 다르르 떠는 소리를 내질렀다.
촤아아앗!
대여섯 장 미끄러진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향해 포탄처럼 날아갔다.
쒜에에에엑!
쩡! 쩌정!
검이 부딪칠 때마다 천둥벽력 소리가 울린다.
기파가 어찌나 센지 창문이 덜컹거리고 기왓장 몇 개는 부서지며 날아간다.
두 사람의 기운에 휩쓸린 무인들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경우마저 생기다 보니 자연스레 주변으로 접근하는 자들이 없었다.
확실히 무림칠성에 오른 자의 무공은 달랐다.
“맹주, 그 사이에 성취가 있었나 보군!”
쩌정!
“살아 숨 쉬는 이상 하루하루가 성취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흥! 겸손인지 자만인지 모를 말이로군!”
쩌엉!
검이 부딪치면서 멀찍이 튕겨 나간 청풍이 전각 벽을 박차면서 다시 날아왔다.
놀랍게도 그는 허공에서 방향을 직각으로 비틀었는데, 바로 운룡대구식에 그만의 독문경신법을 녹여낸 수법이었다.
파바바바바밧!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빠른 몸놀림에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호흡에 집중했다.
‘눈으로 좇으려 해서는 안 된다. 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느껴야 한다.’
그렇다고 눈을 감지는 않는다.
그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단서로 삼으면 된다.
흩날리는 흙먼지도 적의 위치를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신경을 둔다.
휘이이이잉!
마침 바닥에서 흙먼지가 풀썩 일어난다.
좌측!
판단을 내린 남궁검이 몸을 뒤트는 것과 동시에 검을 내질러 갔다.
쉬이이이잇!
촤아아아악!
청풍이 내지른 검과 남궁검이 내지른 검이 서로의 소맷자락을 길게 찢어내며 어깨를 찔러갔다.
이대로면 두 사람 모두 겨드랑이를 검에 찔릴 수밖에 없는 상황!
파라라라라라!
순간 두 사람이 허공에 누운 상태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몸을 회전하면서 멀어졌다.
펄럭, 펄럭!
길게 찢어진 남궁검의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한편 청풍은 눈을 부릅뜨고는 자신의 팔을 보았다.
‘이건……!’
남궁검의 옷자락은 소매부터 어깨까지 길게 찢어져 있었다.
한데 자신이 입은 옷은 소매부터 어깨까지 남은 것이 없다. 갈가리 찢어져서 바람에 흩날린다.
‘언제 이렇게까지 성취를……!’
남궁검이 대단한 무인이긴 하다.
하나 무림칠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데 이젠 자신과 호각을 다툴 정도가 아닌가?
찌이이이익!
남궁검이 오른쪽 어깨에 매달려 펄럭이는 장삼 자락을 거칠게 찢어내고는 휙 집어 던졌다.
밤하늘로 나풀나풀 날아가는 옷자락을 보면서 청풍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이러면 생각보다 까다로울지도…….’
처음으로 이 전투가 쉽게 끝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궁검을 과소평가했다.
남궁천만 없다면 빈집털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건만.
의외의 복병이 나타난 셈이다.
게다가…….
‘대체 우 원주는 뭘 하는 것이야!’
지금쯤 내원이 시끄러웠어야 한다. 그래서 남궁검이 외원으로 나오지도 못하거나, 나왔더라도 내원이 신경 쓰여서 집중을 못해야 한다.
한데 내원이 너무 조용하지 않나?
또 하나.
‘덕양은 뭘 하고 자빠진 것이야!’
무당에서도 협조하기로 해놓고선 덕양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와서 발을 뺄 리는 없을 텐데.
‘흥, 차질 없는 계획이란 없는 법이겠지.’
상관없다.
이미 거사는 시작됐다.
이 정도 난관에 부딪혀서 굴복할 것 같으면 시작하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남궁검이 강하긴 하나 꺾으면 그만이다.
“스으읍, 후우우우우!”
청풍이 심호흡을 하고는 검을 고쳐 쥐었다.
그의 표정에서 방심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맹주. 이제부터 진지하게 임하겠소. 각오해야 할 거요.”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흥! 그 말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청풍이 바닥을 차고 달려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진척이 없구려.”
문득 옆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속삭인다.
한데 목소리의 주인은 저만치 뒤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내공을 이용해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음성을 전한 것이다.
남궁검도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는 긴장을 다졌다.
“덕양…….”
무당파의 덕양진인.
어쩐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모습을 드러냈다.
휘리리리릭!
바람처럼 사뿐하게 날아와서 전각 위에 멈춰 선 덕양이 뒷짐을 진 채 아수라장이 된 주변을 살폈다.
그가 알몸으로 나뒹구는 청성파 무인들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이 생각보다 순조롭지 못한가보오.”
“지각한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소.”
청풍이 날을 세워 답하자, 덕양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게 됐소. 내가 조금이라도 늦게 나타나야 장문인께서 공을 더 세울 거라고 생각했소이다.”
묘한 말이었다.
상대를 배려한 것처럼 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경이 된 것에 대해 질책하는 듯하다.
청풍이 어금니를 꾹 깨무는데, 덕양이 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그래도 맹주를 외원으로 끌어낸 것은 좋구려.”
“맹주에게 성취가 있었던 것 같소. 빠르게 끝내는 게 좋겠소.”
“물론이외다. 빈도는 아이와 비무를 해도 최선을 다하오.”
후우우우웅!
순간 덕양의 전신에서 뜨끈한 기운이 사방으로 불어갔다. 그 바람에 그가 입은 장삼 자락도 크게 부풀었다.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여몄다.
‘무림칠성이 둘이라. 난감하게 됐군.’
한편 내원 정문 담벼락 위에서는 시커먼 까마귀 한 마리가 녹빛 눈알을 빛내며 그 광경을 빤히 살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