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 풍전등화
청성파 문도들은 충격으로 온몸이 굳어버렸다.
자신들이 따르는 정극진인이 이렇게 단 일격에 당할 줄 누가 알았겠나?
정극진인은 무림칠성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당히 구파일방에 속하는 청성파 장문인이었다.
어딜 가서 무위가 약하다고 얕보일 일은 없는 인물이었다.
한데 단 일검에 옷이 갈가리 찢어지고 저런 추태를 보여 버리다니.
모르긴 해도 남궁검의 경지가 무림칠성에 준하는 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있을까?
그렇다고 두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도 없는 법.
장문인이 저런 수모를 당했으니, 문도들이 어떻게 해서든 나서야만 했다.
특히 지금 이대로면 정극이 남궁검의 손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닌가?
“장문인!”
“맹주! 멈추시오!”
몇몇 충성스러운 문도들이 고함을 버럭 내지르면서 남궁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것을 신호로 다른 문도들도 일제히 몸을 날리면서 남궁검을 덮쳐갔다.
“감히 어딜 나서!”
순간 백무극이 앙칼지게 외치면서 남궁검 앞을 막아섰다.
까강! 깡깡!
순식간에 문도들과 백무극이 어울리면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워낙 많은 인원이 달려드니 백무극이 모든 사람을 막아내기는 무리였다.
몇 명의 문도들이 남궁검에게 짓쳐들었고, 마침 남궁검은 자신을 향해 일검을 내질러 오는 무인을 보고는 몸을 슬쩍 비틀었다.
쉬이이익!
남궁검의 눈앞으로 검신이 지나쳤다. 어두운 공기를 가르며 지나가는 검신의 형상이 자세히 보인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다.
타닷.
남궁검은 자연스럽게 보법을 밟으면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검을 사선으로 베어 올렸다.
쉬이이이잇, 촤아아악!
“끄아아아악!”
남궁검의 검이 정확히 상대의 등을 가르자, 옷자락이 절반으로 나뉘면서 찢어졌다.
남궁검은 쓰러지는 상대를 보며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나이는 남궁천보다 열 살 정도 많을까?
이렇게 검을 섞고 보니 새삼 남궁천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아비의 특별한 재능과 어미의 무재를 타고났으니 오죽하겠나?
‘천아, 이 할아비가 널 참으로 모르고 있었구나.’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청성파 문도들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남궁천의 얼굴이 떠오른다.
남궁검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도 손자인 남궁천을 계속 떠올렸다.
‘너는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내 삶은 너로 인해 달라졌다’
따지고 보면 남궁세가의 몰락과 재기가 모두 남궁천과 관련이 있다.
문득 남궁천의 일침이 떠오른다.
남궁세가가 몰락한 것은 세상 탓이 아니라, 남궁세가 스스로 그것을 받아들인 탓이라고.
약관도 채우지 않은 아이가 세가의 어른들을 앞에 두고 살벌한 표정으로 말을 토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느꼈던 분노가 다시금 아랫배에서 끓는 듯하다.
그 분노는 남궁천을 향한 게 아니다.
남궁검 스스로에게 향한 것이다.
남궁천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그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자신은 무엇을 했던가?
그저 침묵했다.
남궁천이 어린 시절 위축된 모습을 보이면 한심하다며 나무랐다. 하나 스스로 위축되어 있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했다.
촤아아아악!
다시금 날카로운 소리에 이어 비명이 치솟았다.
“크아아악!”
나가떨어지는 적을 무정한 눈빛으로 보던 남궁검이 몸을 휙 돌렸다.
후우우우웅!
그의 전신에서 살벌한 기운이 훅 뻗어 나가자,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청성파 무인들이 헛바람을 삼키며 주춤거린다.
“헉!”
“이익……!”
미간을 좁힌 남궁검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지더니, 스산한 목소리를 흘린다.
“오너라. 너희들 중 그 아이만큼 강단이 서 있다면, 내 명예로운 죽음을 주리라.”
살의를 품은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상대의 의지를 존중하겠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스으읍, 후우우우!”
남궁검이 길게 내뿜는 숨결이 허공에서 얼어붙는 것만 같다.
곧이어 남궁검이 쥔 검신에 형형한 강기가 맺혀간다.
위이이이이잉!
검신이 공명하면서 울음을 내지른다.
주춤주춤……!
꿀꺽……!
남궁검을 포위했던 무인들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멈칫거렸다.
남궁검의 기세에 눌리긴 했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는 법.
마침 무인 중 하나가 목청이 찢어져라 외쳤다.
“뭐, 뭣들 하는가! 쳐라앗!”
일순 무인들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면서 남궁검에게 몸을 던져갔다.
“하아앗!”
“가소로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중얼거린 남궁검이 그대로 검을 휘두르며 마주쳐갔다.
깡! 촤아아악! 까강! 촤촤아아악!
일검에 금속성이 울리고, 일검에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남궁검의 신형은 그야말로 귀신처럼 신묘하게 움직였다.
‘겨우 이 정도란 말인가? 그 아이에게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는구나.’
남궁검은 일검에 자신의 과거를 지워갔다.
남궁천을 믿지 않았던 자신을.
촤아아악!
남궁천을 아끼지 않았던 자신을.
퍼어어억!
남궁천을 돌아보지 않았던 자신을.
“끄아아아악!”
그렇게 남궁검은 자신을 하나씩 지워갔다.
그리고 다시 남궁천이 펼쳐 나갈 미래를 떠올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다.
그 아이가 걸어가는 길에 피가 흘러야 한다면, 앞장서서 혈로를 만들어주리라.
촤아아아악!
“크아아악!”
그 아이가 걸어갈 길에 냉정한 결단이 필요하다면, 이젠 망설임 없이 일검을 내지를 것이다.
촤아아악!
“아아악!”
어느샌가 남궁검의 마음에는 남궁천으로 가득 찼다.
무아지경 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남궁검은 가슴으로 남궁천과 대화를 나눴다.
‘나는 어느새 너에게 익숙해졌구나. 조손지간이 그런 모양이다. 네가 나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덧 내가 너를 닮아가는 것.’
때마침 무인 하나가 이를 악물며 날아들었다.
“이익, 지독한!”
하나 남궁검은 무심한 표정으로 일검을 휘둘렀다.
쉬이이이익!
촤촤촤아아아악!
‘그래, 이것이 세상의 이치리라. 옛것이 새것을 닮는 것. 그것이 진정 건강한 세상일 터.’
휘리리리릭!
촤촤아아아악!
허공을 돌개바람처럼 회전했던 남궁검이 마침내 반원을 그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천천히 검을 갈무리한 그가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저기에서 앓는 소리가 난무한다.
더 이상 그에게 달려드는 적은 없었다.
대신 청성파 무인들이 저마다 몸을 둥글게 말고 흐느끼고 있다.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흑흑……! 수치스러워!”
“차라리 죽이시오! 맹주!”
“정말이지 죽고 싶어. 크흡!”
다들 옷자락이 갈가리 찢어져 알몸이 되었다.
남궁검의 입매가 슬쩍 비틀렸다.
‘천아, 어느새 나는…… 너를 닮아버렸구나.’
* * *
“저 영감님,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더니, 어지간히 손자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야.”
지붕에 걸터앉은 여신우의 말에 백시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런 식으로 싸우는 건 남궁천에게 딱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죠. 애정을 품으면 닮는다더니. 후후.”
“뭐, 재미있네. 맹주가 앞뒤 꽉 막힌 인간인 것보다 저 정도의 장난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하고 말이 통하겠어.”
“그러니까 화친도 맺은 것 아닙니까?”
“화친은 남궁천의 계략에 넘어간 셈이고.”
“그래도 전 나쁜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이런 좋은 구경도 할 수 있고요.”
“그건 그렇지. 역시 남의 집 밥그릇 싸움이 제일 재미있다니까. 생각보다 남궁검 맹주의 무위가 상당하군. 최근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인지 알려진 것보다 더 대단해. 이 정도면…….”
“역시 무림칠성급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에 준한다고 봐야겠지.”
여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 무림칠성께서 등장하는군요.”
“호오,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되네. 옥수수라도 튀겨놓을 걸 그랬어. 이런 볼거리는 흔치 않은데 말이야.”
“말씀만 하시면 지금이라도 튀겨 오겠습니다.”
“됐어. 식객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자고.”
여신우가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저만치 달려오는 청풍과 정혜에게 향했다.
* * *
백무극이 상대한 무인들은 저마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거나 심각한 검상을 입어서 재기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결국 목숨을 잃은 자들도 있었다.
온통 피에 젖은 백무극이 거칠게 호흡을 내쉬고는 남궁검 곁으로 다가왔다.
“훅, 훅, 후욱! 영감, 이놈들은 어떻게 처리할까?”
피투성이가 된 호신위가 느닷없이 반말을 찍 내뱉자, 알몸이 된 청성파 무인들이 오히려 당황한 얼굴로 남궁검의 눈치를 살폈다.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여미고는 백무극을 돌아보았다.
“넌…… 일극이냐?”
“아…… 죄송합니다. 방금은 일극입니다. 앞으로 자제시키겠습니다.”
“흐음. 이들은 맹에 반기를 든 자들이다. 강호 평화를 위협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맹을 어지럽힌 자들이지.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터. 살려둔다고 한들 복수를 운운하며 다시 찾아올 것이다. 처리해라.”
남궁검의 입에서 이처럼 칼날 같은 대답이 나올 줄 몰랐기에 청성파 무인들도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만 백무극은 남궁검의 결정이 마음에 드는 듯 히죽 웃었다.
“좋소! 역시 영감탱이가 뭘 좀 아네!”
“너…….”
“죄송합니다. 일극이 또 마음대로.”
남궁검이 눈살을 슬쩍 여미고는 언젠가 남궁천이 했던 생각을 똑같이 떠올렸다.
이 새끼…… 일부러 그러는 건가?
하지만 어수룩한 백무극의 표정에서 고의성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어쨌거나 백무극이 검을 뽑아 들고는 알몸이 된 청성파 무인들을 제거하려고 할 때였다.
“허허허. 맹주께서 이런 악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소!”
굵직한 목소리가 허공에 쩌렁쩌렁 울렸다.
남궁검과 백무극이 돌아보니 곤륜파 장문인 청풍진인이 옆 전각 지붕 위에 서 있었다. 그 곁에는 아미파의 장로인 정혜 사태도 함께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이 이끄는 문도들도 그 아래의 골목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스윽!
백무극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고는 남궁검 앞을 막아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본 청풍이 껄껄 웃었다.
“아이야, 네깟 녀석이 노부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
“후후. 왜 말이 없느냐? 한창 성장해야 할 나이에 이런 위기에 닥쳤으니 너의 운명도 가상하구나. 내 너에게는 특별히 기회를 줄 테니 달아나고 싶으면 달아나도 좋다. 아니면 네 뒤에 있는 늙은이의 목을 직접 따도 좋고. 남궁 가주는 맹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권력을 장악하고 여러 조직을 무리하게 개편하면서 사리사욕을 채웠다. 네가 남궁 가주의 목을 벤다면 영웅의 칭호가 붙을 게다.”
“…….”
“말이 없는 걸 보니 갈등하고 있는 게냐?”
그제야 백무극이 남궁검을 슬쩍 돌아보았다.
남궁검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백무극이 돌연 가래침을 뱉는 게 아닌가?
“카아아아악, 퉤! 염병할, 살다 살다 별 개 같은 소리를 다 들어보겠네. 어이, 영감탱이! 변방에서 요양이나 할 것이지, 뭐 좋은 구경났다고 여기까지 기어 나오셨을까? 어엉? 권력에 미친놈이 누군데? 멀쩡한 맹을 습격해 놓고 그딴 망발을 지껄이시나?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었어? 밥을 똥구멍으로 처먹고, 입으로는 똥을 싸지르는군!”
“…….”
백무극의 살벌한 말투에 청풍이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남궁검이 피식 웃고는 한 걸음 나섰다.
“이 아이가 좀 독특하오. 뭐, 그래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니 청풍은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오.”
“맹주…… 정녕 어려운 길을 가시려는 거요? 당신 혼자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소? 그간 손자 덕을 보면서 그 자리까지 오더니, 작금의 상황이 어떤지 분별이 안 되시오?”
“흐음. 그런 당신은 내 손자가 그리 무서워서 적랑단이 부재한 사이에 습격을 한 것인가?”
“뭐라?”
“아무래도 좋지. 보다시피 내가 손자에게 악취미를 배워서, 당신에게도 한번 써보고 싶군. 당신 반응은 어떨지 궁금해지는데.”
남궁검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 *
그 시각 용취곡 적마동.
“에에엣취!”
시원하게 재채기를 한 남궁천이 귀를 후볐다.
“아아, 누가 내 칭찬을 하나? 왜 자꾸 재채기가…… 에에엣취! 손 대주, 여신우한테 빌린 것 좀 가져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