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 이것이 신앙이다
쿠르르르……!
돌더미 하나를 무인 몇 명이 달려들어 옮겨내고 나자 마침내 너른 통로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연추량을 비롯한 비월문도들이 횃불을 밝히고는 그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갔다.
꽤나 길게 이어진 통로를 한참 따라 들어가자 너른 공간이 나타났는데, 그곳에는 석관이 가득 놓여 있었다.
그리고 관마다 고약한 냄새가 풍겼는데, 돌판을 힘주어 밀어보니 그 안에 시뻘건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게…… 마신액이라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지독한 놈들. 이곳에 사체를 넣어서 아흐레 동안 가공을 한 다음에 단전을 도려냈다지?”
“예, 마신액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무인의 사체를 이곳에 집어넣고 아흐레가 지나면 단전에 사리처럼 구슬이 생긴다더군요.”
“그걸 마기환(魔氣丸)이라고 부르고.”
“그랬지요.”
무인 하나가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연추량은 어금니를 꽉 씹고는 주변을 차가운 눈길로 둘러보았다.
정말이지 악랄한 놈들이 아닌가?
석관은 다섯 개씩 열 줄로 이루어져 있어 총 쉰 개.
한 번 마신액을 사용하여 시체를 가공하고 나면 다시 약품을 넣고 정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기간이 스무하루.
결국 마기환을 한 차례씩 만들어낼 때마다 한 달이 꼬박 걸리는 셈이었다.
영물에서 내단을 꺼내듯, 사람의 단전을 마기환의 형태로 꺼내는 것이다.
언제부터 이런 짓을 해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쉰 개나 되는 마기환을 한 달마다 찍어냈다면 상당한 양이 되리라.
“마기환은 교주만 복용할 수 있다던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마인이라면 누구라도 마기환을 소화할 수는 있다고 합니다. 다만 영물의 영단과는 성격이 다른 만큼 각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그 과정에서 주화입마에 빠질 가능성도 크다더군요.”
“용취곡에 이런 일을 벌이는 마교 분타가 있었을 줄이야. 남궁천 단주가 용케도 잘 찾아냈구나.”
“이젠 뭐 별로 놀랍지도 않긴 합니다.”
“하긴. 적혈마를 제 수족처럼 부릴 정도니 오죽할까? 정말이지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나대는가 했었지.”
무인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때의 기억이 납니다. 정말 어디서 그런 되바라진 망나니 같은…….”
무심코 말을 뱉던 무인이 조금 지나쳤다 싶었는지 헤실헤실 웃는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아무튼 지금은 그저 적으로 만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네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
연추량이 껄껄 웃으며 동조했다.
사실 웃음이 나오지 않는 전경이었다.
여기 석관에 무고한 사람 쉰 명이 교주에게 바쳐질 제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남궁천을 화제로 삼아서 기분을 환기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이 무거운 공기와 끔찍한 장소의 기운에 눌려서 기분이 끝없이 가라앉을 것만 같았기에.
* * *
“끄으음.”
적혈마는 긴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좋은 꿈이었다.
천마의 품에서 칼춤을 추는.
그간 가짜 천마 행세를 하는 것들이 자신의 검에 스러져 가면서 환희를 느끼는 꿈이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눈을 떴는데, 뒤늦은 통증에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끄읍!”
“괜찮아, 괜찮아. 몸에서 나쁜 게 빠져나갔다고 생각해.”
귀에 익은 목소리.
하지만 아직은 조금 낯설고 경박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남궁천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잘 잤어?”
“아…… 천마시여.”
“그래, 그래. 고생 많았다. 네 몸에서 혈마고를 빼냈다.”
남궁천이 말을 뱉는 것과 동시에 젓가락으로 뭔가를 집어서 불쑥 내밀었다.
코앞까지 내밀어진 것을 본 적혈마가 화들짝 놀라면서 후다닥 물러났다.
“으흐어억!”
눈을 잔뜩 찡그리며 바라본 젓가락 끝에는 핏빛 애벌레처럼 생긴 혈마고가 연신 꿈틀거리며 몸을 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자니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저, 저런 게 내 안에 있었다니……!’
적혈마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남궁천이 낄낄거렸다.
“그러고 보면 참 웃기단 말이야. 사람 목숨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던 녀석이 그깟 애벌레 한 마리 보고 그리 기겁을 하나?”
“커흠, 흠. 죄송합니다.”
뒤늦게 자신의 추태를 사과하고 나니 가슴께의 통증이 다시 묵직하게 전해졌다.
지금 보니 가슴에는 손가락 길이 정도로 상처를 꿰맨 흔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곳으로 혈마고를 빼낸 모양이었다.
“끄으응.”
“엄살은.”
짜악!
남궁천이 등짝을 한 대 후려치자, 적혈마가 쿨럭 기침을 토하면서 피를 게웠다.
“으으으……!”
정말이지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고통이었지만, 혹여나 천마가 노여워하거나 실망할까 봐 내색도 하지 못하는 적혈마였다.
이래봬도 자신은 천마의 총애를 받는 좌마사가 아닌가?
“아무튼 기분이 어떠냐? 자유의 몸이 된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혈마고를 빼낼 수 있을 줄이야.”
“내가 뭐라고 했느냐?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고 하지 않았느냐?”
“감사합니다, 천마시여!”
“뭐,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네가 다시 먹어야 할 게 있다.”
“제가 다시 먹어야 하는……?”
“그래, 바로 이거다.”
남궁천이 당고륜으로부터 받은 화낙단을 불쑥 내밀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목함이었는데, 덮개를 열어보니 그 안에 비단이 곱게 깔려 있었고 황금빛 단환이 놓여 있었다.
척 보기만 해도 예사롭지 않은 단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 * *
적혈마가 깨어나기 반 시진 전.
“이것이 바로 본 가의 화낙단이라는 것일세.”
당고륜의 말에 남궁천이 대답했다.
“만개한 꽃처럼 피었다가, 한 떨기 꽃잎처럼 저버린다는 뜻이군요.”
“잘 이해했네.”
당고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낙단.
독과 암기에 뛰어난 사천당가가 포로를 잡으면 복용시키는 독단이다.
이 영단의 특징은 공력을 사용하게 되면 선천지기까지 끌어내어 그 힘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한다.
선천지기를 끌어내는 만큼 일시적인 무위는 상승하겠지만, 대신 수명이 대폭 단축된다. 하여, 화낙단을 복용한 자는 오래 산다고 해도 십 년을 넘기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것도 본 가에서 제공하는 유생단(維生團)을 한 달에 한 번씩 복용한다는 조건에 한해서지.”
“그걸 복용하지 않으면 죽습니까?”
“사흘 안에 죽네.”
“과연 포로를 일시적인 자원으로 부리기에는 꽤 좋군요. 그럼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거둔 자들로만 구성된 조직이 있습니까?”
“물론일세. 본 가의 자혈단(自血團)이 그렇네. 총원 스무 명으로 유지되는 중일세.”
“그렇군요. 하면 적혈마도 제가 화낙단으로 관리해도 되겠습니까?”
“새삼스럽게 뭘 묻고 그러는가? 얼마든지 말씀하시게. 자네는 이제 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네. 만약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진즉 관속에 들어갈 신세였겠지. 본 가는 은원 관계가 확실하다는 것을 자네는 알 걸세.”
“감사합니다.”
남궁천이 포권을 하며 답례했다.
* * *
남궁천의 설명을 들은 적혈마가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어음…… 저어…… 그러니까 이것이…… 마혼단(魔魂丹)이라는 말입니까?”
“그렇다. 영광이지?”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걸 먹으면 천마혼의 은혜를 입어 공력이 대폭 증가하게 되고, 대신 선천지기를 조금 소모하게 되어 수명이 줄어들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지. 역시 이해가 빠르군.”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한 달이 지나면 마생단(魔生丹)이라는 걸 먹어줘야만 하고, 그걸 복용하지 않을 시에는 사망이라는…… 거죠?”
“바로 그렇지.”
“음…….”
“왜?”
“그러니까 혈마고를 빼내고 이걸 먹으라는 말씀 맞죠?”
“아니, 같은 말을 왜 자꾸 반복하게 만들어? 내가 너에게 자유를 줬는데, 그 정도도 못하겠느냐?”
“그건 아닙니다만…… 혈마고나 마혼단이나…… 뭔가 조삼모사…….”
“어허!”
남궁천이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꾸짖었다.
“너의 신앙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 기껏 벌레 새끼와 정성스럽게 빚은 마혼단을 비교하다니. 네놈이 정녕 천마혼의 저주에 걸려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냐?”
“죄송합니다, 천마시여!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그러니 아아, 해봐. 이제 먹어야지.”
“아, 네…….”
결국 적혈마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화낙단…… 아니, 마혼단을 복용했다.
사실 몸속에 흉측한 벌레 혈마고를 집어넣는 것보다는 백번 낫긴 했지만, 역시나 꺼림칙한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일도 아니지 않던가?
혈마고가 그나마 단환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마혼단을 완전히 소화한 것을 확인한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다 처먹었네?”
“예, 천마시여.”
“그럼 이제부터 뒈지기 싫으면 말 잘 들어라?”
“예? 아, 예…….”
적혈마가 어정쩡한 태도로 답했다.
천마가 조금 과격해졌다고 느끼는 것은 아마 기분 탓이리라.
* * *
서산으로 해가 저물었다.
땅거미가 깔리고 무림맹 성벽 곳곳에 횃불이 타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을 전각 지붕 위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그림자.
그는 바로 곤륜파 장문인 청풍진인이었다.
그의 뒤로는 지붕마다 흑의를 두른 무인들이 날카로운 기운을 다듬으며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오늘이다. 본 파의 염원을 이루는 날이 도래했다. 언제까지 변방의 세력으로 불릴 것인가? 이제 곤륜이 천하를 정의와 협의라는 이름으로 다스리게 되리라. 천하가 곤륜의 정대함을 알게 되리라.”
후우우우웅!
무림맹을 기습하는 일인 만큼 큰 목소리로 대꾸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무인들이 일시에 기를 발산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청풍이 서서히 기운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중요한 것은 속도다. 최대한 빠른 시간에 남문각을 뚫고 지나간다.”
후우우웅!
“그럼 가지.”
나직이 말을 뱉은 청풍이 일순 바닥을 찼다.
파아아아앙!
그야말로 한 줄기 바람이 훅 불어 나가는 것 같더니, 어느새 그의 신형이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 뒤를 곤륜파 무인들이 밤새처럼 날면서 따랐다.
* * *
“으응? 저게 뭐야?”
남문각 성벽에서 번을 서던 무인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먼발치를 보았다.
“뭐 말이야?”
옆으로 다가온 다른 무인이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볼 때는 이미 그것이 상당히 가까워진 후였다.
“어엇? 치, 침입이다!”
“흐억!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무인이 화들짝 놀라서 소리치자, 먼저 발견한 무인이 허둥대며 중얼거렸다.
“어어, 어쩌지? 이제 뭘하지?”
“종, 종! 비상종 울려!”
“아, 그렇지! 침입자다! 종을 울려라!”
그러자 마침 남문각을 지키던 무인들이 비상종을 사납게 울리기 시작했다.
땡땡땡땡땡땡……!
마침 남문각에서 저녁을 먹고 있던 유백랑이 버선발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무, 무슨 일이냐!”
“침입자입니다!”
“침입자라니! 대체 누가 감히 본 맹을 침입한단 말이야?”
“정말입니다! 인원은 대략…….”
쉬이익, 푹!
성벽 위에서 보고를 올리던 무인의 목에 화살 한 대가 박히면서 더 이상 목소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유백랑은 보고가 사실인 것을 알고 몸을 움찔 떨었다.
기실 그가 무공이 뛰어나 요직을 맡은 것은 아니었기에 적잖게 당황했다.
“지, 진짜…… 진짜 침입자다! 모두 방어 태세를 갖춰라! 아니! 침입자를 전부 죽여라!”
유백랑이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다가 문득 움찔거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가만, 그런데 침입자가 누구지? 흑무련일 리는 없을 테고, 마교도 무리인데…… 하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백랑이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막는 게 이득이긴 한가? 만약 이게 우 원주님의 뜻이라면?’
잠시 후 그가 다시 외쳤다.
“모두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