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 이것이 신앙이다
다음 날 아침 비월문주 연추량은 비월문도들을 이끌고 용취곡 분타 입구로 향했다.
“장문인, 여깁니다.”
무인 하나가 가리킨 곳은 무너진 암벽 쪽이었다.
연추량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침음을 흘렸다.
“흐음. 이 간악한 놈들. 이런 식으로 증거를 인멸하려고 했다니.”
연추량을 비롯한 비월문 무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
마교 용취곡 분타에서 자행되고 있던 일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천마 행세를 하는 남궁천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자세히 추궁했고, 적혈마는 그간의 일들을 소상히 보고했다.
그 결과 용취곡 분타에서는 무인들을 끌어들여 죽인 다음 영물에서 내단을 꺼내듯, 시체에서 단전을 꺼내 가공시키는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무림맹 뇌옥에 갇힌 죄수들 역시 그런 식으로 단전을 빼돌렸다는 것.
물론 사람의 단전이 영물의 내단처럼 온전한 형태로 꺼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한 가공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다만 적랑단이 침입하면서 마혈진을 발동했고, 이 경우 그러한 과정이 진행되던 현장 입구가 완전히 무너져서 봉쇄된다고 했다.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남궁천이 이른 새벽 비월문주를 불러 협조 요청을 한 것이다.
이미 벽력탄을 이용해서 무너진 암벽을 터뜨려 버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비월문도들이 그 위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무인 하나가 연추량에게 다가와 말했다.
“일석이조인 셈이었군요. 암벽을 무너뜨려 마혈진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자신들의 행적을 숨기려는 것까지.”
“그렇지. 무너진 암벽을 다 치워내면서 그 속을 들여다볼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정말 간악한 수법입니다. 대체 이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을까요?”
“더 기가 찰 노릇은 무림맹 뇌옥에서 옮겨진 시체들 역시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야. 약을 먹여서 시체 상태와 다름없이 만든 다음에 옮겼다는 거지. 이러한 기록이 장부에 남아 있으니, 남궁천 단주가 맹으로 복귀하게 되면…….”
“맹으로 복귀했을 때 관련자들이 줄줄이 엮여들 수도 있겠군요.”
연추량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렇네. 그간 무림맹이 어느 정도 썩어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묵천악 아래에서 이렇게까지 망가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군.”
“솔직히 남궁천 단주가 아니었으면 본 문도 꽤 위험할 뻔했지요. 맹의 존재 이유가 무색할 지경이었으니까요.”
“그렇지.”
연추량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무림맹으로 몇 번이나 지원 요청을 했지만 번번이 무산된 적이 있지 않던가?
그때 남궁천이 견습생 신분으로 광서성으로 와준 것이다.
물론 남궁천으로서는 마단곡의 위치와 겹친다는 이유로 광서성으로 향했던 것이지만, 그러한 내막을 알 리 없는 비월문주로서는 그저 남궁천이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면 참 대단합니다. 그 어린 나이에 적랑단주 자리를 꿰찬 것도 모자라서 적혈마를 그리 절절매게 만들다니요.”
“허허, 이미 강호신룡 시절부터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않았던가? 세상 사람들이 어리다고 무시할 때, 남궁천 단주는 그걸 오히려 편하게 이용할 위인이지.”
“그나저나 갑자기 천마가 된 건 또 무슨 일일까요?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온달까요?”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왠지 남궁천 단주라면 뭐가 된다고 한들 놀랍지 않달까?”
“그건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그렇다.
남궁천이 맹주가 되든, 천마가 되든, 무림공적 일호가 되든.
이상하게 남궁천이 뭐가 되든 별로 놀랍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행보.
하지만 그 끝에는 항상 놀라움이 있으니, 놀랍지 않은 게 더 놀라울 지경이랄까?
도대체 남궁천은 어쩌다가 적혈마까지 속일 수 있었을까?
물론 남궁천이 천마일 리는 없다.
사실 남궁천에게 푹 빠진 비월문으로서는 그가 천마이든 뭐든 은공으로 대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긴 하지만, 남궁천이 정말 천마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분명 어떤 수를 이용해서 적혈마를 속인 것일 텐데, 그 방법이 도무지 짐작도 안 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남궁천의 의도가 아닌 우연에 가까운 결과라면 기절초풍할 노릇이겠지만, 누구도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했다.
연추량이 무너진 암벽의 잔해를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한 가지는 분명하네.”
“그게 뭡니까?”
“만약 남궁천 단주가 천마로 인정받지 못했다면 우린 이곳의 비밀을 결코 풀 수 없었을 것이네. 이 아래에 뭐가 묻혀 있으며, 어떤 잔악한 일들이 행해지고 있었는지 영원히 몰랐을 테지. 설사 분타를 궤멸키셨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무너진 바위를 하나씩 옮겨서는 한 세월이 흐르겠어.”
“그래서 벽력탄을 이용해서 한 번 더 폭파시킬까 생각 중입니다.”
“그게 좋겠군. 혹여나 비밀 의식이 행해지던 장소가 완전히 매립되지 않도록 주의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벽력탄을 준비시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연추량을 뒤로 하고 무인이 문도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그 시각 남궁천은 적암동에서 걸어 나와 늘어지도록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흐아아암!”
밤새 당고륜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대책을 세우느라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탓에 온몸이 찌뿌둥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던 남궁천이 다시 한번 기지개를 켜고는 먼발치 어슴푸레 보이는 능선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안개가 너무 짙어서 제대로 된 경치도 감상하기 어려운 곳.
“그간 이런 곳에서 잘도 처박혀서 지냈구나.”
너무 습한 환경이다 보니 잠을 자고 일어나도 개운한 느낌이 없다. 하나 음공을 익힌 자들에겐 더 없이 좋은 환경이리라.
그때 마침 옆에서 기척이 느껴지더니 적혈마가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천마시여, 간밤에 편히 주무셨습니까?”
“어, 그래. 막내야. 잠은 좀 잤고?”
“예, 덕분에 편한 밤을 보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적혈마는 밤새 자신이 보았던 천마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마인으로서 천마혼을 직접 두 눈으로 본다는 것은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일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할 것을 본 것이니까.
그러다 보니 정말 자신이 본 게 천마혼이 맞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당시 느꼈던 기운은 확실한 마기였다. 그것도 모든 마기를 제압하고 다스릴 수 있다는 천마신기!
그러던 차에 천마혼이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하지만 생각할수록 이상하지 않은가?
어째서 남궁천에게 천마혼이 나타난 것일까?
과연 자신이 본 게 진정한 천마혼일까?
혹시 남궁천이 꼼수를 써서 천마혼처럼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들이 우후죽순 떠오르는 바람에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 남궁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귀를 후볐다.
“그래, 이제부터 너는 분타주가 아니다. 너는 마교 총타 좌마사(左魔士)다.”
“좌마사라면…….”
“내 최측근이라는 뜻이지.”
“감사합니다! 천마시여!”
“감사는 무슨.”
남궁천이 귀지를 판 손가락을 휙 튕겼다.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앙!
저만치 안개 너머에서 요란한 폭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때마침 비월문도들이 벽력탄을 사용한 것이지만, 이 사실을 짐작한 사람은 남궁천 뿐이었다.
‘아우씨, 깜짝이야. 조용조용 해결할 순 없나?’
반면 적혈마는 입을 쩍 벌리고는 폭약이 터진 곳과 남궁천을 연신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남궁천이 어정쩡하게 선 채로 적혈마의 눈치를 살폈다.
‘어음…… 뭔가 굉장히 기분 좋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남궁천의 짐작은 사실이었다.
조금 전 손가락을 튕긴 행위와 때마침 폭약이 터진 순간이 일치하다 보니, 적혈마로서는 천마의 힘으로 단단히 오해한 것이다.
그 바람에 마지막 남아 있던 의심까지 씻은 듯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적혈마가 돌연 무릎을 털썩 꿇으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천마시여! 이 미천한 교인이 한때나마 의심을 품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에헤이, 뭘 또 그렇게까지.”
남궁천이 얼른 손을 내젓는데,
꽈아아아아앙!
‘어우씨, 깜짝이야! 쫌!’
남궁천이 움찔거리고는 다시 소리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물론 이번에도 적혈마는 제대로 오해하고 말았다.
남궁천이 손을 내젓는 순간 또다시 폭발이 일어났으니, 이 역시 천마의 기운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미천한 교인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어음…….”
이쯤 되자 남궁천도 굳이 다른 말을 하지 않고 턱을 한껏 치켜들고는 준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알았느냐? 한심한!”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사옵니다!”
“쯧쯧. 그리 신앙이 약해서야. 네놈이 그러고도 천마를 신봉하는 마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용서해 주십시오! 천마시여! 죽으라면 이 자리에 머리를 박고 죽겠사옵니다!”
핏발 서린 눈으로 외치는 적혈마를 보니 남궁천은 내심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다.
‘와아, 이게 사이비의 결정체구나. 독하다, 독해.’
도대체 신앙이 무엇이기에 자신에게 한 줌 이익도 없는 짓을 저리 서슴없이 각오한단 말인가?
이 정도까지 각오한다면야 남궁천으로서는 좋은 패를 굳이 버릴 필요가 없었다.
“흠. 네놈이 의심을 품은 것은 괘씸하나, 그래도 내가 좌마사로 임명한 직후이니 넘어가 주겠다.”
“감사합니다, 천마시여!”
“단!”
“말씀 듣겠습니다!”
“네 몸에 혈마고가 심어져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쯧쯧. 그 짝퉁 교주는 어지간히도 의심이 심했던 모양이구나. 아직 짝퉁 교주가 이곳의 소식을 모를 테니, 내 너의 몸에서 혈마고를 뽑아주마.”
“그, 그것이 가능하십니까?”
“물론이다. 하나 너도 알다시피 나는 고귀한 몸이다. 그런 하찮은 일은 내 직접 할 수 없으니, 당 가주에게 맡기도록 하지.”
“천마의 은혜가 하늘에 닿습니다!”
“알면 됐고. 그럼 혈마고를 빼도록 하자고.”
“감사합니다, 천마시여!”
“자자, 대가리는 그만 박고. 따라와라.”
“예, 천마시여!”
연신 이마를 찧던 좌마사 적혈마가 벌떡 일어나더니 남궁천의 뒤를 따랐다.
* * *
“어떻습니까?”
남궁천의 말에 적혈마의 몸을 살피던 당고륜이 침음을 흘리다 말했다.
“확실히 심장 부위에 혈마고가 들어 있네. 이걸 분리해내기 위해선 꽤나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 같네.”
“혈마고를 빼내다가 죽을 가능성도 있을까요?”
“글쎄. 과거 본 가의 선조께서 마인의 몸에서 혈마고를 뽑아냈다는 기록을 읽은 적이 있긴 한데…… 그렇다고 해도 성공률이 일 할에 불과했네.”
“그럼 해보죠.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까요.”
듣기에 따라선 굉장히 섬뜩한 소리였다.
사람의 목숨을 두고 밑져야 본전이라니.
하나 이곳에서 행해지던 일을 떠올린다면 그런 표현을 쓰더라도 안타깝지 않을 존재이긴 했다.
죽은 사람은 물론, 산 사람마저 잡아다가 단전의 기운을 갈취하기 위해 생살을 가른 자들이니까.
당고륜이 다소곳이 누워 있는 적혈마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군. 이런 자를 어찌 그리 구워삶았나? 훈혈을 점한다는 말에도 이리 순순히 협조할 줄이야.”
“마신단의 덕을 좀 봤습니다. 한편으로는 당 가주님 덕분이기도 하지요.”
“마신단을 만드는 것보다 흡수하는 게 더 어려운 법이지. 내게 공을 돌리는 건 고마운 일이나, 여기까지 온 것은 순전히 자네의 재량이라고 생각하네. 자네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나는 이미 단전을 잃은 시체가 되었을 걸세.”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참, 당가에서 포로들에게 사용하는 독단이 뭐였죠?”
“화낙단(花落團) 말인가?”
“예, 전 이 녀석의 몸에서 혈마고를 빼내고 화낙단을 심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앞으로 안심하고 적혈마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겠군.”
“어떻게, 가능하시겠습니까?”
“시도해 보겠네.”
당고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날카로운 단검을 꺼냈다. 가슴 어림에 단검을 갖다 대던 당고륜이 문득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만약 잘못된다면…….”
“그럼 버려야죠, 뭐.”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