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38화 (437/508)

438. 이것이 신앙이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혼란스러울 거야. 백묘.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니까. 무림맹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후에 내가 천마라는 사실을 알고 눈물 흘리던 네 모습이 지금도 눈에 훤하구나.”

“뭔 병신 같은 소리를 잘도…….”

“알아, 알아. 지금은 정신이 없겠지. 하지만 곧 다시 정신을 차릴 거라고 생각한다. 적혈.”

“예, 천마시여.”

“백묘가 아직 혼란스러운 것 같으니 적당한 곳에 가둬서 안정을 취하게 해라.”

“가둬서 안정을…….”

“어허, 백묘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잖아. 자칫 이성을 잃고 설치게 되면 엄한 사람이 다칠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렇군요. 분부 받들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적혈마가 돌아서자, 백묘가 흠칫거리고는 물러났다.

“저, 저리 가. 이 미친놈들아. 전부 돌았어. 다들 제정신이 아냐!”

“백묘. 함께 가자. 이젠 너를 이해하니 반항할 필요는…….”

“꺼져!”

파밧!

앙칼지게 소리친 백묘가 바닥을 차며 날아갔다.

그 뒤를 적혈마와 오혈마가 뒤쫓으려는데, 남궁천이 불러 세웠다.

“한 놈만 가서 잡아 와라. 어차피 부상이 심해서 얼마 못 갈 텐데. 그보다 적혈.”

“말씀 듣고 있습니다!”

“지금 너희 애들이 우리 애들 괴롭히는 중일 것 같은데?”

“아……! 당장 공격을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서둘러라. 다 같이 천마를 신봉하는 자들끼리 죽자고 싸울 필요 없잖아?”

“물론입니다! 너희들은 당장 가서…….”

“아냐. 오혈마가 남고 적혈, 네가 가라. 한창 피 터지게 싸우고 있을 텐데 얘네들이 가서 뜯어말린다고 씨알이나 먹히겠어? 그런 건 분타주가 직접 가야지.”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적랑단을 보면 형님으로 모셔라. 너희들보다 먼저 천마를 알아보고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녀석들이니까.”

“……알겠습니다.”

“왜 기분 나빠?”

“아닙니다.”

“그래, 너무 기분 나빠할 것 없어. 너희들도 순번으로 따지면 그리 늦은 건 아니야. 앞으로 들어오는 녀석들은 너희보다 아래다.”

“감사합니다.”

“그럼 적혈은 가서 수고하도록 하고. 오혈!”

“예, 천마시여!”

오혈마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꾸한다.

남궁천이 묘한 희열감을 느끼면서 말했다.

“대회의실이 어디냐? 우선 그곳으로 가자.”

“모시겠습니다. 앞장서겠습니다!”

오혈마가 몸을 돌려 앞장서자 남궁천이 느긋한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이거, 뭐 세상 편하네.

천마도 나쁘지 않은데?

* * *

“끄윽! 여기도 좀……!”

“아으윽! 나도…… 너무 아파……!”

여기저기에서 앓는 소리가 울려왔다.

당우기와 당예설이 연신 분주하게 움직이며 당가 무인들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그나마 의술에 조예가 깊은 당가의 무인들이 있었기에 부상자들의 상처가 더 깊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붉은 안개가 있던 곳에서 상처를 입었던 자들은 모종의 독성분 때문인지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당가의 지혈제를 써도 효과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천을 찢어 상처 부위를 친친 동여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차례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나자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

손우곤이 당예설에게 다가와 포권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렇게 또 당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맹과 당가는 이제 뗄 수 없는 관계. 굳이 감사를 표할 것까지야.”

당예설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동굴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남궁 단주는 무사할까요?”

“음…… 단주님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아…… 음…….”

당예설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남궁천은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

사실 걱정보단 궁금할 따름이다.

도대체 남궁천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지.

‘어느새 나도 남궁천에 대한 믿음이 커진 모양이구나.’

물론 그런 남궁천이 지금 천마 놀이에 빠져서 분타주를 수족 부리듯 한다는 것을 안다면 놀라 자빠지겠지만, 당예설이 그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이제 슬슬 이동하죠.”

당예설의 말에 손우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지금부터 이동한다!”

그렇게 부상자들을 이끌고 적랑단이 다시 통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 동안 걷다 보니 마침 사방이 확 트인 공동이 나타났다.

너른 공동은 팔방으로 통로가 이어져 있었는데, 이 층과 삼 층에도 통로가 나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죠?”

팽수혁이 눈살을 슬쩍 구기며 중얼거렸다.

그 순간 유현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나직이 일렀다.

“누군가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유현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이 빠져나온 통로 천장에서 육중한 철문이 떨어지며 막혀 버렸다.

구구구궁, 쿠웅!

모두가 놀라서 돌아보는 사이, 사방에서 활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긴 마인들이 우후죽순 모습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사방의 통로에서도 시뻘건 피풍의를 두른 마인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더니 손우곤을 비롯한 일행들을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처처처처척!

사방이 적으로 포위된 상황.

붉은 피풍의를 두른 자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노인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무림맹에서 오신 나리들이신가? 겁대가리 없이 용케도 여기까지 오셨군.”

“……!”

손우곤을 비롯한 맹원들이 저마다 긴장한 표정으로 병장기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사방에서 겨눈 활만 해도 여기서 살아 나가기 어렵다는 걸 알게 해준다.

수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피식 웃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차피 긴말을 섞을 것도 없겠지. 전부 처리……!”

“멈춰라아아앗!”

노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곧이어 한쪽 통로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휙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노인의 안면을 무릎으로 가격하는 게 아닌가?

퍼어억!

“크억!”

슈우우우욱, 쿠당탕탕!

그대로 포탄처럼 튕겨 날아간 노인이 암벽에 처박힌 채로 종잇장처럼 구겨져 부들부들 떨었다.

마인들뿐만 아니라, 손우곤을 비롯한 맹원들도 놀라서 입을 척 벌렸다.

놀랍게도 노인을 일격에 나가떨어지도록 만든 사람은 분타주가 아닌가?

잠시 후 더 놀라자빠질 만한 일이 이어졌다.

적혈마가 포권을 하더니 공동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우, 적혈이 형님들을 뵙습니다!”

“어…… 누구……?”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형님들을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손우곤과 당예설, 그리고 각 대주들이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손우곤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저어……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 * *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손우곤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단지 이 순간 입을 함부로 놀려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본능적인 예감에,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

피처럼 붉은 기둥이 높은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적암동.

그 가운데로는 붉은 융단이 길게 깔려 있었고, 어딘지 음습한 공간의 좌우로는 마기를 풀풀 풍기는 마인들이 묘하게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융단 끝에 마련된 태사의.

시커먼 바위를 깎아 만든 태사의는 역시나 붉은 비단으로 덮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남궁천이 비스듬히 드러누운 채 턱을 괴고 있었다.

입으로는 뭔가를 우물우물 씹고 있었는데, 남궁천 앞에는 먹기 좋은 다과가 떡하니 한상 차려져 있었다.

영문을 모른 채 친절한 안내에 따라 이곳까지 온 대주들과 당예설은 남궁천을 보고 반색했지만, 이 묘한 분위기에 억눌려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적혈마였다.

“천마시여! 형님들을 모셔왔습니다!”

“수고했다, 적혈.”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멍한 표정의 손우곤을 돌아보았다.

“다들 고생 많았다. 사소한 오해가 있어서 서로 칼을 겨눴지만 이제 오해도 풀었으니 지난 감정은 잊도록 하라.”

“에…… 단주님……?”

손우곤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남궁천이 얼른 손을 들어 올리며 제지했다.

“본좌는 천마다.”

“아…… 음…… 그렇군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손우곤은 남궁천으로부터 강렬한 눈빛을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예설이 눈치껏 살피다가 슬쩍 한 걸음 나서며 물었다.

“하면 아버지는 어떻게 된 거죠?”

그 말에 남궁천이 시선을 돌리자, 적혈마가 얼른 나서며 답했다.

“당 가주님은 현재 뇌옥에서 풀려나 운암동에서 편히 머물고 계십니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기에 아버지를……!”

“죄송합니다. 당 가주님에 대한 착오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간 본 분타는 가짜 교주를 필두로 마교의 부활을 위해 여러모로 준비 중이었습니다.”

“가짜 교주?”

당예설의 반문에 적혈마가 고개를 숙이며 말을 받았다.

“예, 어리석게도 아우는 그간 가짜 교주를 철석같이 믿고 혈마고까지 복용하며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하나 이젠 진정한 천마를 알아보았고, 마침내 개안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어…….”

당예설이 애매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개소리 같다.

가짜 교주는 뭐고 진정한 천마는 또 뭔가?

그때 남궁천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적혈, 애써 변명할 필요 없다. 그런다고 너의 과오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니.”

“죄송합니다, 천마시여.”

“어쨌거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다. 짝퉁 교주 놈을 무너뜨리고, 본 교가 바로서길 바라는 것. 그 시발점에 적혈, 네가 함께하는 것이다.”

“영광입니다, 천마시여!”

“고로, 나는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이곳 용취곡을 오늘부로 마교 총타로 지정하고 곳곳에 뿌리 내린 가짜 마교도를 척결하겠다!”

“……!”

갑작스러운 발언에 손우곤은 물론 당예설을 비롯한 다른 대주들도 황당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한데 이를 듣고 있던 적혈마를 비롯한 마인들의 반응이 더 가관이다.

남궁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제히 무릎을 꿇더니 목청껏 외치는 게 아닌가?

“천마지존! 만세, 만세, 만만세!”

어찌나 혼을 담아 외치는지 적암동 내부가 쩌렁쩌렁 울려서 고막이 터질 지경이었다.

모든 마인들이 엎드려서 머리를 땅에 대고 있자, 손우곤을 비롯한 대주들과 당예설만 어정쩡하게 서 있는 상태.

남궁천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손우곤을 노려보았다.

‘뭐 해? 절 안 하고?’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일단 하고 봐!’

남궁천이 열심히 턱짓을 하자, 그제야 손우곤이 어정쩡한 자세로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천, 천마지존…… 만세, 만세, 만만세.”

그러자 당예설과 다른 대주들도 엉겁결에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천마지존! 만세, 만세, 만만세!”

마침내 모두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자, 남궁천이 빙그레 웃었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시종 쫓기던 몸에서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이게 만인지상의 기분이라는 건가?

잠시 추앙받는 기분에 도취되어 있는데 마침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한 명의 마인이 달려 들어와 보고했다.

“분타주님! 비월문이라는 곳에서…….”

남궁천이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턱짓을 했다.

“적혈, 나가서 맞이해라. 형님들이시다.”

“알겠습니다!”

믿음직스럽게 대꾸한 적혈이 재빨리 몸을 날려서는 적암동 밖으로 달려 나왔다.

마침 적암동 앞에 다다른 비월문주 연추량이 적혈마의 몸놀림을 예사롭지 않게 보고는 곧장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한데 적혈마가 뜻밖에도 포권을 하며 소리쳤다.

“아우, 적혈이 형님을 뵙습니다!”

“어…… 네?”

“천마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끔뻑이던 연추량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천, 천마? 저어……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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