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37화 (436/508)

437. 이것이 신앙이다

“비월문……? 연추량?”

윤종승이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더라?

그렇게 한참이나 머릿속을 헤집는데, 마침 아련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 지난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그간 많은 일을 겪다 보니 한참이나 지난 추억처럼 느껴진다.

그래, 견습생 신분으로 광서성을 찾은 적이 있지 않던가?

그곳에서 비월문과 장흥표국을 도와 삼봉파를 격파하고 귀환했다.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여기까지 돕기 위해 온 것이구나!

과연 광서성이라면 신무 지역에서 멀지 않으니 충분히 찾아올 만하다.

한데 여길 어찌 알고 온 것일까?

아니, 그보다는 당장 이들이 적무에 취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게 우선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윤종승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나는 적랑단 사대주 윤종승이오! 비월문도들은 호흡을 참으시오! 적무에 취하게 되면 환각을 일으키게 되오! 또한 출혈이 멈추지 않게 되니 함부로 발을 들이지 마시오!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나지 마시오! 적아를 구분할 수 없소!”

그러자 적무 너머의 그림자가 외쳤다.

“윤 대주께서는 걱정 마시고, 편히 쉬시오! 우리가 돕겠소!”

“하면 내가 일시적이나마 적무를 몰아내 보겠소!”

말을 마친 윤종승이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공력을 끌어 올렸다.

구오오오오!

다음 순간 윤종승이 사방을 향해 쌍장을 마구 뻗어냈다.

퍼퍼퍼퍼어엉!

장력이 격발하자 허공에서 폭음이 쩌렁쩌렁 울리면서 적무가 흩어져 갔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붉은 안개가 멀찍이 물러나자, 비로소 주변의 경광이 어느 정도 보였다.

하나 윤종승의 눈에는 괴물만 더 늘어난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어차피 환각 속에서 감각을 믿을 수는 없는 법.

게다가 모든 공력을 일시적으로 쏟아내고 출혈도 심한 탓에 더 이상 싸울 힘도 남아나지 않은 윤종승이었다.

털썩!

윤종승이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이제…… 당신들에게 내 운명을 맡기겠소.”

그러자 무너진 돌더미를 밟고 선 연추량이 문도들을 향해 소리쳤다.

“비적대(飛迹隊) 정예는 곧장 윤 대주를 구하라! 나머지는 벽력탄을 준비한다!”

“존명!”

순간 비적대원 중에서도 정예로 선별된 자들이 쏜살같이 몸을 날려 윤종승에게 날아갔다.

반면 다른 이들은 품에서 벽력탄을 꺼내 들고는 당장에라도 던질 태세를 갖췄다.

연추량은 두건을 눌러쓴 적들을 훑어보며 내심 남궁천의 안배에 감탄했다.

‘마교 분타를 치기 위해서 가능한 폭약을 준비해 오라고 하더니. 이렇게 요긴하게 쓰는구나.’

애초에 남궁천이 보낸 서신에는 분타의 위치가 협곡인 만큼 지형지물을 이용한 방어전이 예상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에 효율적으로 방어를 무너뜨릴 수 있는 폭약을 준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용취곡에 대한 소문은 광서성에도 어느 정도 회자되고 있었기에 연추량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정말 마교 분타가 있을 줄은 몰랐다.

몇몇 정예가 두건을 쓴 적들과 맞서 싸우고, 또 다른 정예가 윤종승을 구출하자, 연추량이 버럭 소리쳤다.

“벽력탄 투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벽력탄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 * *

쿠구구구구우웅……!

갑자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바닥이 떨리면서 동굴 천장에서 흙부스러기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좁은 통로를 따라 거침없이 달려가던 적랑단원들이 흠칫거리며 중심을 잡고 섰다.

진동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팽수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불쾌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뭐야? 이게……? 설마 이거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

“밖에서 윤종승이 제대로 한바탕 설치나 본데.”

당우기가 벽을 짚고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팽수혁이 혀를 차고는 어금니를 꾹 씹었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드는 새끼. 꼭 결정적인 순간에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해서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다니까!”

말은 거칠지만, 그 목소리에 윤종승을 걱정하는 마음만은 고스란히 전해졌기에 당우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침 손우곤이 다가와서 팽수혁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하지 마라. 어쩌면 지금쯤이면 아군이 도착했을지도 모르니까.”

“아군이라니요? 우리한테 그런 게 있었습니까?”

유일하게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백옥지단의 청운대와 백운대는 전부 동굴로 대피한 상황이었다.

손우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옥지단에 도착하자마자 단주님이 비월문에 협조 요청을 보내라고 지시하셨다.”

“비월문……? 그게 어디더라?”

“견습생 시절 비월문과 장흥표국을 도왔던 적이 있잖나? 그때 마단곡을 들러서 영단을 다량 확보했고.”

“아! 그러고 보니 기억났습니다! 맞아, 그때 영단을 남궁천이 혼자 다 처먹겠다고 창응대에게 옮기게…….”

“커흠!”

손우곤이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팽수혁이 슬쩍 말꼬리를 흐리고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아무튼 비월문이 왔을 수도 있단 말이군요. 그러고 보니 여기 도착해서 단주가 광서성 쪽은 어떠냐고 물었던 게…….”

“그래, 비월문을 두고 하신 말씀이지.”

“허…… 생각도 못 했네. 광서성의 비월문에게 협조를 구할 줄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가자고. 이제 우리도 적무에서 벗어난 것 같으니 부상자들을 좀 돌보고.”

“알겠…….”

그때였다.

갑자기 저만치 앞서가던 무인들 사이에서 고함과 비명이 마구 뒤섞이는 게 아닌가?

“크아악!”

“으헉, 그만해!”

“뒈져!”

“아아악!”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팽수혁이 달려가 보니 자신이 이끄는 삼조원 중 몇 명이 아군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뭐 하는 거야!”

팽수혁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고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까아아앙!

태도가 떨어지면서 날아드는 검신을 쳐냈다.

휘청거리며 물러난 삼조원이 팽수혁을 보더니 눈을 뒤집고 달려들었다.

“크으윽! 이 괴물 새끼야! 꺼져엇!”

쉬이이잇!

“이 미친……!”

팽수혁이 욕지거리를 뱉어내면서 얼른 몸을 뒤틀었다. 팽수혁의 어깨를 얇게 베며 지나간 검이 암벽에 처박혔다.

순간 팽수혁이 발을 내질러 삼조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퍼억!

슈우우욱, 콰당!

그대로 튕겨나간 삼조원이 벽에 부딪치면서 쿨럭 피를 토해냈다.

팽수혁이 그대로 달려가서 삼조원의 멱살을 쥐고는 벽에 밀어붙였다.

콰다앙!

곧이어 태도를 휘둘러 그대로 삼조원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태도가 암벽을 가르면서 깊숙이 박히더니 삼조원의 목 언저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콰가가각……!

“아오…… 니미럴……! 정신 좀 차려라. 어엉?”

팽수혁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정말이지 조금만 힘을 가해도 태도가 목을 자를 상황.

팽수혁의 진심이 통한 것일까?

흔들리던 삼조원의 눈동자가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대, 대주님……?”

“정신이 드냐?”

“크흑,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이젠 제가 저를 못 믿겠습니다!”

“닥쳐. 수하를 포기하는 대주 따위는 되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전……!”

짜악!

순간 팽수혁이 삼조원의 뺨을 후려치고는 외쳤다.

“정신 차려! 너 이번에 수당 나오면 홀어머니 비단옷 한 필 사드린다며!”

“대주님…….”

“그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

퍼어억!

순간 삼조원이 발을 내질러 팽수혁의 복부를 걷어찼다.

슈우우욱, 쿠당탕!

어찌나 강하게 내지른 것인지 거구인 팽수혁이 한참이나 떠밀려서 쓰러졌다.

“하앗!”

거의 동시에 삼조원이 바닥을 차고 날아오르더니 쓰러진 팽수혁을 향해 덮쳐갔다.

검을 거꾸로 세운 삼조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염병…… 이게 뭔……!”

죽음을 목전에 둔 팽수혁이 허탈한 심정으로 중얼거리는데,

쉬이이이잇!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잠깐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모든 광경이 느리게 펼쳐졌다.

피츗, 츄아아아아!

팽수혁을 향해 날아오던 삼조원의 목에 선혈이 생기더니 이내 머리가 분리되면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뜨끈한 피가 쏟아지면서 그대로 팽수혁의 안면을 덮쳤다.

“어……?”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팽수혁의 곁으로 몸통과 분리된 머리가 툭 떨어졌다.

잘려 나간 머리가 눈을 부릅뜬 채 팽수혁을 보고 있었다.

“……!”

순간 팽수혁이 벌떡 일어나서는 수하를 일격에 벤 상대를 보았다.

그는 다름 아닌 유현이었다.

한데 유현의 움직임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몸을 날리면서 이지를 잃은 자들을 베어나가는 게 아닌가?

샤샤샤샥!

슈카카칵!

그야말로 일검일살.

그의 검격에는 일말의 망설임이나 자비 따위는 없었다. 매정함이 지나쳐 무정함마저 느껴질 정도.

죽음의 사자가 검무를 추는 것만 같다.

저것이 화산의 검이란 말인가?

“저 미친 새끼!”

순간 울분이 차오른 팽수혁이 바닥을 차고는 유현에게 날아갔다.

슈우우우욱, 콰다앙!

그대로 어깨로 들이받은 팽수혁이 유현의 멱살을 쥐고는 벽까지 밀어붙였다.

콰다아앙!

푸스스스……!

어찌나 세게 밀쳤는지 유현이 벽에 부딪치자 동굴 천장에서 흙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뭐 하는 짓이야, 이 새끼야!”

팽수혁이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보며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유현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대꾸했다.

“적무에 취해서 이성을 잃은 자만 처리한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수하들을 그렇게……!”

“돌릴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같은 적랑단 아니냐!”

“같은 적랑단이니까. 그러니까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같은 적랑단이니까 다 같이 죽을 겁니까?”

“너 도대체…….”

팽수혁이 뺨을 부들거리면서 유현을 노려보았다.

하나 유현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강호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지요.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겁니다.”

“너 이 새끼…… 적당히 하라고. 그런다고 네가 남궁천처럼 되는 줄 알아?”

“……!”

“네가 남궁천을 따라 한다고 생각해?”

“저는 단지…….”

“닥쳐! 내가 무식해서 설명은 못하겠지만, 지금 너는 그 녀석하고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

“…….”

“너 지금 뭔가 한참 잘못 배웠어, 이 새끼야.”

말을 마친 팽수혁이 유현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손우곤을 비롯한 각 대주들이 부상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점혈로는 지혈이 되지 않으니 천을 찢어서 묶어라!”

“옛!”

“적무를 조금이라도 들이켠 자들은 당장 운기조식을 해라!”

“알겠습니다!”

적랑단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 * *

“천마라니……?”

백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중얼거리자, 적혈마가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이제 나도 알게 됐으니 애써 부인할 필요 없다. 그간 네가 진정한 천마를 모신 것을 알게 됐으니까.”

“천마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예요? 갑자기 무슨 말이죠?”

“뭐?”

이쯤 되자 적혈마가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백묘가 남궁천을 이곳까지 안내한 것은 그가 천마혼의 선택을 받은 진정한 천마여서가 아니었단 말인가?

적혈마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돌아보자,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며 저벅저벅 다가왔다.

“당황할 거 없어. 백묘가 고문을 좀 받더니 머리가 이상해져서 그래. 자꾸 깜빡깜빡하더라고. 내가 천마라는 걸.”

“아…… 예. 그렇군요.”

적혈마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백묘는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왜 저딴 새끼한테 고개를 조아려요? 분타주!”

“무엄한!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어도 어찌 천마에게 그런 말투를!”

적혈마가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나무라자, 백묘가 앙칼지게 대꾸했다.

“정신 차려요! 분타주! 아깐 날 오해해서 죽이려고 하더니, 이젠 저 새파란 놈을 천마라니! 어딜 봐서 저놈이 천마라는 거예요?”

그러자 남궁천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백묘의 뺨을 철썩 올려붙였다. 백묘가 휘청거리면서 겨우 중심을 잡고 노려보자, 남궁천이 지엄한 얼굴로 말했다.

“닥쳐라. 내가 천마다.”

백묘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아니, 이것들이 쌍으로 대가리를 다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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