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 이것이 신앙이다.
적혈마가 눈을 부릅뜨고는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남궁천에게 달려들려고 하던 다른 마인들 역시 거대한 천마혼의 형상을 보고는 몸이 그대로 경직됐다.
천마혼.
천마신공을 익힌 자가 아니면 절대로 구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천마혼은 상대를 직접 선택한다는 말이 있다.
한데 남궁천의 배후에 나타났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적혈마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돌아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진천랑의 아들이어서? 진천랑이 천마신공을 익히고 아들을 낳은 건가?’
물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천랑은 무림공적 제일호로 종잡을 수 없는 삶을 살았다. 어딘가에서 어떤 기연을 얻어 천마신공을 익혔다고 해도 그러려니 할 정도로 기구한 삶이지 않던가?
그런 아비의 피를 물려받고, 초견파공안의 재능까지 더해져서 천마의 기운이 발휘된 건가?
‘아니, 이게 뭔 개소리야?’
스스로 생각해도 억측이다.
그러다 보니 눈앞에 나타난 형상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어쨌거나 분명한 건 저 무시무시한 형상이 자신을 또렷하게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남궁천은 적혈마가 검을 섞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멍청하게 서 있자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물었다.
“어이, 뭐 하는 거야? 벌써 전의를 상실한 거냐?”
“천마…….”
“오지도 않을 천마는 여기서 왜 찾아? 우는 애가 엄마 찾는 것 같아서 마음 아프잖아.”
꿀꺽……!
적혈마가 다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였다.
놀란 와중에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마인들이 일순 몸을 날려 남궁천을 배후에서 노렸다.
“멈춰엇!”
적혈마가 얼른 손을 뻗으며 외쳤지만 이미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는 마인들은 가속력을 이기지 못했다.
당연히 남궁천이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벽라검을 휘둘렀다.
쑤아아아아앙!
강기를 머금은 벽라검이 공간을 베어낸다.
배후에 나타난 천마혼의 형상이 남궁천과 함께 벽라검을 쥐고 휘두른다.
콰콰콰콰콰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단지 옆을 돌아보며 일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시뻘건 강기가 발현되면서 달려드는 적들뿐만 아니라, 그 뒤의 암벽까지 가차 없이 베어버린 것.
쿠르르르릉!
암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달려들던 마인들은 상하반신이 갈라진 채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그 무지막지한 괴력에 적혈마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저건 분명 천마혼의 기운이다.
익숙하면서도 두려운. 경외감에 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기운.
“어째서 천마가…….”
적혈마가 다시 멍하니 중얼거리자, 남궁천이 이맛살을 푹 구기고는 어깨를 으쓱인다.
“거참, 아까부터 왜 자꾸 엄마 찾는 애처럼 구는 거냐? 마음 약해지게.”
남궁천이 무심히 고개를 돌리니, 옆에 선 다른 마인들도 움찔거리며 쉽사리 달려들 생각을 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남궁천을 두려워하면서 주춤주춤 물러나는 게 아닌가?
“으응? 다들 왜 이래? 그나저나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내 뒤에 뭐 있어? 날 속이려고 그런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거면…… 으허우아아악!”
무심코 뒤를 돌아보던 남궁천이 화들짝 놀라면서 튕기듯 물러났다.
한데 몸을 완전히 돌려 버리니 천마혼이 다시 등 뒤로 이동하는 것이 아닌가?
멈춰 선 자세에서 고개만 돌려야지 천마혼이 보이는 상황.
“어우씨, 깜짝이야! 뭐야? 이거? 왜 이런 게 내 뒤에 있는 거야?”
“…….”
남궁천의 반응에 적혈마와 마인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모른다고? 천마혼을……?’
적혈마는 입을 딱 벌리고 남궁천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본인도 모르는 천마혼이 나타나다니.
저런 식으로 배후에 나타나서 함께 싸워주는 천마혼은 천마신공을 익힌 자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천마신공을 익힌다고 무조건 천마혼이 나타나진 않는다.
마신의 선택을 받은 자.
천마혼의 인정을 받은 자만이 진정 천마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한데…… 남궁천은 천마혼의 존재조차 모르다니?
그렇다면 남궁천의 의지와 상관없이 천마혼의 선택을 받은 것인가?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자질을 갖추면 그렇게 되나?
한편 남궁천은 등 뒤에 나타난 천마혼을 보면서 손발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천마혼의 기운이 손과 발에 연결되면서 묵직한 힘이 실린다.
“아…… 이래서 아까도 그렇게 강기가 강하게 나간 건가?”
그제야 남궁천은 천마혼을 대충 알아보았다.
일전에 천마신단을 복용했을 때 나타났던 그 천마혼과 굉장히 흡사한 기운을 품고 있지 않은가?
하나 그러한 내막을 알 수 없는 적혈마와 마인들로서는 그저 기적 같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남궁천이 천마신단 제조법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걸 만들어 복용하고 소화까지 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테니까. 아니, 그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았을 테니까.
대략의 상황을 이해한 남궁천이 팔짱을 척 끼고는 적혈마를 돌아보았다.
“어이, 너 이름이 뭐냐?”
“……!”
“대답을 하라고.”
남궁천이 미간을 좁히고는 왼손을 쭉 뻗어 장풍을 날렸다.
슈우우우욱! 꽈아아앙!
천마혼의 기운이 더해지니 손바닥에서 강기가 발사되면서 다시 암벽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적혈마의 눈이 잔뜩 커졌다.
꿀꺽……!
“적혈마…… 요.”
적혈마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적혈마는 고개를 들고 천마혼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남궁천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게 통하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천마혼은 마교 놈들에게 있어서 거의 신적인 존재다. 신앙과도 같다.
그런 천마혼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으니 전의를 상실하는 건 당연한 이치.
오히려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려도 모자랄 판이 아닌가?
남궁천이 팔짱을 낀 채 턱을 한껏 치켜들고 말했다.
“그래, 적혈. 내가 천마다.”
“헉……!”
“보고도 모르겠나? 적혈.”
“그, 그런……!”
“무엄하다, 적혀얼!”
순간 남궁천의 목소리가 협곡에 쩌렁쩌렁 울렸다. 거기에 천마혼의 기운이 더해지니 고막이 터져 나갈 정도로 시끄러웠다.
그 기세에 떠밀린 적혈마가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털썩 꿇으며 소리쳤다.
“천, 천마지존! 만세, 만세, 만만세!”
그러자 주변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마인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천마지존! 만세, 만세, 만만세!”
오, 이것도 통하네.
남궁천이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적혈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미 천마혼에 압도된 적혈마는 이성이 거의 마비된 상태.
남궁천이 그런 적혈마를 빤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괘씸해서 말이야. 마졸 주제에 감히 천마에게 검을 겨눠? 설쳐도 될 자리 구분도 못하지?”
“……!”
“왜 대답이 없어? 두 눈으로 보고도 반신반의하는 건가? 이렇게 신앙심이 약해서야 진정한 마교도인이라고 할 수 있나? 네놈이야말로 진정 배교자구나.”
“그, 그렇지 않습니다! 천마시여!”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새끼야. 천마혼을 보고도 고개 빳빳하게 들고 살기 드러내던 놈이.”
“미,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그럼 벌을 받아야지.”
적혈마에게 뚜벅뚜벅 걸어간 남궁천이 벽라검을 뻗어서 검면으로 적혈마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구우우우우우……!
“크읍!”
공력을 실은 검면이 정수리를 찍어누르자, 적혈마가 온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투둑…… 툭!
그의 손등과 팔뚝을 따라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공력을 끌어 올려 대응하고 있지만, 남궁천이 내려찍는 공력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찍어누르는 것은 분명 천마신공!
그 어떠한 마공도 천마신공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적혈공이 마공 중에서도 꽤 알아주는 무공이지만 천마신공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신세.
뚝……!
“크윽!”
마침내 뼈마디가 부러진 것인지 적혈마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남궁천이 검을 거두어들이자, 적혈마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안도했다.
남궁천이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앙이 얕은 놈들아, 지금부터 반성의 의미로 대가리를 박는다. 실시!”
“실, 실시!”
적혈마를 비롯한 마인들이 일제히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쿠쿠쿠쿠쿠웅!
어찌나 세게 박는지 바닥이 지진이 난 것처럼 떨린다.
“자, 이제 나머지는 박은 채로 유지하고, 적혈은 일어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혈마가 벌떡 일어났다.
그 민첩한 움직임에 남궁천이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 미친 새끼들. 진짜 천마라면 사족을 못 쓰는구나.’
뭐, 이해는 한다.
일반 문파와 달리 마교는 글자 그대로 종교니까. 신념으로 뭉친 자들이 아니라 신앙으로 결속된 자들이니까.
어느새 적혈마의 깨진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침 남궁천의 배후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던 천마혼이 스르르 사라질 때, 희뿌연 안개를 헤치며 오혈마가 백묘를 질질 끌고 왔다.
아무래도 백묘가 오혈마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로잡힌 모양이었다.
하긴 부상을 입은 몸으로 다섯 명을 한꺼번에 상대하기에는 무리였으리라.
반면 상처투성이의 백묘를 끌고 오던 오혈마는 뜻밖의 상황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남궁천과 적혈마를 번갈아 보았다.
“분타주님?”
오혈마중 하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적혈마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백묘를 놔주어라.”
“아, 예.”
오혈마들이 얼른 백묘를 놓고 물러나자, 기운이 빠진 백묘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가 겨우 몸을 추스르며 일어섰다.
그녀 역시 주변의 광경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적혈마는 이마가 깨져 피를 줄줄 흐르고 있고, 나머지 마인들은 전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지 않은가?
한데 자신에게 다가오는 적혈마의 말이 더 기이하다.
“백묘, 오해해서 미안하다. 너는 배교자가 아니었구나.”
“……?”
“이제 보니 천마를 모시고 있었군.”
백묘가 눈살을 잔뜩 찡그렸다.
‘뭐라는 거야? 이 병신이…….’
* * *
콰콰아앙……!
요란한 폭음을 끝으로 윤종승이 두 손을 척 늘어뜨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헉……!”
깨진 이마에서 피가 흘렀고, 낫에 베인 허벅지에서도 피가 흘렀다.
문제는 점혈을 해도 전혀 지혈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편 자신을 덮쳤던 괴물들은 온몸이 터져 나간 채로 절명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안갯속에 몇 마리나 되는 괴물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없다.
물론 그 괴물들은 진짜 괴물이 아닐 것이다.
마혈진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환각이 일어나는 것이리라.
거기에 이 적무에 갇히게 되면 지혈이 안 된다는 문제점도 생긴다.
반면 놈들은 지혈이 가능한 듯했다. 일종의 피독주 같은 것을 복용한 거겠지.
어쨌거나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
다만 모든 아군을 대피시킨 만큼 이제는 적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편하다.
‘그래도…… 더 이상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꽤나 많은 놈들이 있었던 것인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다.
게다가 출혈이 심해서 환각 증세가 더 심한 것 같다.
저벅…… 저벅……!
안갯속에서 기척이 들린다.
마침내 괴물이 나타난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다섯…….
모두 열두 마리.
‘니미럴, 아직도 열둘이나 남았나?’
양어깨가 욱신거리고 팔은 가늘게 떨린다.
윤종승이 부들부들 떠는 손을 들어 올렸다.
승산은 없다.
이 자리가 곧 무덤이 되리라.
‘아버지 보고 싶네.’
윤종승이 입술을 꾹 깨물고 결의를 다졌다.
“좋아. 해보자. 뒈질 때까지. 후회는 없다! 이 윤종승! 더 이상 비겁자가 아니란 말이다!”
윤종승의 목소리가 사자후처럼 울렸다.
그때,
쿵! 쿠웅! 쿠우웅!
땅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떨린다.
저만치 무너진 암벽이 흔들리는 소리다.
윤종승은 물론, 열두 마리의 괴물들도 시선을 돌려 무너진 암벽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콰콰콰콰콰콰아앙!
암벽이 터져 나간 자리에 한 무리의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가장 앞장선 그림자가 포권을 척 하더니 소리쳤다.
“비월문주 연추량이, 은공의 은혜를 갚기 위해 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