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 성동격서聲東擊西
쿠구구구궁……!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떨렸다.
휘리리릭!
짙은 안개 속에서 손우곤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뒤이어 달려오던 윤종승이 걸음을 멈추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펑! 퍼퍼엉!
윤종승이 이끄는 대원들이 장풍을 마구 쏘아내며 안개를 물리치고 있었다.
윤종승이 손을 들어 올리자 대원들이 장풍을 멈추고는 속속 모여들었다.
적랑단원들이 손우곤을 중심으로 모인 후에 당예설을 비롯한 당가의 무인들도 모였다.
“왜 멈추신 겁니까?”
윤종승이 묻자, 손우곤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쉿.”
“……?”
“너무 조용하지 않나?”
“……!”
그러고 보니 협곡에서는 조금 전에 쏘았던 장풍의 메아리만 아스라이 들릴 뿐 낯선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만치 위에서 남궁천과 백묘가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인지 검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당장 이곳에는 쏟아지던 화살도 보이지 않았고, 비명 소리나 기합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놈들의 공격이 멈췄군요.”
손우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뭔가 벌어지고 있는데, 뭔지 모르겠군.”
“일종의 방어진 같은 게 아닐까요?”
그때 앞서서 달려갔던 무인 하나가 새처럼 날아와서 옆에 착지했다.
휘리릭, 탁!
“대주님! 전방에 길이 끊겼습니다!”
“길이 끊어지다니?”
“막다른 길입니다. 아무래도 양쪽의 암벽을 무너뜨려 더 이상 위로 오르지 못하도록 막아버린 듯합니다!”
“하면 단주님이 고립 중이란 말인가?”
그때, 이번에는 경사진 아래쪽에서 백옥지단의 청운대주가 달려와서 소리쳤다.
“위쪽만 막힌 게 아닌 모양입니다. 아래쪽도 막혔습니다!”
적랑단원들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당예설이 고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아무래도 고립된 건 남궁 단주만이 아닌 모양이군.”
“우리도 더 이상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됐군요.”
이대주 유현의 말에 팽수혁이 칼등으로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갑자기 암벽이 무너졌을 리는 없고. 이것들이 침입자를 대비해서 장치를 해둔 거겠지.”
“본 대가 나서볼까요?”
윤종승이 손우곤에게 물었다.
윤종승이 포함된 사대원들은 장력이 주특기인 조직이었다.
마흔 명의 대원들이 일시에 장력을 터뜨린다면 길을 틀어막은 암벽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선 것이다.
더구나 윤종승은 폭렬갑을 착용했으니까.
하지만 손우곤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허술하지 않을 거야.”
“그럼 어떻게…….”
그때였다.
비교적 아래쪽에서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가 불쑥 솟구쳤다.
“으헉, 저, 저리 가악!”
“우왓! 뭐야? 이런……!”
푹!
“크아악!”
까강! 깡!
“아악!”
느닷없이 병장기 소리가 들리더니 비명과 고함이 어우러졌다.
“무슨 일이냐!”
청운대주가 놀라서 달려가려는데, 안개를 뚫으며 백운대주가 달려왔다.
“지금 아군끼리 서로 싸우고 있소!”
“아군끼리? 그게 무슨 말이오? 백운대주!”
“나도 알 수가 없소. 갑자기 안개가 붉게 변하더니, 대원들이 서로 칼부림을 하고 있소!”
“그런……!”
청운대주가 달려가려는데, 당예설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멈춰요!”
“멈추라니? 지금 내 수하들이 서로 상잔하는 중…….”
“환술이에요! 그보다 백운대주! 안개가 붉어졌다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그럼 다들 호흡을 최대한 참으세요! 붉은 안개를 흡입하면 환각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다들 숨을 참아라!”
“환각에 당할 수 있으니 호흡을 아껴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뿌연 안개가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적랑단원들이 저마다 숨을 한껏 들이켜고는 참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앞으로 말 두어 마디 하고 나면 끝이리라.
한마디 말이라도 아껴야 한다.
하지만 이미 붉은 안개 속에서 호흡을 꽤 이어갔던 자들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칼부림을 하고 있었다.
손우곤이 대주들과 당예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다들 흩어져서 수하들을 구하고 봅시다!’
‘알겠습니다!’
수신호와 눈빛으로 뜻을 주고받은 대주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윤종승은 그 자리에서 장풍을 사방으로 쏘았다.
퍼퍼퍼퍼퍼엉!
순식간에 붉은 안개가 물러나면서 주변 경광이 한눈에 드러났다.
마침 그의 눈에 서로 장력을 퍼부으며 싸우는 사대원들이 보였다.
파밧!
바닥을 박차고 날아간 윤종승이 사대원 중 한 명의 뒷덜미를 수도로 내려쳤다.
퍼억!
“커윽!”
붉은 안개를 흡입하고서는 눈이 뒤집혀 있던 사대원이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윤종승이 얼른 그를 떠받치고는 부대주에게 넘겨주었다.
‘부상자 데리고 한옆으로 물러나 있어라! 다른 대원들도 우선은 한쪽으로 모아!’
‘알겠습니다!’
수신호와 눈빛을 읽은 부대주가 부상자를 어깨에 들쳐 메고는 바닥을 찼다.
그 모습을 윤종승이 지켜볼 때였다.
스으읏!
달려가는 부대주 옆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순간 윤종승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돼!”
목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호흡도 상당량 빠져나갔다. 안개를 들이켜진 않았지만, 그만큼 호흡이 짧아지고 말았다.
하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부대주 옆에 나타난 그림자가 커다란 낫을 들고 휘두르자, 부대주의 목이 머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쉬컥!
툭, 데굴데굴……!
털썩, 쿠웅!
동료를 메고 달리던 부대주가 그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순간 윤종승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이런 개새끼가!”
파앙!
마치 개구리처럼 바닥을 짚자, 폭렬갑에서 장력이 폭발하면서 윤종승의 신형이 단숨에 그곳까지 날아갔다.
슈우우우욱! 꽈아앙!
허공에서 추락하며 일장을 뻗자, 폭렬갑에서 장력이 폭발하면서 바닥이 분화구처럼 움푹 파였다.
푸스스스스……!
붉은 안개와 뒤얽힌 먼지가 천천히 흩어지자 두건을 눌러쓴 사내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윤종승이 눈알을 굴려 아래를 보자, 부대주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된 채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이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새끼!”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지금껏 조직을 이끌어본 경험이 거의 없었던 윤종승이었다.
한데 대주가 되고 난 후 처음으로 실전을 겪는 셈이나 다름없는 싸움에서 부대주를 눈앞에서 잃으니, 정신적 충격이 상당했다.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자가 커다란 낫을 들고는 옆으로 스르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워서 마치 이승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뒈져라앗!”
윤종승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낫을 던 사내에게 몸을 던져갔다.
퍼어어엉!
폭음과 함께 폭렬갑에서 기공이 터져 나갔다.
하나 간발의 차이로 장력을 피한 상대가 그대로 대검을 휘둘러 왔다.
쉬이이이익!
검은 바람을 이끌며 날아든 낫이 윤종승의 목을 노리는 순간!
떠어어어엉!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팽수혁이 태도를 내리쳐 낫을 막아냈다.
결국 상대는 휘청거리며 물러나더니 이내 붉은 안개 속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젠장! 놓쳤네. 그나저나 윤종승 이 미친놈은 왜 소리를 지르고…… 으헉!’
무심결에 돌아보던 팽수혁이 화들짝 놀라며 성큼 물러났다.
콰아아앙!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또 작은 분화구가 생겼다.
윤종승이 장력을 내려찍으면서 생긴 것이다.
‘아니, 이 미친놈이 왜?’
팽수혁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윤종승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팽수혁에게 달려드는 게 아닌가?
“뒈져라, 이 괴물 새끼야!”
“이익! 정신 차려! 병신아!”
어쩔 수 없이 팽수혁이 몸을 뒤틀어 일장을 피하고는 그대로 태도를 휘둘렀다.
철썩!
마지막 순간 태도를 뒤트는 바람에 넓은 도면이 윤종승의 뺨을 후려쳤다.
휘청!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윤종승이 바닥을 향해 일장을 뻗으면서 가까스로 버텼다.
퍼엉!
“크윽……!”
소매로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낸 윤종승이 숨을 헐떡이고는 팽수혁을 보았다.
팽수혁 역시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태도를 고쳐 쥐었다.
‘이 새끼야, 갑자기 왜 이 지랄이야? 뒈지게 처맞고 싶은 거냐? 어엉?’
할 수 있는 한 눈빛으로 모든 욕설을 쏟아내며 노려보는데, 마침 윤종승이 이마를 짚더니 중얼거렸다.
“팽수혁…….”
‘정신이 든 건가? 너 때문에 호흡도 빠졌어!’
팽수혁이 눈알을 부라리자, 윤종승이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적무(赤霧)에 취해 버린 모양이다. 갑자기 네가 괴물 같은 놈으로 보였어.”
‘앉아서 운기조식이라도 해라. 내가 엄호해 주마.’
팽수혁이 수신호와 눈짓으로 뜻을 전하자, 윤종승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운공하는 건 소용이 없어. 그보다 이곳에 우리만 갇혀 있는 게 아닌 것 같아. 마인들도 같이 있어.”
‘그럼 그놈들도 우리와 같이 고립된 건가?’
“아니. 아무래도 그놈들만 이용하는 통로가 있을 것 같아. 그걸 찾아내면 이 외통수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하긴. 놈들이 암벽에 난 동굴로 들락거리는 것 같았으니까.’
“우선 그걸 찾아보자. 그리고 혹시나 내가 또 널 공격하면…….”
‘……?’
“날 안 아프게 제압해 줘. 흐흐.”
‘미친놈, 뒈지도록 패버릴 거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운기하고!’
“무리야…… 지금도 네가 자꾸만 괴물로…….”
짜아악!
팽수혁이 뺨을 후려치자, 한차례 휘청거린 윤종승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는 말했다.
“정신 차릴게. 어서 출구를 찾아보자!”
두 사람이 안갯속으로 다시 달려갔다.
* * *
푸푸푸푹!
붉은 안개를 가르며 날아든 암기 여섯 자루가 두건 쓴 사내 가슴과 배에 일렬로 나란히 박혔다.
쿠우웅!
그대로 쓰러진 두건의 사내에게 두 사람이 사박사박 다가왔다.
바로 당예설과 당우기였다.
‘누님, 이건 제가 잡은 겁니다.’
‘내 암기가 심장에 꽂힌 것 같은데?’
‘그 아래에 요혈에 박힌 것은 제 암기죠.’
당예설이 피식 웃고는 사체에서 암기를 뽑아 들어 챙겼다.
‘그나저나 이곳에 갇힌 게 우리만 아니라면…… 더 아수라장이 되겠군.’
‘이놈들 수가 아까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아요. 혹시 통로가 있는 게 아닐까요?’
‘그 통로를 찾기만 한다면 여길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건가?’
두 사람이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적무를 가르며 시커먼 대겸이 다시 떨어졌다.
쉬이이잇!
당예설이 얼른 당우기의 가슴팍을 쳐내며 멀어졌다.
슈콰아아앙!
그대로 바닥을 찍은 낫이 횡으로 움직이며 당우기의 허리춤을 베어갔다.
“어딜!”
당예설이 반사적으로 소리치면서 재빨리 암기를 쏘아냈다.
쓔아아아앙!
호흡이 빠져나가는 것을 감수하고도 소리친 것은 주의를 끌기 위함이었다.
따아아앙!
대겸으로 비수를 막은 사내가 두 장 정도 미끄러졌다.
그 뒤를 이번엔 당우기가 노리며 날아왔다.
촤아아아악!
당우기의 손에서 뿌려진 것은 당가에서 제조한 맹독이었다.
푸스스스스스스!
독액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지독한 냄새와 함께 타들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치이이익!
‘잡았어?’
당예설이 얼른 달려오며 눈짓으로 묻자, 당우기가 고개를 저었다.
‘놓쳤어요.’
‘큰일인데? 이대로면 전멸할지도.’
그때였다.
쿠우우우웅!
요란한 폭음과 함께 지진처럼 바닥이 떨리더니, 윤종승의 고함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다들 이곳으로! 출구다!”
두 사람이 동시에 흠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그런데 저놈은 어쩌자고 저렇게 소리를 질러대는 거야? 적무에 취하기 딱 좋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