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 성동격서聲東擊西
우위광의 말이 끝나자 강호노숙들은 엄중한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청풍이 묵직한 목소리를 꺼냈다.
“대의적인 명분은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무림맹의 하늘을 뒤집는 행위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반역이 아니라 혁명처럼 보여야 한다.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무림맹은 힘을 얻지 못한다.
마교나 사파들이야 여론 따위를 무시하면서 설쳐댈 수 있겠지만, 무림맹은 다르다.
굉장히 귀찮고 피곤한 작업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여론의 힘으로 무림맹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얻을 때가 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것은 비단 황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민심을 얻은 무림맹은 세상 곳곳에 눈과 귀를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우위광이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명분으로 따지면야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어디 있겠소? 현재 맹은 엉망진창이오. 그간의 멀쩡한 조직을 와해하고, 남궁가가 자기들 입맛에 맞는 조직만 남겨둔 채 대대적인 개편을 진행하고 있소. 그뿐만이 아니오. 사파 나부랭이들과 손을 잡고 무림맹을 마음대로 휘어잡고 있지 않소이까? 묵천악이 마교와 손을 잡았다지만, 남궁검이 사파와 손을 잡은 것도 어찌 보면 같은 짓이 아니겠소? 마교를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허울 좋은 핑계일 뿐, 결국 사파의 힘을 빌려 본 맹을 마음대로 주무르려는 수작이오.”
“하지만 흑무련이 화친을 제안하면서 상당한 상납금을 내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요. 누가 봐도 너무 과한 금액이지 않소? 이것이 정말 순수한 상납금이라면 대단한 일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수상하게도 볼 수 있는 문제 아니오? 장문인, 여론이란 갈대와 같은 법이 아니겠소. 바람이 어디로 부느냐에 따라 눕는 방향도 달라지는 법. 그리고 바람은 늘 변덕스럽게 마련이지.”
“흐음.”
청풍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정혜 사태도 수긍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사실 급작스럽게 남궁가가 권력을 잡은 만큼, 명분으로 따지면 여기저기 공략할 부분은 많을 거예요. 이런 경우는 결국 결과가 명분이 되겠지요.”
“역사는 늘 승자의 편이니까.”
말을 받은 사람은 청성파 장문인 정극진인이었다.
우위광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역시 자신이 예상한 대로다.
곤륜파에서 모처럼 무림칠성이라는 인재를 배출했다.
늘 반쯤은 새외 세력 취급을 받던 곤륜파가 아니던가?
그러던 차에 장문인이 무림칠성의 경지에 올랐으니, 그간 웅크리고 있던 문파로서는 몸이 근질거릴 만도 했을 터다.
사실 곤륜파가 구파일방에 속하긴 하지만, 유독 멀리 떨어진 지역 특성 때문에 무림맹에서도 소외당하던 곳이었다.
한데 이 기회에 맹의 핵심으로 떠오를 수가 있을 테니 청풍으로서는 이보다 더 달콤한 열매도 없으리라.
그런 속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우위광이 살살 부채질을 했다.
“그간 곤륜파는 막강한 힘을 보유하면서도 변방에 위치한 탓에 여러모로 소외당하지 않았소이까? 이젠 곤륜파도 기지개를 켤 때가 되었지요. 더구나 청풍진인께서는 무림칠성의 반열에 올랐으니, 이제는 무림 정점에서 강호 평화를 위해 힘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오.”
“과찬입니다, 원주님.”
청풍이 짐짓 겸양을 갖춰 대답했지만 내심으로는 흐뭇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침내 오랜 숙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아닌가?
그러한 기대를 가지는 것은 비단 곤륜파뿐만이 아니었다.
사천에 위치한 아미파와 청성파 역시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곤륜파보다는 무림맹에서 가까운 위치라지만, 사천에서는 당가의 힘이 워낙 강하지 않던가?
때문에 무림맹에서 인재를 차출할 때면 늘 당가가 일 순위였다.
자연스레 아미파와 청성파에게는 기회가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말로 두 문파에도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러한 갈망을 잘 알고 있는 우위광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미파와 청성파도 언제까지 소외될 수는 없지 않겠소? 부디 위기에 빠진 맹을 구해주시오.”
“원주님의 뜻을 잘 받들어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자, 우위광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고맙소. 점창파의 반응은 좀 어떻소?”
“그러잖아도 지금 설득하는 중입니다. 역시나 점창파도 원주님의 고견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분명 이번 거사에 힘을 보탤 것입니다.”
정극진인의 말에 우위광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역시 정극진인이오. 점창파가 힘을 보태준다면 우리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소.”
“그보다 무당은 어떻습니까? 무당파가 조건 없이 거들어준다면 더 고민할 것도 없을 텐데요.”
이번엔 청풍이 슬쩍 나서며 물었다.
우위광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무당도 이번만큼은 본 원의 뜻을 받아들여 주었소.”
“오오, 그것 참 잘됐군요. 다만 무당이…….”
“허허, 걱정하지 마시오. 무당은 예나 지금이나 맹의 행정적인 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소.”
우위광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
청풍으로서는 가장 경계하던 상황이었기에 비로소 한시름을 놓으며 대꾸했다.
“그렇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자, 이제부터 구체적인 작전을 세웁시다. 먼저 본 맹에서 가장 큰 남문각은 어느 분이 맡아주시겠소?”
“제가 맡도록 하지요.”
청풍이 망설임 없이 나서자, 우위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하면 서문각은? 참고로 서문각주가 나름 무공에 조예가 깊은 편이오. 물론 여러분의 무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제가 맡을게요.”
정혜 사태가 선뜻 나서자, 우위광이 이번에도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하겠소. 마지막으로 동문각은?”
“제가 맡지요.”
정극진인의 말에 우위광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세 분께 잘 부탁드리겠소. 이번 거사는 속도가 생명이오.”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변수는 없겠습니까? 무당파가 마지막에 변심을 한다든지.”
“그럴 일은 없을 거요. 다만…….”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 아니, 두 가지려나?”
“뭡니까?”
“흐음. 본 원에 머물고 있는 패력궁이오.”
“아……!”
가만히 듣고 있던 정혜 사태가 탄성을 터뜨렸다.
확실히 패력궁이라면 자신들과 대적할 수 있는 자다.
앞뒤가 꽉 막힌 외골수.
남궁검과는 또 다른 의미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내.
그가 만약 남궁검과 뜻을 모은다면 상당히 성가신 존재가 되리라.
더구나 패력궁은 근접전에 익숙한 무인들에게 상당히 골치 아픈 상대였다.
“확실히 방심할 문제가 아니군요. 거기에 남궁검 맹주가 최근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인지 무위가 비약적으로 향상된 것 같더군요.”
청풍이 마지막 연회에 본 남궁검의 무위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여몄다.
확실히 그 당시 남궁검의 발검술은 자신이 알고 있던 무위를 훨씬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우위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희미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거기에 또 하나. 현재 맹에 주둔하고 있는 사파 놈들이 어찌 나올지 알 수 없다는 거요.”
“사파 놈들까지요?”
정혜 사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우위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파 나부랭이들이 남의 집안싸움에 관심이나 있을까요? 누가 집주인이 되든, 그놈들은 그저 할 일만 하고 돌아가면 될 텐데요.”
“그렇긴 한데, 이건 그저 늙은이의 감이라고 보면 될 거요. 왠지 그놈들이 남궁가를 돕지 않을까 우려되는구려.”
그러자 청풍이 껄껄 웃으며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원주께서는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나와 덕양이 있지 않습니까? 사파 나부랭이들 따위가 아무리 설쳐 봐야 우리를 뛰어넘진 못할 겁니다.”
“흐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자자, 괜한 걱정은 하지 마시고, 혈서부터 작성하지요.”
“그럽시다. 오늘은 피의 맹세로 우리의 결의를 다집시다.”
원주가 말을 마치자, 강호노숙들이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도검을 이용해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냈다.
* * *
쿠파파파파파! 파팡!
눈으로 좇기도 힘들 만큼 빠른 공방이 이어진다.
남궁천과 적혈마는 허공에서 격돌하며 손과 발을 수십 번 교차했다.
두 사람의 장력이 서로 부딪칠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격동하면서 안개가 멀찍이 물러났다.
파라라라라라!
마침내 남궁천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날아올랐다.
툭!
바닥을 찍어 찬 적혈마가 남궁천의 뒤를 바짝 쫓았다.
마침 남궁천이 몸을 뒤집으면서 물구나무를 선 것 같은 자세로 검을 부렸다.
남궁천을 바짝 뒤쫓던 적혈마도 검을 휘두르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꽃이 마구 터졌다.
까가가가강!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안개가 삽시간에 멀어지곤 했다.
그렇게 눈으로 좇기도 힘들 만큼 검을 섞던 두 사람이 일순간 서로의 심장을 향해 일장을 뻗어냈다.
뻐어어어엉!
촤츠츠츠츠츳!
대여섯 장이나 미끄러지며 멀어진 두 사람.
적혈마가 욱신거리는 손아귀를 쥐었다가 펴길 반복하면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과연. 듣던 대로 괴물 같은 놈이로군.”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지.”
남궁천이 입매를 말아 올리고는 대꾸했다.
적혈마가 실소를 터뜨렸다.
“어린 녀석이 기고만장했구나.”
“그게 어린것들의 장점 아니겠나?”
“언제까지 네놈이 깐죽거릴 수 있는지 보지.”
“얼마든지.”
파바밧!
순간 적혈마가 다시 바닥을 차고 날아갔다.
위이이이이잉!
적혈마의 붉은 빛깔의 검이 공명을 터뜨리며 안개를 갈랐다.
위이이이이잉!
남궁천의 벽라검 역시 붉은 빛깔로 물들더니 공명을 일으키며 안개를 가른다.
‘이놈……?’
적혈마의 붉은 눈동자가 퉁방울처럼 커졌다.
동시에 그는 보았다.
남궁천의 눈동자 역시 붉어진 상태라는 것을.
‘초견파공안인가!’
하나 이해할 수가 없다.
마공은 공력의 질이 정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정사의 공력은 어느 정도 서로 공유가 된다지만, 마공은 근본부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정공을 익힌 자가 마공을 흉내낸다고 해서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는 없다.
그런데……!
쩌어어어엉!
남궁천과 적혈마의 검봉이 서로 정확하게 부딪쳤다.
검과 검이 끄트머리가 맞닿으면서 폭음이 터져 나오자 안개가 다시 한번 사방으로 흩어졌다.
적혈마가 다시 한번 검을 내질렀다.
위이이이잉!
적혈검이 공명을 일으킨다.
그때,
위이이이잉!
벽라검도 공명을 일으킨다.
‘이런 미친……?’
적혈마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사이, 벽라검은 다시 한번 적혈검과 정확히 끝이 맞닿았다.
쩌어어어엉!
“……!”
적혈마가 어금니를 꾹 씹더니 이번에는 빠른 속도로 검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슈슈슉!
슈슈슈슈슈슈슉!
벽라검도 똑같은 속도로 내질러진다.
따다다다다다다당!
검봉끼리 정확하게 맞닿으면서 마치 철판에 콩을 볶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만약 제삼자가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으리라.
이것은 얼핏 보면 무공 고수 두 명이 서로 검술을 겨루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공력 대결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둘 중 누군가의 공력이 약해지게 된다면, 그 순간 검신이 부서지고 뼈마디가 잘게 부서지는 것만 같은 고통을 겪게 되리라.
내상을 입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물론, 지금 이들의 경이로운 전투 상황을 지켜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곳곳에서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기에.
특히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백묘는 오혈마를 동시에 상대하느라 숨 돌릴 틈도 없는 상황이었다.
떠어어어엉!
마침 마지막 검격을 주고받은 남궁천과 적혈마가 다시 한번 멀찍이 떨어졌다.
푸쉬이이이이.
검신에 안개가 맞닿자 연기가 일어나면서 소리가 울린다.
두 사람의 전신에서도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초견파공안으로 내 적혈공까지 복사하다니. 과연 대단한 재능이군.”
“내가 좀 대단해.”
“클클. 하나 자네 부하들은 어떨지?”
적혈마가 붉은 눈동자를 슬쩍 사선으로 내려 깔았다.
저만치 아래에서는 적랑단과 당가의 무인들이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마혈진은 그리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적혈마의 입매가 귀신처럼 찢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