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32화 (431/508)

432. 성동격서聲東擊西

콰콰콰아아앙!

한차례 폭음이 터지고 나자 주변이 고요해졌다.

쌍장을 뻗어내며 화살을 막아내던 윤종승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일대주님! 지금입니다!”

그 소리를 받아서 손우곤이 외쳤다.

“전원 공격!”

“흐아아아압!”

“마교 놈들을 쓸어버리자!”

적랑단원들이 일제히 고함을 내지르며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윤종승을 비롯한 사조원들은 열 명씩 흩어지면서 진군하는 무인들을 엄호했다.

때문에 안갯속에 휩싸인 계곡을 밖에서 지켜본다면 마치 아래쪽에서부터 요란한 천둥이 거슬러 올라오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순식간에 전시 상황이 벌어지자 누구보다 당황한 사람은 바로 청운대주와 백운대주였다.

지난 세월 분타주를 철석같이 믿으며 동고동락했던 자들이었다.

한데 남궁천의 손에 분타주의 목이 댕강 잘리고 나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청운대주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화살 한 자루가 안개를 뚫으며 곧장 날아들었다.

쒸에에에엑!

“하앗!”

일순 날카로운 기합성이 들리더니 비수 한 자루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화살을 두 동강 내버렸다.

슈캉!

토막 난 화살은 추진력을 잃은 채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두 눈을 부릅뜬 청운대주가 고개를 뻣뻣하게 돌리자, 언제 다가온 것인지 당예설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신 차려. 무림맹주가 마교를 키워주고 있던 판국에 분타주가 마인이라고 해서 놀랄 것도 없는 세상이야. 강호에서는 적응력이 곧 생명이라는 것 모르나?”

“……!”

“너희들이 인정을 하든 안 하든 분타주 위종악은 은마령이었다.”

“하지만!”

“……?”

“대체 무슨 근거로…….”

청운대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따지고는 있지만 여러 정황상 위종악이 마교와 한패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 상황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다만 궁금했다.

남궁천이 대체 무슨 근거로 위종악의 정체를 알아낸 것인지.

의심이야 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단 일격에 목을 날려 버리지 않았나?

의심을 넘어 확신에 찬 행동이었다.

당예설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위종악을 믿고 싶은 마지막 발악 같은 건가? 그래도 소용없어. 위종악은 은마령이었어. 남궁 단주를 암살하려던 자 중 기절했던 녀석이 불었지. 이제 됐나?”

“그런…….”

청운대주가 허탈한 심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당예설이 몸을 돌리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정 못 믿겠으면 지금이라도 저기 굴러떨어진 위종악의 머리를 잡고 오열하라고. 그러다가 화살 맞아 뒈지는 것도 나름 감동적이겠네.”

말을 마친 그녀가 짜증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왠지 그녀 자신의 말투가 남궁천을 조금 닮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나저나 남궁천…… 어디로 간 거지?’

안개가 짙어서 보이지 않는다.

어쨌거나 위쪽을 향했으니 부지런히 걸음을 놀릴 수밖에.

여전히 요란한 천둥소리는 계속해서 위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정말이지 대책 없이 잘난 놈이랄까?’

처음에는 남궁천을 이용하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말 남궁천이 남자로 보인다.

물론 이뤄지기 힘든 조건이라는 건 안다.

더구나 남궁천은 자신에게 일절 관심도 없지 않은가?

하나 이성을 향한 연정이 어디 쉽게 정리가 되던가?

마음을 다잡으려고만 하면 남궁천은 뜻밖의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그래,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당예설은 백옥지단을 나서기 전, 남궁천이 혈검으로부터 자백을 받아내던 때를 떠올렸다.

* * *

짜악!

지객당으로 들어온 남궁천이 기절한 혈검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쳐서 깨웠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혈검이 남궁천을 알아보고는 사색이 되어 더듬거렸다.

“살, 살려주…… 아니, 죽여주시오! 제발! 이젠 그냥…… 죽여주시오! 끄흑!”

“그건 네가 하는 걸 봐서.”

남궁천이 의자를 끌고 와서 혈검의 맞은편에 털썩 걸터앉았다.

당예설은 한옆에 서서 남궁천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확실히 지금의 남궁천은 어딘지 모자란 아이처럼 굴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바로 저런 모습.

저 낯설고도 어울리는 모습 때문에 당예설은 마음이 흔들렸다.

끝도 없이 가라앉을 것만 같은 눈빛, 무감한 표정, 어딘지 벼랑 끝에 서서 홀로 고독과 싸우는 중년인처럼 느껴지는 분위기.

그렇다.

이따금씩 남궁천은 당예설보다 훨씬 연배가 높은 사람처럼 보인다.

대체 무엇이 그런 느낌을 주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만약 진천랑이 살아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를 한 번 보았더라면 지금의 남궁천과 꼭 닮지 않았을까?

기록에 따르면 진천랑은 매우 거칠게 살면서 때론 아이 같고, 때론 세상에 달관한 자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지금 남궁천과 상당히 닮은 부분이 있다.

어쨌거나 남궁천이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자, 혈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어렵게 물었다.

“귀검은…… 어디에 있소?”

“네 걱정이나 해, 새끼야.”

“…….”

“뭐, 꼴에 동료라고 궁금하다니까 말해주지. 너는 더 이상 혈귀쌍검이 아니야. 무슨 뜻인지 알겠지?”

혈검이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귀검이 죽었다는 뜻.

이 상황에서 묘한 생각이 든다.

아쉬움과 부러움.

누군가의 죽음을 부러워하게 될 줄이야.

그러고 보면 남궁천은 정말로 악마가 아닌가?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남궁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혈검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앉은 채로 물러났다.

“살, 살려…… 아니, 죽여주시오! 제발 이제 그만 용서해 주시오!”

“사람은 언젠간 뒈져. 내가 굳이 수고롭게 죽일 필요가 없지.”

“부,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그만……!”

“그럼 말해.”

“뭘 말입니까?”

“귀검에게 죽음의 은혜를 내린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뭐, 뭐요?”

“불었거든.”

“……!”

“고문을 견디다 못해 위종악이 마교도라는 사실을 불었거든. 그래서 이젠 네가 쓸모없어졌다. 그래서 끝까지 마인으로서 지조를 지킨 너에게는 벌을 내려야 하지 않겠나?”

“무슨 벌을…….”

“내가 너에게 이 기술을 시전하면, 너는 지금부터 죽지 않고 영원한 고통에 갇히게 될 거다. 내가 네 몸에 불어넣은 공력이 제멋대로 설쳐대면서 전신의 뼈마디가 녹아 버릴 것만 같은 고통을 선사하지. 혹시 들어는 봤나?”

“……?”

“만년지옥환멸연화무간절영천지무정겁줄무한영혼파쇄술(萬年地獄幻滅蓮花無間絶影天地無情劫綴無限靈魂破碎術)이라고…….”

“……!”

“물어봤으면 대답을 해, 이 새끼야.”

남궁천이 뒤통수를 후려치자, 혈검이 얼른 소리치며 답했다.

“그, 그런 무시무시한 고문 기술은 들어본 적 없습니다!”

정말이지 당장 울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었다.

지금까지 남궁천이 자신에게 가한 고문도 지옥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정말이지 끔찍한 기억이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한데 이제부터는 죽지도 못한 채 그보다도 더 극심한 고통을 평생 겪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저 이름도 더럽게 긴 고문 기술에 당해서…….

마침내 남궁천이 혈검의 어깨를 탁 붙들었다.

그러자 혈검이 눈물을 줄줄 쏟아내며 소리쳤다.

“귀검이 어디까지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모든 걸 말하겠습니다! 위종악은 은마령입니다! 무림맹에서 죄수들의 시체를 공급받아 용취곡 분타로 넘기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용취곡 분타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용취곡에서 사람들이 실종되는 것 역시 분타의 소행입니다!”

“흐음. 그럼 백옥지단의 다른 무인들은?”

“제가 아는 한 은마령은 위종악 분타주 한 명입니다. 다른 마인은 없습니다.”

“그렇군. 그나마 다행이네.”

“이제…… 부디…… 죽여주십시오!”

“그 전에, 당 가주는 어떻게 됐지?”

“거기까진 저도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 혈검을 바라보는데, 마침 당예설이 밖을 슬쩍 돌아보고는 말했다.

“남궁 단주. 밖에서 기척이…….”

“예, 들었습니다.”

말을 마친 남궁천이 혈검을 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너의 죄가 무겁지만, 이실직고했으니 죽음의 안식을 주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남궁천이 냉소를 짓고는 지풍을 날렸다.

푹!

순식간에 이마에 구멍이 뚫린 혈검이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뒤이어 문이 벌컥 열리면서 위종악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곧 남궁천과 당예설, 그리고 쓰러진 혈검을 번갈아보다가 딱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서…… 뭐 하셨소?”

“뭐 하긴요? 이제 백묘를 추격할 채비를 하고 있었죠.”

“이럴 시간이 없소. 서둘러야 하오.”

“괜찮아요. 추향응이 있으니까.”

“그래도 너무 늦으면 저쪽에서 대비를 하지 않겠소?”

“으음. 그건 그렇네요. 그럼 서두르죠.”

남궁천이 대충 대답하며 채비를 갖추려고 하자, 위종악이 눈알을 굴려 쓰러진 혈검을 보았다.

“커흠! 저자는 왜……?”

“아, 이제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죽였습니다.”

“아까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던데…….”

“아, 죽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지 물었죠.”

“그래서 뭐라고 하오? 뭔가…… 특별한 말이라도 했소?”

위종악의 얼굴에 긴장이 서린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전 남궁천의 고문 기술을 보면서 혈검이 끝내 입을 다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별말 없었습니다. 어차피 고문을 한 것도 아니라서. 지단주님 말씀대로 괜히 서로를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보다는 그냥 백묘를 추격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죠.”

“끄음. 그렇구려. 잘 생각하셨소.”

위종악이 마음 한편으로 찜찜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걸음을 옮기면서도 쓰러진 혈검을 힐끔거렸다.

* * *

상념에서 빠져나온 당예설이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남궁천…….”

“그놈은 누님이 안중에도 없던데요?”

언제 다가왔는지 당우기가 옆에서 불쑥 말했다.

화들짝 놀란 당예설이 얼굴을 붉히고는 쏘아붙였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그보다 언제……!”

“저야 기척을 냈지만, 동생이라고 너무 방심하는 거 아니에요? 아무튼 꿈 깨세요. 저 녀석은 여자에게 관심이 통 없으니까.”

“누가 뭐라니?”

당예설이 짐짓 퉁명스레 대꾸하자, 당우기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찾아내면 다 일러야겠어요. 누님이 맹주의 손자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고.”

“아버지는 오히려 좋아하실걸?”

“아, 그런가?”

두 사람이 이내 웃음을 터뜨리다가 곧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버지를 반드시 구합시다.”

“아버지를 반드시 구하자.”

* * *

무림맹 인근에 위치한 천하객잔.

한밤중 주변을 살피며 천하객잔으로 은밀히 들어선 자는 죽립을 푹 눌러쓰고 있었다.

“어찌 오셨습니까?”

주인장이 직접 나와서 맞이하자, 죽립을 눌러쓴 자가 슬쩍 고개를 들어 얼굴을 드러내 보였다.

순간 주인장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오셨군요. 다들 귀빈실에 모여 계십니다.”

“수고했네.”

말을 마친 죽립인.

그는 바로 장로원주 우위광이었다.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실내를 한차례 훑어보고는 계단을 따라 가장 위층까지 올라갔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것 같은데도 기묘한 보법을 사용하는 것인지 순식간에 최상층까지 올라갔다.

마침내 그가 귀빈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딘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강호노숙들이 고개를 돌렸다.

“원주, 오셨소?”

무거운 목소리를 꺼낸 사람은 바로 곤륜파 장문인, 청풍이었다.

우위광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궁천이 신무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거사를 일으킬 시간이 다가옵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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