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 성동격서聲東擊西
콰아앙!
적마동 앞에서 폭음이 터졌다. 동시에 백묘가 튕기듯이 물러나면서 피를 울컥 토했다.
“크헉!”
촤츠츠츠츳!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선 백묘가 입가의 선혈을 닦아내며 숨을 헐떡였다.
“분타주님!”
“백묘,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군.”
“설마 정말 저 녀석의 말을 믿으시는……!”
“상관없다.”
“예?”
“네가 실제로 본 교를 배신했든, 아니든 무관하다. 중요한 건 너의 실수로 본 교가 무림맹에 노출되었다는 것. 이는 분명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그에 대한 응징이다.”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남궁천과 적랑단을…….”
“너 혼자 저들을? 허세가 늘었군. 갈수록 실망이야.”
“분타주님!”
“오혈마(五血魔).”
“예, 분타주님!”
순간 적혈마 뒤로 시커먼 붉은 피풍의를 두른 사내들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적혈마의 호신위들이자, 직속 수하들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들이었다.
백묘가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사이, 적혈마가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끌고 와라.”
“복명!”
스르르르.
검은 연기처럼 흩어진 오혈마가 쏜살같이 이동한다. 마치 연기가 너울거리며 춤을 추듯 이동하는 것만 같다.
스스스스슷!
눈 깜빡할 사이에 오혈마에게 둘러싸인 백묘가 재빨리 쌍장을 뻗어냈다.
“하아앗!”
퍼퍽!
하나 이미 내상을 많이 입은 백묘의 쌍장은 그다지 효력이 없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오혈마 중 두 명의 복부에 작렬했지만 옷자락조차 찢어내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백묘는 오혈마에게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거친 손길에 사로잡혀서 질질 끌려왔다.
그러는 사이 남궁천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발치에 굴러떨어진 위종악의 얼굴을 보면서 능글맞게 중얼거렸다.
“지단주님,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뭔지 알아요?”
물론 시체가 대답할 리가 없기에 남궁천은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바로 남의 집안싸움을 구경하는 거지. 지단주도 그리 생각하죠? 이런, 이제 보니 반대쪽을 보고 계셨네?”
너스레를 떤 남궁천이 발끝으로 위종악의 머리를 툭 걷어찼다. 그러자 한참을 굴러간 위종악의 머리가 정확히 비스듬히 기울면서 가장 높은 곳의 적마동 앞을 응시했다.
정말이지 잘린 모가지가 두 눈을 부릅뜨고선 적마동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구경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 기암괴석들 사이에서 미묘한 빛줄기의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남궁천만이 알아볼 수 있는 희미한 변화였다.
원래 기운은 실제를 앞서는 법이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 먼저 눈빛이 변하게 되고, 눈빛이 변하기 전에 살기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살기가 일어나기 전에 살심이 생기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초식 동물이 살기를 뿜어내는 맹수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몸이 굳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남궁천은 비탈진 언덕을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빛줄기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남궁천이 툴툴 웃었다.
“거, 어지간하면 하나만 하시지. 집안 정리를 하시든가, 바깥 청소를 하시든가. 너무 욕심내면 둘 다 엉망진창이 될 텐데?”
내뱉는 말과는 달리 남궁천의 눈이 예리하게 비탈길을 훑어갔다.
대략 오십여 명.
운공 형태로 보아서는 전부 궁수들이다.
거리도 딱 적당하다.
비탈진 언덕 중턱쯤 자리를 잡으면 저들은 동시다발적으로 화살을 쏘아댈 게 분명하다.
남궁천이 손을 까딱였다.
손우곤이 재빨리 곁으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광서성 쪽은 어때?”
“백옥 지단에서 출발할 때쯤 소식이 왔습니다.”
“됐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도록.”
“예?”
손우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다가 이내 남궁천이 전방을 싸늘하게 훑어보는 것을 보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둔해. 실전 겪은 지 조금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물러서 어쩌겠어? 돌아 가면 특훈부터 하자.”
“아…….”
“왜? 싫어?”
“아닙니다!”
“좋아. 이제 곧 안개가 모여들면 소나기가 내릴 거야. 방어는 사 조 중심으로.”
“존명.”
손우곤이 진중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윤종승이 이끄는 사 조는 적랑단에서도 방어 역할을 중점적으로 맡는 조직이었다.
손우곤이 돌아가서 전음으로 지시를 내리자 적랑단원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들도 이 을씨년스러운 협곡 안에서 뭔가 사달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오혈마는 백묘를 질질 끌고 와서 적혈마 앞에 내동댕이쳤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남궁천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동안 마침내 주변에서 모여들던 안개가 자욱하게 시야를 메우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남궁천이 소리치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는 적랑단이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정비하는 소리가 들렸고, 전방에서는 시위를 떠난 화살이 귀곡성을 터뜨리며 날아들었다.
쒸쒸쒸에에에엑!
협곡 사이에서 수백 자루의 화살이 날카로운 소리를 울리자 암벽이 서로 메아리치면서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팟!
남궁천은 일절 돌아보지도 않고 바닥을 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파파!
그야말로 사람이 펼치는 경공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이전보다도 비약적으로 상승한 경공술.
‘청풍이 보면 기절하려나?’
그랬다.
지금 남궁천이 펼치는 경공은 곤륜파의 운룡대구식이었던 것!
일전에 청풍이 무림맹을 찾아와 시범을 보여주었을 때, 남궁천이 유독 유심히 지켜보았기에 곧장 응용할 수 있었다.
쉭! 쉬쉭! 쉬이익!
타타타타타……!
수많은 화살이 남궁천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바닥에 박혀든다.
하나 남궁천은 이미 화살의 경로를 모조리 꿰뚫고 있었기에 일찌감치 모든 공격을 피해낸다.
그야말로 소나기 사이로 바람처럼 내달리는 것만 같다.
한편 제사조를 이끌고 앞장선 윤종승이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다.
“방벽진(防壁陣)을 발동하라!”
“존명!”
적랑단원 사 조가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기운을 끌어 올리더니 쌍장을 뻗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쌍장을 뻗은 사람은 바로 윤종승이었다.
콰콰아앙!
폭렬갑까지 착용한 윤종승의 손바닥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터졌다. 그 순간, 매섭게 날아들던 화살들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다.
곧이어 조원들이 쏟아내는 장력들이 막강한 기운을 뿜어내며 허공에서 터졌다.
콰콰콰콰콰콰콰아앙!
그야말로 천지가 격동할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무더기로 쏟아지는 화살들이 속절없이 튕겨 나가자, 다른 조원들은 어쩌다가 하나씩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남궁천은 뒤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잘하고 있나 보군!’
파파파파파!
여전히 바람처럼 달린 남궁천이 가장 먼저 맞닥뜨린 적을 향해 벽라검을 뽑아 들었다.
쉬이이이잇! 철컥!
일검을 후린 후 검집에 갈무리하자, 머리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진다.
그때는 이미 남궁천이 다음 마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쉬이이잇, 철컥!
쉬이이잇, 철컥!
짙은 안개 때문에 남궁천이 지척에 이를 때까지 마인들은 눈치도 채지 못한다.
하지만 남궁천은 적의 위치를 귀신처럼 눈치채고 있었다.
안개를 뚫고 시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줄기 때문이다. 오방색의 빛줄기가 곳곳에서 번쩍이고, 그때마다 남궁천은 이동 경로에 걸린 빛줄기로 날아든다.
다른 사람들은 남궁천이 어떤 방식으로 공력을 확인하는지 모른다.
그저 초견파공안의 재능이 있다고만 생각할 뿐.
쉬이이잇, 철컥!
이번에도 마인 하나의 목을 뎅겅 잘라낸 남궁천이 시선을 한 곳에 고정했다.
‘어디 보자, 오면서 다섯. 위로 남은 건 셋.’
앞으로 세 명의 적을 더 베어내면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궁수들 중에서도 가장 강맹한 빛을 뿜고 있는 상대가 있다.
아마도 궁수들을 이끄는 수장이리라.
파밧!
남궁천이 다시 바닥을 차며 질풍처럼 내달렸다.
파파파파……!
그러는 중에도 저만치 도열한 궁수들은 쉴 새 없이 화살을 날려대고 있다.
아래쪽에서는 윤종승을 필두로 한 제사조원들이 천지가 개벽할 소리를 울려대며 방벽진을 구사하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남궁천이 적의 목을 가차없이 썰어버려도 비명 따위가 들릴 리 없다.
마침내 남궁천이 몸을 훌쩍 날리자, 그의 다리가 허공을 박차면서 예닐곱 걸음을 날아갔다.
운룡대구식!
그야말로 용이 구름을 타고 노니는 듯한 움직임.
순식간에 기암괴석을 뛰어넘어 궁수 앞에 다다른 남궁천이 그대로 벽라검을 수직으로 내려쳤다.
“하앗!”
쩌어어엉!
엉겁결에 활을 들어 올리며 막아낸 궁수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어, 어떻게……?”
그는 도저히 이 상황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저 아래에서 천둥처럼 울리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튕겨 나가는 것도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인데, 남궁천이 코앞에서 튀어나오다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무슨 곤륜파의 운룡대구식이라도 익혔단 말인……!
‘아뿔싸!’
궁수는 뒤늦게 자신이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상대가 누군가?
초견파공안의 재능을 지닌 남궁천이 아닌가?
하지만 생각을 더 이상 이어갈 수는 없었다.
어느새 남궁천이 빛살처럼 날아들더니 바로 앞에서 벽라검을 휘둘러 온 것이다.
쉬이이이이잇!
“흐업!”
궁수들 중에서도 수장인 사내가 헛바람을 삼키며 뒤로 재빨리 물러났다.
하나 마지막 순간, 남궁천의 보법이 급변했다.
파밧!
그대로 옆으로 지나칠 줄 알았던 벽라검이 빙글 몸을 틀더니 곧게 내질러 오는 것이 아닌가?
“안……!”
푸욱!
“커억!”
검첨이 그대로 궁수의 목을 찢으며 틀어박혔다.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던 궁수가 쓰러지려는 찰나, 남궁천이 득달처럼 달려들더니 유려한 손놀림으로 궁수에게서 대궁을 뺏어 들었다.
“크기도 딱 좋군!”
궁수장이 대궁을 사용하는 건 정말 운이 좋은 셈이었다.
이걸로 패력궁의 궁술을 거의 흡사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됐으니까.
물론 이 활이 패력궁 정도의 무위를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어쨌거나 남궁천은 망설일 것도 없이 화살 하나를 주워 들고는 대궁의 시위에 재웠다.
빼애애애액……!
남궁천은 호흡을 잠시 멈추고 저만치 강렬하게 타오르는 빛을 빤히 응시했다. 그 빛은 틀림없이 분타주의 것이리라.
다음 순간, 남궁천이 시위를 놓았다.
패애애애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쒸에에에엑!
안개를 뚫으며 날아간 화살은 곧장 적혈마를 노렸다.
따아아아앙!
느닷없이 나타난 화살에 적혈마가 반사적으로 돌아서면서 검을 휘둘렀다.
지이잉. 지이잉……!
화살 한 자루를 쳐냈을 뿐인데도 검을 쥔 손바닥과 팔뚝이 저릿하게 울린다.
“웬 놈……!”
적혈마가 휙 돌아보며 눈에 힘을 주자, 놀랍게도 안개 사이로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남궁천까지 시야가 확보됐다. 마치 예안기공처럼 눈으로 한 줄기 공력을 발산하여 시야를 확보한 것이다.
“남궁천.”
적혈마가 나직이 읊조리자, 안개를 뚫은 시야 너머에서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거야? 다시 해봐. 아무래도 안개 때문에 선명하게 보진 못해서 말이야. 참, 백묘는 그만 괴롭히라고. 그래도 모처럼 날 도와주었는데, 이대로 죽일 수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