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 닥쳐라, 이노옴!
용취곡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깊숙한 곳.
기암괴석과 짙은 안개로 둘러싸인 이곳은 세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높은 암벽에는 자연스레 생긴 동굴들이 군데군데 퍼져 있었는데, 그 입구를 괴이한 형상으로 양각했기에 마치 마귀의 아가리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곳의 마인들은 그 동굴들을 각각 전각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가파른 바위와 산비탈 사이로 어렵게 올라갈 수 있는 길들은 마치 이 신비로운 장소의 입구를 숨기려는 듯 험난하게 뻗어 있었다.
그렇게 구불구불 이어진 비탈길을 올라가다 보면 어두운 빛깔의 깃발들이 기암괴석 사이에서 바람에 나부끼며 으스스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전각으로 사용되는 각 동굴 안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기도와 주문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나 그들 뒤에 숨겨진 비밀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될 것이 분명했다.
동굴마다 피어오르는 희미한 불빛은 삭막한 분위기에 더욱 묘한 느낌을 더했다.
동굴 외곽에는 고리를 이루며 놓인 돌들과 의식을 위한 도구들이 복잡하게 놓여 있었다.
이따금씩 검은 두건을 쓴 자들이 민첩하면서도 은밀한 동작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이곳이 용취곡에 자리 잡은 마교의 비밀 분타였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세상 밖의 사람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기에, 짙은 안개와 공기마저 그 무거운 비밀을 안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수많은 동굴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적암동(赤巖洞).
분타주가 기거하는 그곳에서는 지금 제법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적암동 안쪽 깊숙한 곳.
시커먼 두건을 깊이 눌러써서 입매만 겨우 보이는 분타주 적혈마(赤血魔)가 탁한 음성을 흘려냈다.
“그럼 남궁천은 아직 이곳의 위치를 모른다는 뜻인가?”
적혈마의 목소리가 장내에 메아리쳤다.
바닥에 엎드린 백묘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남궁천은 이곳의 위치를 알지 못하며, 저는 결코 배교자가 아닙니다. 다행히 백옥지단주로 있는 은마령이 절 구해주어서 이렇게 올 수 있었습니다.”
“흐음.”
침음을 흘린 적혈마가 검지로 팔걸이를 툭툭 내려쳤다.
벌써 몇 번째 반복해서 들었는지 모른다.
어느 정도 백묘의 말을 신뢰하고 있었기에 그녀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왠지 모를 이 찜찜함은 무엇인가?
백묘의 말을 들어봤을 때 납득되지 않는 부분은 없다.
확실히 백묘는 배교를 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무림맹 총관인 적서로부터 밀서를 받았을 때 의외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군.’
적혈마는 애초에 논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이성적인 추론보다 직감에 의존하는 편이었다.
한데 그 직감이 좋지 않다.
“백묘. 당분간은 적옥(赤獄)에 가둬두도록 하겠다. 혐의가 완전히 벗겨질…….”
그때였다.
삐이이이!
갑자기 밖에서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들리더니 곧 한 사람이 적암동으로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사내는 백묘 곁으로 달려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분타주님! 남궁천이 분타 입구에 나타났습니다!”
“뭣이?”
적혈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돌려 백묘를 보았다.
“백묘!”
“아닙니다! 저는 절대 아닙니다!”
백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소리쳤다.
그녀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남궁천이 여길 어찌 알고 찾아온단 말인가?
하지만 정황상 자신이 의심받기 딱 좋지 않은가?
적혈마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마혈진(魔血陳)을 준비하라.”
“복명!”
수하가 대답과 동시에 달려 나갔다.
* * *
남궁천은 희미한 안개로 덮인 협곡 언덕을 올려다보았다.
비좁은 협곡을 따라 한참을 들어오고 나니 제법 너른 공간이 펼쳐져 있었는데, 비탈진 길을 따라 기암괴석이 비죽비죽 솟아나 있었다.
거기에 군데군데 보이는 동굴들은 흉측한 형상으로 양각되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긴다.
용취곡 마교 분타.
추향응은 이곳까지 안내를 마치고 조용히 창공 어딘가로 날아갔다. 안개가 워낙 짙었기에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남궁천은 추향응의 발목과 자신의 손목을 은잠사로 이어서 길을 찾아왔던 것이다.
추혈검을 쓰지 않은 이유는 혹시나 백묘가 추혈검의 요기를 느끼고 뭔가를 눈치채서 용취곡 분타로 가지 않을 것을 대비한 것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백묘가 여기로 달아났다는 건…… 역시 여기가 마교 분타라는 뜻이겠지?”
“…….”
“지단주님, 그렇지 않을까요?”
남궁천이 위종악을 보며 씨익 웃었다.
위종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거기까지 알 수는 없잖소?”
“어쨌거나 기쁘지 않습니까? 그간 백옥지단을 속 썩인 귀신의 정체를 이제 밝힐 차례니까요.”
“뭐…… 아직 다 끝난 건 아니니 기쁠 것까지야.”
“네네, 조심은 해야죠.”
남궁천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더니 양손에 기운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구오오오오!
막강한 기운이 손바닥에 응축되기 시작하면서 남궁천이 걸친 장삼 자락이 거칠게 부풀어 올랐다.
펄럭펄럭!
남궁천을 중심으로 기파가 웅장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안개도 파문처럼 멀어져 갔다.
지켜보던 위종악의 눈이 조금 커졌다.
‘생각보다 공력이 심후하군.’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쩌면 자신과 손을 섞을 때 훨씬 많은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하아아앗!”
남궁천이 기합을 터트리는 것과 동시에 양손을 앞으로 뻗으면서 장풍을 쏘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한 곳에 기운을 집중해서 쏘는 장풍과 달리, 지금은 양손을 크게 펼치면서 너른 범위로 기운을 퍼트리는 방식이었다.
후아아아아아앙!
순간, 바람이 거칠게 회오리치면서 협곡을 휩쓸며 날아갔다. 그 바람에 시야를 가리던 안개가 흩어지면서 순간 눈앞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가장 높은 곳의 동굴까지 보이는 지경에 이르자, 비탈진 길 위에서 그림자들이 스르르 나타났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꼭꼭 숨어 있던 쥐새끼들이 이제야 대가리를 내미네.”
거친 말투에 그림자들의 전신에서 살기가 뻗어왔다.
마기가 뒤섞인 살기에 적랑단원들은 머리끝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남궁천과 함께 온 당예설은 재빨리 적들의 동태를 훑어보고 아군의 상황을 점검해 보았다.
‘분타에 주둔한 마인들이 삼백여 명이겠어. 그중에서도 오십여 명은 전투보다는 주술에 특화된 자들. 다른 임무로 이곳에 있는 것일 테지. 하면 이백오십이 실제 병력이라고 봐야 해. 이쪽은 적랑단 이백에 당가 백, 그리고…….’
당예설이 애매한 시선으로 위종악 쪽을 흘긋 보았다.
‘남궁천이 저들의 협력을 잘 끌어낼 수 있다면 더하기 오십 정도.’
머릿수만 따지면 오십 명 정도 우위라고 볼 수 있다.
하나 이곳은 마교 분타다.
적진에서 싸우는 것은 그만큼 어려움을 떠안는다는 뜻.
‘쉽지 않은 싸움이겠네.’
그녀가 긴장한 표정으로 품에서 암기를 천천히 꺼내 들었다.
여차하면 독도 뿌릴 준비를 마쳤다.
당예설이 이토록 빨리 적의 병력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사천당가의 특징이기도 했다.
지난 세월 사천당가는 비교적 서역과 가까운 위치라는 이유로 마교가 등장할 때마다 가장 먼저 피해를 본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마교의 습성에 대해 그 어떤 문파보다도 빠삭한 부분이 있었다.
때문에 협곡에서 머리를 내민 몇몇 무인의 숫자만 살피고도 전체적인 병력을 빠르게 계산할 수 있었던 것.
그러는 사이, 적마동 앞에서 두건을 눌러쓴 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탁한 음성을 흘렸다.
“용케도 여길 찾아왔군.”
“분타주님? 아아, 뭐 그렇게 감탄하실 것까진 없으시고. 혼자의 힘으로 온 것도 아니니.”
“혼자의 힘이 아니라…….”
“이게 다 백묘 덕분이랄까요?”
남궁천이 입매를 말아 올리며 말하자, 적혈마가 고개를 돌리고 백묘를 노려보았다.
백묘가 당황해서 얼른 소리쳤다.
“아닙니다! 저 녀석이 이간질을 하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자 남궁천이 다시 손을 저으며 소리쳤다.
“에이, 그건 아니지.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지.”
“닥쳐라! 내가 정말 배교자라면, 너는 어째서 그걸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느냐? 이간질이 아니고서야 무슨 의미로…….”
“그거야 당연히 써먹을 대로 다 써먹었으니 버리는 패가 된 것이랄까?”
“뭣이?”
백묘가 고운 눈썹을 꿈틀거리자,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백묘, 미안하게 됐소. 이번 일이 끝나면 무림맹에서 보상하기로 한 약속은 지킬 수 없겠어. 그래 봐야 당신은 마인이니까. 집도 사 주고, 돈도 주고, 그간의 죄를 묻어주는 건 역시 과하달까?”
남궁천이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없는 약속을 들먹여 대자, 백묘는 그야말로 속이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문제는 남궁천의 저런 행동이 분명 적혈마의 의심을 더욱 부추긴다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백묘를 조금은 미심쩍게 보던 적혈마가 아니던가?
적혈마가 후드 아래의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돌아보았다.
“백묘. 정녕…….”
“아닙니다! 저 녀석의 농간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분타주님!”
그런데 여기서 다시 남궁천이 끼어들었다.
“백묘,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본 맹을 도와준 대가로 개죽음은 당하지 않도록 해줄 테니. 잠깐의 시간을 벌어줄 테니까 그사이에 달아나 봐.”
“닥쳐! 남궁천! 그딴 개소리로 분타주님이 넘어갈 것 같아?”
백묘가 발작적으로 외치자, 적혈마가 남궁천을 쏘아보며 물었다.
“증명할 수 있겠나?”
“증명? 내가 이곳에 버젓이 와 있는데 다른 증명이 필요한가? 뭐, 더 해보라면 못할 것도 없지만.”
“증명하라.”
“거, 같은 집안 식구도 아닌데,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니 기분이 영 별로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그 전에, 지단주님.”
“…….”
“지단주님?”
“아? 불, 불렀소? 뭐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위종악이 얼른 남궁천에게 다가왔다.
그로서는 지금 머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꼬여도 아주 심각하게 꼬인 상황.
당장에라도 백묘가 만리향에 당했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 자신의 실수가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마교는 실수를 쉬이 용납하지 않는 곳이다.
특히나 용취곡 분타를 노출시킬 만큼 크나큰 실수라면, 책임을 물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백묘 역시 그런 의미에서 안전하다고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서열상 자신보다 훨씬 위였기에 어느 정도 면죄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역시 가장 좋은 것은 직접 남궁천을 죽여서 이 모든 사태의 오해를 풀어버리는 것이리라.’
각오를 다진 위종악이 단전에서부터 서서히 기운을 끌어 올려갔다. 살기만큼은 철저히 숨긴 채.
“왜 불렀소?”
“에이, 다 아시면서.”
“대체 뭘…….”
“너도 한패잖아.”
“……!”
순간 위종악의 단전에서 공력이 폭발하듯 일어나려는데!
쉬컥!
그야말로 빛살 같은 발검으로 벽라검이 위종악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어……?”
위종악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만 끔뻑이다가 세상이 천천히 기우는 걸 지켜보았다.
툭, 데굴데굴……!
츄아아아아!
순식간에 머리를 잃은 위종악의 몸통이 피를 분수처럼 뿜어대다가 이내 쿵! 쓰러졌다.
워낙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지켜만 보던 당예설도 봉목을 부릅뜨고는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적혈마를 보았다.
“얘가 은마령이라며? 마교에서 심어놓은 간자. 백묘가 아니면 내가 어떻게 거기까지 알았겠어? 안 그래? 백묘?”
“너……!”
백묘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