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29화 (428/508)

429. 닥쳐라, 이노옴!

“왜 아무 말씀을 안 하실까요? 어엉?”

남궁천이 고개를 들이밀면서 삐딱한 자세로 묻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위종악이 엉겁결에 물러서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것은……!”

“그것은?”

“척 보면 모르겠소? 이놈은 지금 고문을 감당하지 못해 되는 대로 지껄이려고 했소! 동공이 완전히 풀려 있었단 말이오!”

어떻게든 말을 꺼내고 보니 다행히 그럴싸한 핑계가 됐다. 위종악이 기세를 이어 더욱 강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옳은 방법이 아닌 것 같소. 고통에 겨워서 아무나 지목하면 억울한 자가 생기지 않겠소?”

“정말 범인일 수도 있죠.”

“하나 우리는 그 진실을 확인할 길이 없지 않소! 자칫하다가 이놈의 이간질에 놀아날 수가 있단 말이외다!”

꽤나 그럴싸한 말이었는지, 주변을 에워싼 백옥지단의 무인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들로서는 그래도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었던 위종악의 말에 더 공감하고 있었다.

이에 여세를 몰아 위종악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내 수하들을 함부로 의심할 수 없소!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를 굳건히 신뢰하면서 백옥지단을 지켜왔소.”

위종악의 말에 백옥지단 무인들이감동이라도 받은 듯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참 대애단한 신뢰입니다. 그렇다고 인질을 죽여 버리다니 너무하시네요. 누가 보면 입막음으로 죽인 줄 알겠습니다.”

“무슨 그런 망발을!”

“사실 그렇잖아요? 이 녀석의 증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방법이 없는 것처럼, 저로서는 지단주님의 그 발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갈! 어찌 같은 무림맹으로서 서로를 의심한단 말이오!”

“묵천악은 심지어 맹주였죠.”

“끄음……! 정녕 단주는 날 의심한단 말이오?”

순간 위종악의 눈빛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이 녀석, 틀림없이 날 의심하는구나!’

이쯤 되자 위종악도 눈 가리고 아웅 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백옥지단의 무인들은 여전히 자신을 믿고 있는 것인지, 오히려 남궁천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이 대치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야 하리라.

‘오히려 이놈이 내게 더 모욕적으로 대하게 한 다음에 이 자리에서 칼부림이 한번 일어나는 게 낫겠다.’

결심을 굳힌 위종악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짝다리를 짚은 채로 건들건들한 태도. 그 바람에 남궁천은 온통 빈틈 투성이였다.

‘칼춤을 추겠다면 이 녀석이 방심할 때다. 무조건 선공을 해야 할 테지.’

생각을 마친 위종악이 눈을 가늘게 여미며 남궁천에게 말했다.

“하면 남궁 단주는 내 말보다 저 살수의 말을 더 믿는다는 뜻이로군.”

“에헤이, 뭘 그렇게까지 또 넘겨짚으실까? 그냥 같은 편이라고 덥석 믿을 수가 없다는 뜻이죠. 애초에 같은 편인지도 모르고.”

오냐, 잘 걸렸다!

위종악이 발끈하며 버럭 외쳤다.

“그 말은 본 지단이 맹을 배신한 세력이란 뜻이오? 적아도 구분 못 하고 이렇게 이를 드러내다니! 이건 혹시 처음부터 무림맹이 우리를 배신자로 낙인찍으려고 작정한 것은 아니오?”

선동이 효과가 있었는지, 지금껏 참고 있던 부지단주와 다른 무인들이 성난 표정으로 외쳤다.

“정말 듣자 듣자 하니 너무하는군! 도대체 본 지단을 뭐로 본단 말입니까?”

“아예 우리를 잠재적 배신자라고 낙인을 찍은 것 같군요!”

“지단주님! 이런 모욕을 듣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남궁천이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럼? 칼이라도 뽑으시게?”

위종악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이건 남궁천이 알아서 미끼를 물고 흔들어대는 꼴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시원하게 낚을 차례다.

위종악이 성큼 나서더니 눈을 부릅뜨고는 외쳤다.

“도저히 못 들어주겠군! 나를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내 수하를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차아아앙!

위종악이 검을 뽑는 그 순간,

쉬쉬이익!

허공을 가르며 두 자루의 암기가 빠르게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위종악이 얼른 고개를 꺾자, 그의 뺨에 두 줄의 선혈이 그어지며 암기들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암기를 던진 자는 다름 아닌 당예설.

그녀는 어느새 여러 자루의 암기를 양손에 나눠 쥐고는 싸늘한 목소리를 읊조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칼부림 일어나기 전에 혈화(血花)가 흩날리는 걸 보고 싶은 건가?”

차차차차앙!

이렇게 되자 백옥지단의 무인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더니 남궁천과 당예설을 노려보았다.

이제 장내는 당장에라도 피바람이 불 것처럼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였다.

위종악은 내심 당예설의 무위에 놀라고 있었다.

‘과연 전 적랑단주답군. 이대로면 어려운 싸움이겠어.’

물론 이렇게 된 이상 진짜로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자신이 숨겨둔 절반의 무위를 드러낸다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전현직 적랑단주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역시 무리다.

그렇게 한동안 살벌한 시선이 오가는 사이, 남궁천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유,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자자, 다들 진정합시다. 대화로 풀자고요. 같은 편끼리 왜 이래요?”

“흥! 애초에 우리를 같은 편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소?”

“지단주님.”

“뭐요?”

남궁천이 위종악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심연마저 꿰뚫어 버릴 것만 같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입매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제가 겁나게 눈치가 빨라요. 그래서 일부러 한번 도발해 본 겁니다. 지단주님이 어찌 나오시는지 알아보려고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로선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성격이라서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오?”

“그게 사실인 걸 어쩌겠습니까?”

“흥! 두드려 보니 어떻소?”

“아유, 말해서 뭐 합니까? 당연히 지단주님은 결백하시지요. 딱 보니 지단주님은 공범이 아닙니다. 게다가 여기 다른 분들도 이렇게까지 분개하는 걸 보면 분명 지단주님은 훌륭한 지도자이십니다.”

위종악이 눈살을 여미고는 남궁천을 빤히 보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라더니.

정말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새끼, 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짜증 섞인 심경으로 노려보는데, 남궁천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포권하며 다시 사죄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지요? 여러분들도 이제 그만 화를 거두시는 게 어떨까요? 아무래도 공범이 백묘와 함께 달아난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당장 쫓아야 하지 않겠어요?”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위종악도 갑자기 긴장감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위종악이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자, 부지단주가 헛기침을 하고는 한 걸음 나섰다.

“지단주님,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것 같으니 우선은 남궁 단주의 말을 들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흐음.”

확실히 부지단주는 나름 눈치가 빠른 자였다.

애매한 상황 속에서 방황하는 위종악을 자연스럽게 꺼내준 것이다.

결국 가볍게 한숨을 내쉰 위종악이 검을 거두고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선 오늘의 소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묻겠소. 아무리 신중을 기한 행위라지만, 오늘의 모욕은 참을 수가 없소.”

“예에, 예. 감사합니다.”

이 새끼가…… 진짜 끝까지…….

저 빈정대는 꼴을 보고 있자면 당장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고 싶다.

하나 그걸 또 콕 짚어 따지자니 똑같은 수준의 인간이 된 것 같아서 입술만 근질거린다.

‘후우,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 내가 참는다.’

속을 다스린 위종악이 퉁명스레 물었다.

“해서 사라진 백묘를 어찌 쫓겠단 말이오? 방법은 있소?”

흥, 있을 리가 있겠나?

적랑단을 이끌고 그 넓은 신무 지역을 헤매고 다니겠지. 그게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용취곡으로 뛰어들거나.

그런데 남궁천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예, 사실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미리 조치를 해두었지요. 지금 바로 출발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응? 지금 바로?”

“예, 당연히 함께 가실 거죠? 괜히 공범으로 오해까지 받으셨으니 당연히 같이 가실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이오. 한데 대체 어떻게 조치를 취해두었다는…….”

위종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궁천이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더니 피리를 ‘삐익!’ 불었다.

순간 하늘에서 청명한 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삐이이이익!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꺾어 들었던 당예설이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추향응!”

푸드드득!

추향응이 커다란 날개를 펼치면서 남궁천의 어깨로 내려앉았다.

남궁천이 당예설을 보며 싱긋 웃었다.

“덕분에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

“잘 써줘서 고맙구나.”

당예설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위종악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추향응이라니! 제기랄, 그럼 설마 백묘에게 당가의 만리향을 묻혀놨다는 것인가?’

이러면 낭패다.

백묘는 분명 용취곡 분타로 향했을 터.

그렇다면 용취곡에서도 찾기 힘든 분타의 위치를 추향응 때문에 정확히 알아내게 될 것이다.

그럼 이제 어쩐다?

‘이렇게 된 이상 백묘가 분타에 도착하기 전에 사로잡는 것이 최선이리라.’

머릿속이 복잡해진 위종악이 얼른 입을 열었다.

“역시 남궁 단주요.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어서 백묘를 추격합시다! 내 당장 신호탄을 써서 수색 중인 청운대와 백운대를 모두 소집하겠소!”

백묘는 부상을 입은 몸이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마혈이 점해졌던 만큼 완전하게 회복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리리라.

‘지금이라도 바짝 쫓아간다면 분타에 도착하기 전에 사로잡을 수 있을지도.’

당가의 만리향을 생각하지 못하다니.

하긴. 당예설은 남궁천과 따로 오지 않았나?

남궁천에게 당가의 만리향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건 오히려 당연하리라.

생각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사이, 남궁천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지단주님. 역시 든든하네요.”

* * *

터벅터벅……!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백묘가 무릎을 짚더니 허리를 숙이고는 구토를 했다.

“쿠웨에에엑!”

시커먼 핏덩이가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한참이나 탁혈을 게워낸 백묘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양쪽으로 비슷한 모양의 바위가 세워진 협곡.

하지만 안개가 너무 짙어서 한 바위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심지어 안개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바위의 형태가 묘하게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백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지친 걸음을 터벅터벅 옮겼다.

쉬지 않고 달려왔다.

며칠간 점혈당한 마혈을 풀자마자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그러다 보니 공력이 뒤엉켜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남궁천이 자신의 탈옥을 언제 눈치챌지 알 수 없는 만큼 조금이라도 빨리 달려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만큼 빠른 시간 내에 분타 인근까지 온 것이다.

“하아, 하아, 하아……!”

지친 숨결을 토해낸 백묘가 주위를 다시 한번 슬쩍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용의 문양이 그려져 있던 암벽이 이젠 호랑이 문양으로 바뀌었다.

안개에 따라 무늬가 조금씩 바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스슷.

그야말로 귀신처럼 안갯속에서 그림자들이 나타나더니 백묘를 에워쌌다.

마침내 성별을 특정할 수 없는 그림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묘, 너는 본 교를 배신했다.”

털썩!

백묘가 무릎을 꿇으면서 소리쳤다.

“결코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남궁천이 절 이용하려고 꾸민 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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