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닥쳐라, 이노옴!
위종악은 밤새 뜬눈으로 지냈다.
정말이지 새벽닭이 여러 번 울 때까지 그는 눈 한 번 제대로 감지 못했다.
강호 경험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실상 지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실전을 겪을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백묘는 용취곡으로 무사히 들어갔을까? 아니지, 떠난 지 한나절도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신무지역에서 헤매고 있을 지도. 마혈에서 풀린지 얼마되지 않아 어딘가에서 운기조식이라도 해야 한다면 더욱 늦어질 테고.’
뚜벅뚜벅…….
뚜벅뚜벅…….
그렇게 방 안을 얼마나 서성였을까?
아스라이 새벽닭이 우는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하지만 밖에서는 아무런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백옥지단의 무인들은 실전과 동떨어진 자들이라고 봐야 했다.
지난 세월 한직에서 놀고 먹으며 봉급만 타던 녀석들이니까.
하지만 적랑단마저 이렇게 오랫동안 조용할 줄은 몰랐다.
늦어도 동녘이 트기 전까지는 간수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호들갑을 떨어댈 줄 알았는데.
피식.
괜히 웃음이 나온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위종악이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과민했나 보군.”
생각해 보면 이게 정상 아닌가?
무림맹은 최근 새로 정비가 된 셈이다. 묵천악의 체제가 수십 년이나 유지되었던 맹이다.
한데 갑자기 남궁가가 떠오르면서 주인이 바뀐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혼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밀서에도 적혀 있지 않던가?
맹이 아직은 안정기에 들어서지 않았다고. 특히 장로원과 마찰이 심한 상태라고.
그러니 적랑단도 무늬만 그럴싸할 뿐 아직까지는 오합지졸일 가능성이 크지 않겠나?
게다가 단주라는 자가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청년이니 말 다 한 셈이다.
무공이야 이런저런 영약을 처먹고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지만, 어디 경험을 영약으로 살 수 있던가?
경험이란 오로지 시간을 투자해야만 하는 것.
‘우리 애들 기강이 해이해진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는 모양이군.’
백묘만 봐도 그렇다.
그렇게 애써 이송을 해왔으면, 뇌옥을 지킬 때 적랑단원 몇 명쯤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겠나?
한데 백옥지단의 뇌옥에 넣어뒀다고 손 탈탈 털고 세상모르고 자빠져 자는 꼴이라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은 멀은 게지. 애초에 단주가 그 모양이니. 쯧쯧.’
모르긴 해도 묵천악이 죽은 것은 남궁천의 재능보다는 남궁검의 영향이 컸으리라.
남궁검이라면 확실히 묵천악을 제거할 만한 능력이 있을 테니까.
고로 이곳에 있는 남궁천은 무공만 조심하면 별 볼 일 없는 녀석이라는 뜻이 되는데…….
“이젠 그마저도 신경 쓸 필요는 없겠군.”
창문 밖으로 동녘 하늘이 밝아져 오고 있었다.
아직까지 지객당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없다.
무소식은 곧 희소식이다.
남궁천은 죽은 것이다.
만약 혈귀쌍검이 암살에 실패했다면 지금쯤 난리가 났을 터.
하지만 조용하다.
날이 밝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
“후우.”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위종악이 탁자 앞으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어차피 혈귀쌍검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일부러 보고할 필요가 없으니까.
지금쯤 어딘가로 멀리 달아났으리라.
피식.
웃음이 나온다.
자신도 이젠 나이가 든 모양이다.
강호신룡이라는 명성 때문일까?
괜히 긴장을 했다.
그래, 이렇게 오랜만에 실전에 가까운 날카로운 감각을 세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이제야 완전히 긴장을 푼 그가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때마침 누군가 문을 열면서 급히 달려 들어왔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기에 위종악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누군가?”
반쯤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묻자, 부지단주의 경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일났습니다, 지단주님!”
“무슨 일인가?”
“그, 그게…….”
“말을 하게.”
“그 마인…… 백묘가 사라졌습니다!”
“뭐야?”
위종악이 화들짝 놀란 척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만하면 누구나 속아 넘어갈 정도의 연기라고 자부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백묘가 사라지다니! 도대체 언제? 어떻게?”
“그게…… 시체 상태로 봐서는 자정을 넘긴 시점일 듯합니다.”
“자정을 넘겨? 아니, 그보다 시체라니?”
“간수장과 간수 한 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런!”
위종악이 호들갑을 떨면서 주섬주섬 겉옷을 챙겼다.
“앞장서라!”
“예, 지단주님!”
부진다주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위종악이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
“적랑단주에게는 알렸는가?”
“적랑단주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어째서?”
“수문조장을 보냈는데, 지객당에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흥, 당연히 보이지 않…….’
순간 움찔거린 위종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보이지 않는다고?”
“예. 불러도 대답이 없어 조심스레 들어가 보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다니?”
“아무래도 새벽 수련을 나선 게 아닐까 합니다.”
“이런 곳에서?”
“그게 아니면 뭘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그보다…… 방 안의 상태는 어땠나?”
“글쎄요. 거기까지는 잘…….”
부지단주가 말을 얼버무리자, 위종악이 눈살을 구겼다.
“혈흔이나 칼자국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고?”
“예, 그런 건 따로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침상에도?”
“예. 그런데 그건 왜…….”
“그야 백묘가 마교의 도움을 받아 탈옥했다면, 적랑단주도 위험할 게 아닌가?”
“아, 그렇군요. 설마 놈들이 적랑단주마저 납치한 걸까요?”
“글쎄…….”
위종악은 말을 얼버무리면서도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확신했다.
애초에 백묘를 구출한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그런데 남궁천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설마 혈귀쌍검이 남궁천의 시체도 깔끔히 치운 건가?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의문이 꼬리를 무는데 마침 지단주실로 달려오던 당예설과 마주쳤다.
“위 지단주! 이게 무슨 일이죠? 백묘가 탈옥했다니요?”
“아무래도 간밤에 마교의 습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럴 수가! 철저히 감시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여긴 신무 지역도 아니라 별 탈이 없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내 불찰입니다.”
“이런 답답한! 적랑단주는 어디에 있죠?”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일단 확인 중에 있습니다.”
말을 마친 위종악이 슬쩍 돌아보자, 부지단주가 한 걸음 앞서며 말했다.
“우선은 청운대를 풀어 백묘가 향했을 신무지역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백운대를 풀어 백옥현 인근을 샅샅이 뒤져 적랑단주를 찾는 대로 모셔오라 일렀습니다.”
위종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이만하면 본 지단도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한 상황입니다. 좀 더 기다려보지요. 우선은 사건 현장인 뇌옥으로 가보려고 하는데, 함께하실 건지?”
“가시죠.”
당예설의 말에 위종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세 사람이 안마당을 가로질러 뇌옥으로 향할 때였다.
갑자기 중문 밖이 소란스러운가 싶더니 수문조장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아닌가?
“지, 지단주님!”
“무슨 일인가?”
위종악이 왠지 모를 불길한 마음을 억누르며 묻자, 수문조장이 무릎을 짚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와, 와, 왔습니다!”
“누가 왔단 말인가?”
“그…… 단주요! 적랑단주, 남궁천이 돌아왔습니다!”
“뭐?”
순간 위종악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남궁천이 돌아오다니?
어째서?
지금쯤 어디 야산에 파묻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혈검쌍귀는 남궁천을 납치해 갔다. 혈흔이 발견되지 않은 것을 보면 기절을 시킨 후 어딘가로 옮겨 죽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궁천이 돌아와?’
하면 혈검쌍귀는?
위종악의 놀란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문조장 입에서 더욱 경악할 만한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남궁천 단주가 백묘의 탈옥을 도운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다고 합니다!”
“뭐라?”
이쯤 되자 위종악의 눈썹이 사정없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듯했다.
남궁천이 범인을 안다고?
정말 알고 있다면, 자신의 정체를 안다는 뜻인가?
아니, 그보다 혈검쌍귀는 도대체 뭘 한 거야!
그의 복잡한 심정을 알 까닭이 없는 당예설이 얼른 입을 열었다.
“잘됐네요. 어서 만나보죠!”
“그, 그럽시다. 지금 적랑단주는 어디에 계신가?”
그때 중문 사이로 남궁천이 들어서면서 낭랑한 목소리를 던졌다.
“일부러 찾아오실 것까지 없습니다. 제가 왔습니다. 하하.”
“남궁천……?”
“적랑단주…… 끄음.”
당예설에 이어 위종악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놀랍게도 남궁천의 양손에는 피투성이가 된 혈귀쌍검이 질질 끌려오는 중이었다.
초절정의 고수 둘을 저렇게까지 제압하다니.
‘도대체 저놈은…… 괴물인가?’
위종악이 뺨을 부들거리는데, 남궁천이 질질 끌고 오던 혈귀쌍검을 안마당 복판으로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쿠당탕!
거친 소리와 함께 쓰러진 두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신음만 비실비실 흘리고 있었다.
“끄으어어……!”
혈검은 눈알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귀검은 입에 반쯤 거품을 문 채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정말이지 두 눈을 뜨고 봐주기도 힘들 만큼 처참한 모습이었다.
상황이 이리되니, 위종악은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하나 그는 고도로 훈련된 은마령이 아니던가?
지난 수십 년간 이 자리에서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지내왔다. 심지어 묵천악마저 자신의 정체를 몰랐다.
그저 묵천악의 지시에 따라 마교와 내통하는 맹원 정도로만 생각했을 터다.
위종악이 얼른 마음을 추스르고는 남궁천에게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어째서 호신위들을 이렇게까지…….”
“응? 나는 호신위들을 때렸다고 한 적 없는데? 이 녀석들이 나한테 두드려 맞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
순간 움찔거렸던 위종악이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는 기분 나쁜 투로 말했다.
“누굴 바보로 아시오? 단주가 저들을 다루는 것만 봐도 알겠는데.”
“크으, 역시! 눈치가 백단이시라니까. 맞습니다. 이 녀석들 제가 줘팼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왜?”
“글쎄, 말도 마세요. 이 녀석들이 간밤에 날 죽이려고 달려들지 뭡니까? 안 그러냐? 이 개 같은 것들아?”
“크윽!”
“으윽!”
남궁천이 쓰러져 있는 혈귀쌍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번쩍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눈동자와 마주친 위종악이 저도 모르게 움찔 떨었다.
‘두려워하고 있어……? 저 둘이……?’
혈귀쌍검은 마교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암살자로 불린다. 오죽하면 피에 굶주린 귀신같다고 해서 혈귀라 불릴까?
한데 지금 혈귀쌍검의 눈동자는 분명 극심한 두려움에 흔들리고 있었다.
도대체 남궁천이 이들에게 무슨 짓을 어떻게 했기에?
남궁천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아주 재미있는 걸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