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26화 (425/508)

426. 닥쳐라, 이노옴!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백옥지단 뇌옥을 지키는 간수 둘은 늘어지도록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했다.

“흐아아암! 말년에 고생할 팔자라더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늙수레한 간수장의 투덜거림에 젊은 간수가 툴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잖아요? 곧 은퇴하신다면서요?”

“그래도 아직 열흘 정도 남았다. 그만둘 때가 되니 아쉽기도 하고, 빨리 그만두고 자유를 찾고 싶기도 하고 그렇네.”

“퇴직금이 두둑하시겠어요?”

“그래도 내가 삼십 년 근속 아니냐? 이번에 맹주님이 바뀌면서 퇴직금도 제법 올랐다고 들었다.”

“퇴직금 가지고 뭐 하시려고요?”

“이번에 우리 손녀가 돌이야. 예쁜 꼬까신도 사 주고 옷도 하나 비싼 걸로 장만하려고.”

“하하. 선배님은 손녀 보시더니 매일 싱글벙글이시네요.”

“너도 내 나이가 되어봐라. 자식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어떻게 다릅니까?”

“글쎄…… 뭔가 좀 더 애틋하달까? 자식을 키울 때는 욕심에 치어서 이런저런 실수를 하게 되는데, 손녀는 그저 사랑스럽더라.”

늙은 간수장이 밤하늘의 별빛을 보며 혼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옆에 선 젊은 간수가 따라 웃더니 하늘을 보며 불쑥 말을 던졌다.

“사실 저도 이제 곧 아빠 됩니다.”

“엇? 그게 정말이냐?”

“예, 헤헤. 좀 늦었지요?”

“아이고, 이 녀석아. 축하한다. 애가 들어서지 않는다고 걱정하더니! 이게 웬 경사냐? 그 아이도 이젠 내 손녀다!”

“하하. 감사합니다, 선배님. 다 선배님의 배려 덕분입니다.”

“흐흐흐. 그럼. 내가 그러라고 네놈을 야간 근무에서 빼주지 않았더냐?”

“오늘은 예외지만요?”

“쩝, 오늘은 비상 시기니까 어쩔 수 없었고.”

“하하, 이해합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가로이 담소를 나눴다.

사실 백옥지단 뇌옥을 지키면서 이렇듯 두 사람이 함께 근무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간 백옥지단은 그야말로 한직이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사천당가가 찾아오더니 이번에는 적랑단주까지 온 것이다.

그것도 백묘라는 마인까지 데리고.

젊은 간수가 뇌옥 안쪽을 힐끔거리고는 조용히 물었다.

“정말 그 여자가 마인일까요?”

“적랑단주가 마인이라고 했으니 그렇겠지.”

“그럼 그간 용취곡 사건은 정말로 귀신 놀음이 아니라 마교 놈들 짓일까요?”

“글쎄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말년에 괜히 그런 험한 일에 얽혀들면…….”

쉬걱.

한 줄기 섬광이 스치는가 싶더니 섬뜩한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말을 내뱉던 간수장은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젊은 간수를 보았다.

젊은 간수 역시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어서…… 도망…….”

피츗!

순간 늙은 간수장의 목에 가느다란 선혈이 생기더니 이내 핏물이 뿜어지면서 젊은 간수의 얼굴에 튀었다.

츄아아아아아!

곧이어 늙은 간수장의 목이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시뻘건 피물을 온 얼굴로 덮어쓴 간수가 여전히 믿기 어려운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스르르, 쿠웅!

맥없이 쓰러진 늙은 간수장 뒤로 시커먼 인영이 서 있었다. 복면을 덮어쓴 상대는 오른손에 대략 한 자 정도 되어 보이는 소도를 쥐고 있었다.

어찌나 깔끔한 일격이었는지 소도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복면인이 탁한 음성을 나직이 흘려냈다.

“어서 도망이라니. 이렇게 기강이 해이해져서야. 아무리 그간 편의를 봐주며 지냈다지만 이건 너무하군. 침입자를 알리라거나, 목숨을 걸고 막으라고 지시해야 하거늘.”

“헉!”

목소리를 들은 젊은 간수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런데 무엇보다 놀란 것은 고막을 파고드는 저 음성 때문이다.

그 음성은 분명…….

아니다. 목소리 따위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정체를 안다는 게 들키면 십중팔구 죽으리라.

젊은 간수가 목이 잘려나간 간수장을 보며 애원했다.

“살, 살려주십시오. 집에 임신한 아내가 집에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다행이네. 애가 생기면 덜 외로울 테니까.”

“……!”

쉬컥!

순간 빛줄기가 눈앞을 스쳤다.

섬뜩한 감각이 뇌리를 들쑤셨다.

젊은 간수는 눈을 한 차례 끔뻑이고는 그대로 목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쿠웅. 데굴데굴……!

잘려 나간 목이 한참이나 굴러가다가 담벼락 아래에 부딪혀 멈췄다. 눈물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복면인이 바닥에 떨어진 열쇠뭉치를 주워 들면서 무심히 중얼거렸다.

“확실히 기강이 많이 해이해지긴 했어. 이 기회에 다시 군기 좀 잡든지 해야지.”

그는 주변을 한 차례 훑어보고는 뇌옥 입구를 지나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어두운 복도를 따라 한참이나 들어간 그가 마침 어느 철창 앞에 멈춰 섰다.

철커덕!

열쇠를 철창을 열고 들어선 그가 가만히 소도를 들고 어둠 속을 겨누었다.

높게 달린 창문으로 비스듬히 스며든 달빛이 철창에 갇힌 여인을 턱 아래부터 목까지 일부만 비추고 있었다.

복면인이 든 도첨은 정확히 그녀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본 교를 배신했소?”

무감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 복면인은 희미하게 웃는 백묘를 보며 눈썹을 슬쩍 일그러뜨렸다.

그러다가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가볍게 지풍을 날려 점혈을 풀었다.

마침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백묘가 싸늘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설마 남궁천의 말을 그대로 믿는 멍청이는 아니겠지?”

“당신을 어찌 믿을 수가 있겠소? 만약 당신이 남궁천의 말대로 정말 본 교를 배신했다면?”

“글쎄. 애석하게도 그걸 증명할 방법은 없어. 선택은 당신 몫이야. 날 죽이든지, 날 살리든지.”

말을 꺼낸 백묘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자, 달빛이 그녀의 눈을 분명하게 비추었다.

복면인이 한참이나 백묘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묘한 침묵이 이어지다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백묘였다.

“소공마께서는? 무사하시고?”

“교로 귀환하셨소.”

“다행이네.”

백묘가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복면인이 소도를 거둬들였다.

“역시 배신은 아니군.”

“은마령의 촉인가?”

“평생 눈치만 보며 사는 신세 아니겠소? 이 정도 떠봤으면 충분하오.”

말을 마친 그가 복면을 휙 벗어던졌다. 비스듬히 스며드는 달빛 아래로 위종악의 얼굴이 절반쯤 드러났다.

백묘가 피식 웃었다.

“굳이 확인시킬 필요 없어. 이미 알고 있으니.”

“뭐,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남궁천은?”

“혈귀쌍검(血鬼雙劍)이 처리할 거요.”

“지금?”

“이미 처리했는지도 모르고.”

“그렇다기엔 너무 조용한데?”

“무소식은 희소식이오. 암살을 하면서 시끄럽다는 건 실패나 다름없다는 뜻이니까.”

“남궁천은 만만한 녀석이 아냐. 초절정 둘이 덤빈다지만, 실패할 확률도 감안해야 해.”

“도대체 얼마나 지독하게 당했기에 약관에 지나지 않은 애송이를 그리 두려워하오?”

순간 백묘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위종악을 노려보았다.

“한심한. 다들 그렇게 방심하다가 뒈진 걸 몰라? 그 늙은 구렁이도 손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뒈지게 만든 남궁천이야.”

“늙은 구렁이는 잡았어도 붉은 쥐는 잡지 못했잖소? 그러니 우리가 이럴 수 있는 거고.”

붉은 쥐란, 현재 총관으로 지내고 있는 적서를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 이 상황이 가능했던 것도 위종악이 적서로부터 은밀하게 전서를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위종악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지금쯤 남궁천은 본 지단에서 내어준 차를 마시고 깊이 곯아떨어졌을 거요. 한마디로 칼이 폐부를 찌르고 들어가도 깨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백묘가 다시 뭐라고 말하려는데, 위종악이 사슬을 완전히 풀어버리고는 추궁과혈을 시도했다.

“돌아앉으시오. 시간이 없소.”

결국 백묘도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입씨름을 해봐야 의미가 없다. 이미 위종악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을 구하고 있지 않은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그래, 어쩌면 내가 남궁천을 과대평가한 것인지도.’

일전에는 과소평가를 하다가 호되게 당했으니, 이번에는 오히려 과대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등 뒤에 앉아 양손을 뻗어 추궁과혈을 시도한 위종악은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단하군. 혈맥이 단단히 막혀 있어. 이 정도로 강하게 마혈을 점했는데도, 여태 기절하지 않고 버텼다니. 백묘도 대단하군.’

그렇게 반의반 각 정도가 지나서야 백묘는 꽉 막혔던 혈맥이 뚫리면서 전신의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단지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아혈과 달리, 마혈은 추궁과혈을 통해 본격적으로 풀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었다.

특히 남궁천의 공력이 심후한 탓에 그보다 낮은 공력으로 마혈을 풀려고 하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후우, 이제 됐소. 남궁천이 확실히 보통 녀석은 아니군. 이 정도로 단단하게 마혈을 점했을 줄이야.”

“뒤처리는 맡겨도 되겠지?”

“물론이오. 이대로 곧장 용취곡 분타로 가시오. 분타주는 지금쯤 적서의 전서를 받고 당신이 배교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요. 그러니 일찌감치 가서 상황을 확실히 설명해야 할 거요.”

“알았어. 그럼 무운을 빌지.”

말을 마친 백묘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같은 시각.

남궁천은 위종악의 말대로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 식경이 거의 지나갈 때쯤이 되어서야 침상 곁으로 그림자 둘이 스르르 내려섰다.

어떤 은신술을 쓴 것인지 마치 부슬비가 내리듯 차츰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바로 남궁천의 호신위를 자처한 잠룡관주의 두 아들, 아니, 마교의 암살자, 혈귀쌍검이었다.

혈귀쌍검은 혼곤한 잠에 빠져든 남궁천을 가만히 내려 보다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내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혈검은 목의 급소를 찌르고, 귀검은 심장을 찌른다.

지금껏 암살을 할 때면 늘 해왔던 방식이다.

이제는 척하면 딱이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검이 침상을 향해 떨어졌다.

쉬이이이잇!

휘리리릭, 콱!

찰나, 혈귀쌍검은 두 눈을 부릅뜨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사불성이 되어서 코를 골며 자던 남궁천이 놀랍게도 몸을 굴려 피한 것이 아닌가?

어느새 벽에 등을 기댄 남궁천이 배를 긁적이며 늘어지도록 하품을 한다.

“흐아아아암! 언제 나타나나 했어. 아오, 코 당겨. 이 정도로 내가 골아대면 적당히 나타나야지. 뭔 겁이 그리 많아서 이제야 나타나셨나?”

“……!”

“아아,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너희들도 보다시피 차는 맛있게 잘 먹었어. 그런데 서로 의사사통이 원활하게 잘 되진 않나 봐? 내가 만독불침이라는 사실은 아직 모르나 봐? 아, 그건 총관도 모르던가? 에이, 나도 모르겠다.”

이쯤 되자 혈귀쌍검의 시선이 착 가라앉았다.

혈검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 눈치챈 건가?”

“이봐, 이봐. 정체가 드러났다고 바로 반말 찍찍 내뱉는 것 봐. 그래도 날 주인으로 모셨는데, 갑자기 너무 차갑게 굴잖아?”

“…….”

“언제부터긴. 처음부터지. 아니, 아들이라면서 좀 닮은 사람을 뽑던가? 내가 이래 봬도 눈칫밥만 수십 년이야, 이 사람들아.”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터. 너는 오늘…….”

“뒈지게 처맞을 거야.”

“……?”

“나한테 이제부터 뒈지게 처맞을 거라고.”

말을 뱉은 남궁천이 목을 우두둑 꺾더니 침상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가 저벅저벅 걸어서 침상 아래로 내려설 때까지도 혈귀쌍검은 묘한 분위기에 억눌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마침내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혈귀쌍검을 둘러보았다.

“내가 장담하는데, 너희들은 나한테 살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을 거야. 왜 그럴까?”

“무슨 개소리를……!”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테니까. 제발 죽여달라고 매달리겠지. 이래 봬도 한때 천하를 공포에 떨게 했던 무림공적 일호였거든.”

“개소리!”

순간 혈귀쌍검이 살기를 일으키며 남궁천에게 달려들었다.

파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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