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 정화 작업
날이 밝고 남궁천은 다시 떠날 채비를 갖췄다. 그가 잠룡관 연무장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적랑단원들이 모두 집결을 마친 상태였다.
하루 동안 푹 쉬었는지 다들 혈색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남궁천은 밤새 잠룡관주의 꿍꿍이를 알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설쳐댔더니 눈 밑으로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침 저쪽에서 잠룡관주가 환한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손우곤이 남궁천 곁으로 다가와서 은근슬쩍 놀리듯 말했다.
“간밤에 뭔가 좀 알아내셨습니까? 혹시 관주가 엄청난 마인이던가요? 아니면 묵천악의 숨겨둔 하수인?”
“차라리 그랬다면 속이 편하겠다.”
“주군, 이제 그만 의심을 거두시는 게 어떠세요? 그래도 아직은 살 만한 세상입니다.”
손우곤의 표정에 어느 정도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약관에 지나지 않은 남궁천이 이토록 타인을 의심한다는 것이 왠지 짠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하지만 남궁천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 살 만한 세상에서 본 가가 밑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추락했지.”
“끄응. 그래도 잠룡관주는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었잖아요.”
“원래 웃으면서 칼 가는 인간이 무서운 법이다. 그리고 이게 내가 강호에서 살아남는 방식이니까 잔소리는 그만.”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손우곤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긴 부모님을 그리 잃고 어린 시절 고독하게 지냈으니 저러실 만도 하지. 그래도 이젠 마음 편히 지내시면 좋으련만.’
그러는 사이 잠룡관주가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왔다.
“적랑단주님.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편히 잘 머물다 갑니다.”
남궁천이 대충 예를 차리며 대꾸하자, 잠룡관주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다행입니다. 큰일을 하기 위해 먼 길을 가시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일면식도 없는 분이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만, 관주님도 땅 파서 장사하시는 분은 아닐 테고.”
“예?”
“이제 속 시원하게 얘기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무엇을…….”
관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얼버무리자, 보다 못한 손우곤이 얼른 나서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단주님이 좀 경계심이 많은 분이셔서요. 아시겠지만 묵천악 때문에 단주님이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관주님은 이 점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일대주. 좀 빠져 있어.”
“단주님, 그래도 관주님이 이렇게 호의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래서 감사 인사는 했잖아. 물러나 있어라.”
“어차피 이제 떠나는 마당이잖아요. 잘 머물다 가는 거니까 좋게 마무리…….”
그때였다.
손우곤의 등 뒤에서 툴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참, 정말이지 적랑단주님은 도저히 속일 수가 없군요.”
관주가 이마를 긁적이더니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손우곤도 뻣뻣하게 굳은 몸을 천천히 돌렸다.
반면 남궁천은 그것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고는 손우곤을 힐끗거렸다.
손우곤이 멍한 표정으로 관주를 보았다.
‘정말로 뭔가 꿍꿍이가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자신이 용서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믿었건만.
손우곤이 화가 나서 나서려는데, 남궁천이 한 발 먼저 앞섰다.
“그래서, 이런 호의를 베푼 이유가 뭐요?”
“흐음. 순수한 호의가 아니어서 실망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을 마친 관주가 옆으로 슬쩍 물러났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훤칠한 외모의 청년 둘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왔다.
관주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녀석들은 제 아들들입니다.”
“그래서요?”
“솔직히 인정하겠습니다. 저는 이 두 아들들을 적랑단에 입단시키고 싶었습니다. 일전에 적랑단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무림맹을 찾아갔으나, 아쉽게도 떨어졌었지요.”
이쯤 되자 손우곤이 딱딱한 표정으로 관주를 노려보았다.
“관주! 지금 부정 입단을 추진하려는 겁니까? 여기 이백 명의 단원들은 모두 정당한 기회를 통해서 입단한 자들입니다! 이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내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 모두에게 편한 잠자리와 만찬을 제공한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께 호의를 베풀었듯이, 여러분도 내게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호의라니. 애초에 철저하게 대가를 바라고 베푼 것도 호의란 말입니까? 그건 그저 거래일 뿐이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관주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묻자, 손우곤이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더욱 두 아들을 거두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정당한 거래가 아니겠습니까?”
“허!”
손우곤이 말문이 턱 막힌다는 듯 헛바람만 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주가 남궁천을 향해 읍소까지 하며 말을 이어갔다.
“장성한 아들을 향한 아비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그저 이 녀석들이 단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견문을 넓히길 바랄 뿐입니다.”
“그게 아니라 맹과 연을 쌓고 무관을 더 키워보려는 속셈이겠지요.”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관주가 순순히 인정하자,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적랑단원 인원을 모두 채웠습니다. 아드님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하면 단주님의 개인 호신위라도 삼아주시면 어떻습니까? 저로서는 오히려 그 편이 두 아들의 견문을 넓히기에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자 손우곤이 발끈해서는 나섰다.
“거, 정말 집요하시군! 접대는 잘 받았으니 차라리 금전을 요구하시오! 말하는 대로 드리겠소!”
점점 언행이 거칠어지는 손우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을 믿지 못하는 남궁천에게 조금은 살 만한 세상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초를 치니 괜히 관주가 더 미워졌던 탓이다.
관주가 싸늘하게 웃으며 손우곤을 보았다.
“정말로 요구하는 대로 주실 겁니까? 모든 후불제는 꽤 값이 나갑니다만.”
“이제 보니 무인이 아니라 장사치였군요!”
“어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이쯤 되자 남궁천이 피식 웃더니 손우곤을 제지했다. 대신 관주를 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아드님 두 분을 제 호위로 데려가지요.”
“그게 정말이십니까?”
뜻밖에도 순순히 허락하자 이번엔 관주가 더 놀란 표정이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두 아들도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예, 두 사람 더 받아준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요. 게다가 이번 임무 중에 부족한 인원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니.”
“정말 감사합니다! 단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관주가 거듭 읍소하며 소리치자, 남궁천이 손을 저었다.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두 아드님 인물이 관주님과 달리 훤칠하네요.”
“하하. 제 어미를 닮아서 그런가 봅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 * *
무림맹 백옥지단.
지단주 위종악은 미간을 푹 찡그린 채 창밖을 보며 말했다.
“글쎄, 지금은 안 된다니까요.”
쾅!
당예설이 집무 책상을 거칠게 내려치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죠? 아버지가 용취곡에서 돌아오시지도 못했는데, 지단에서 이렇게 손만 놓고 있다니! 직무 유기 아닌가요?”
“아니, 지금 맹에서 적랑단이 오고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손님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자리를 비우라니요?”
“아버지의 생사조차 모르는 상황에 그런 이유로 늑장을 부리다니! 아버지가 사적으로 그 영역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무림맹의 지시로 간 거라고요!”
하지만 위종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무림맹에서 내려온 지령은 신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당 가주님이 이곳에 오셨을 때, 저는 소상히 모든 걸 설명해 드렸지요. 그리고 절대로 용취곡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냥 제 이야기만 듣고 맹에 보고를 하셔도 되는데, 굳이 신무까지 함께 가자고 하신 거고요.”
“그래서 지단주는 멀쩡히 살아 돌아온 건가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당 가주님도 제 충고를 새겨듣고 용취곡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일이 없었을 것 아닙니까? 제가 그렇게 말렸는데, 제 만류를 뿌리치고 호기롭게 들어가시더니. 쯧쯧.”
“그래서 아버지가 용취곡으로 들어가시는 걸 뒷짐 지고 보고만 있었단 거잖아요!”
“말했잖아요. 거긴 저주받은 땅이라니까? 그런 곳에 내가 왜 들어갑니까?”
“그게 지단주로서 할 소리예요? 설마 정말로 귀신 따위를 믿는 건가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거긴 저주받은 땅이라고요.”
“지단주님!”
“저 귀 안 먹었습니다.”
“좋아요. 일단 안내만 해주세요. 용취곡으로 같이 들어가자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까. 용취곡으로 가는 길은 미로처럼 복잡하죠. 아버지가 어느 쪽으로 들어가셨는지만 알려주세요.”
“못합니다.”
“지단주님!”
“글쎄, 안 됩니다. 용취곡에서 살아 돌아온 무인이 있다면서요? 그자에게 물어보시면 되잖아요.”
“지금 중상을 입고 본 가에서 치료 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것 참 안 됐네요. 아무튼 전 못합니다. 이제 맹에서 적랑단이 곧 올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역시나 위종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젠 아예 말을 걸지 말라는 듯 두 눈을 꾹 내려 감았다.
당예설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바르르 떨었다.
아버지 실종 소식을 들은 직후 급하게 타격대를 꾸려서 이곳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한데 지단주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니 뭘 어찌해 볼 방도가 없었다.
수하들을 이끌고 용취곡을 찾아 신무로 가보기도 했지만, 미로처럼 얽힌 길에서 방향만 헤매다가 돌아왔다.
당예설이 지단주를 노려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이 일에 지단주님이 관여하신 건 아니겠지요?”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습니다만.”
위종악의 눈매가 짐짓 매서워졌다.
두 사람 사이에서 모종의 기 싸움이 이어졌다.
“만약 이 일에 지단주가 개입되어 있다면 당가는 그 빚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이것 보세요, 소가주!”
쾅!
위종악이 지금껏 나른한 태도와 달리 매서운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당장 칼부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
그때 마침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문을 열고 웬 젊은 남자가 불쑥 들어오는 게 아닌가?
“어? 여기 분위기 왜 이럽니까?”
위종악과 당예설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일순 반가운 표정을 짓는 당예설과 달리, 위종악은 눈살을 팍 구기고는 짜증스럽게 말을 뱉었다.
“자네는 뭔데 감히 내 방을 함부로 들어오는 건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여기 지단주 방 아니었어요? 아닌데? 당 누님이 계신 걸 보니 맞는데?”
“뭐라?”
위종악이 눈살을 푹 찡그리는데, 당예설이 먼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남궁천.”
“그렇게 오랜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런가?”
한편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그제야 위종악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남궁천? 저 애송이가? 어리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저렇게 철없어 보일 줄이야.’
생각을 갈무리한 위종악이 헛기침을 하고는 나섰다.
“적랑단주를 몰라뵈었소. 백옥지단을 책임지고 있는 위종악이오.”
“백옥지단을 책임진다라. 거, 굉장히 듣기 좋은 말이네요.”
“그게 무슨 말이오?”
“백옥지단은 신무 지역까지 관리하는 것 맞지요?”
“그렇소.”
“무림맹의 지단이 하는 임무는 무엇입니까?”
위종악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새파란 애송이가 나타나서 마치 시험하듯 이것저것 물어대는 꼴이 영 탐탁지 않았다.
그래도 적랑단주는 맹에서도 상당히 높은 신분이었다.
지방의 지단주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우선은 고분고분 대답할 수밖에.
“무림의 평화를 위해 본 단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감시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외다.”
“잘 아시네요. 그럼 좀 처맞아야겠네요.”
“뭐요?”
위종악이 황당한 표정으로 보자,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책임지고 있다면서요. 책임이라는 건 잘못됐을 때 합당한 벌을 받는 것 아닙니까? 아님 대가리를 박으시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