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 정화 작업
적랑단의 이동 속도는 확실히 빨랐다.
남궁천은 유백랑이 마련해 준 돈으로 무한에서 가장 빠른 말 이백 필을 준비할 수 있었고, 부족한 병장기까지 완벽하게 보충할 수 있었다.
물론 오백만 냥은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만큼 많은 돈이었다. 최고급 육포를 구입해서 적랑단 전원에게 지급했다.
처음엔 비료단도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당장 사천당가가 어떤 처지인지 알 수 없는 만큼 기동력을 따져서 적랑단만 떠나기로 했다.
게다가 비료단은 우선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게 좋겠다는 판단도 있었기에.
점혈을 당한 백묘는 쇠사슬에 구속된 채로 남궁천의 말에 태워졌다.
놀라운 것은 말이 빠른 속도로 달리는 와중에도 묘하게 균형을 잡아서 백묘가 굴러떨어지지 않게 조절한다는 점이었다.
마혈을 당한 상태였기에 백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음에도 준마가 수십 리를 달리는 동안 아래로 굴러떨어지질 않았다.
‘이게 약관에 이른 청년이 말을 다루는 솜씨라니. 믿어지지가 않네.’
백묘는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 남궁천의 등을 힐끔거렸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면 이렇게 손대는 것마다 전부 잘하는 걸까?
이처럼 승마 실력이 뛰어난 것은 단지 무공만 익혀서 될 일이 아니다. 실제로 무인들 중에서 무위는 상당하나 말을 타지 못하는 자들도 꽤 많다.
한데 남궁천은 수십 년 타본 사람처럼 말을 다루지 않는가?
마혈을 점한 인질을 안장에 얹어두는 것만으로 말을 모는 인간은 분명 드물다.
‘전생에 말 타고 도망만 다녔나?’
백묘는 남궁천이 들었으면 뜨끔했을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리면서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일까?
부교주께서는 무사히 교로 귀환했을까?
맹의 뇌옥에 갇혀 평생을 썩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일이 급작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이건 자신에게 기회가 될 것인가, 해가 될 것인가?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 말은 서서히 번화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적랑단은 모두 다섯 개의 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하나의 대가 총원 사십 명이었다.
그중 적랑일대주인 손우곤은 기동력이 우수한 대원들로 선발대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가장 먼저 번화가로 달려가서 숙박할 곳을 물색해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어귀에서 만난 손우곤이 남궁천에게 다가와 포권하며 말했다.
“단주님, 이백 명의 적랑단이 한꺼번에 투숙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습니다.”
“어디야?”
“이곳에서 제일 큰 무관으로 잠룡관이라는 곳입니다. 관주가 쓸 만한 방 스무 칸 정도를 제공해 주겠다고 합니다.”
“오, 딱 좋네.”
“거기에 아침 식사까지 책임져 주겠다고 하더군요.”
“비용은?”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공짜라고?”
남궁천이 놀란 표정을 짓자 손우곤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예, 그러잖아도 단주님이 주신 돈이 넉넉해서 얼마든지 지불하겠다고 했지만, 받지 않겠다더군요.”
“대가 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야. 뭔가 바라는 게 있겠지.”
“그보다는 단주님에 대한 명성을 듣고 평소에 존경했다고 합니다. 이 기회에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관주가 몇 살이지?”
“확실하진 않으나 쉰 정도로 보였습니다.”
“셋 중 하나네.”
“예?”
“진짜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인재거나, 본 단을 해칠 음모를 꾸미고 있거나, 따로 원하는 게 있거나. 그런데 그렇게 보기 드문 인재라면 쉰이 될 때까지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을 리가 없지. 결국 나머지 둘 중 하나겠네.”
“어…….”
손우곤이 할 말을 잊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보기에 잠룡관주는 정말로 순수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을 이렇게도 믿지 못하시는 건가?’
왠지 젊은 나이에 이처럼 불신으로 가득한 남궁천을 보니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따로 토를 달진 않았다.
남궁천의 말이 틀리더라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니.
“어떻게 할까요?”
“다른 곳은?”
“돈으로 해결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문제는 이백 명이 한꺼번에 투숙할 만한 장소가 없다는 겁니다. 각 대가 흩어져서 투숙할 곳은 찾을 수 있습니다.”
“안 돼. 사천에 도착할 때까지 같이 움직이는 게 효율적이다. 우선 가보자고. 잠룡관주가 무슨 꿍꿍이인지 만나보면 알겠지.”
“만약 잠룡관주가 정말로 바라는 게 있는 거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당연히 거절이다. 갈 길이 급해. 이런 곳에서 발 묶일 수는 없어.”
“그렇군요. 우선 안내하겠습니다.”
손우곤이 말 머리를 돌려세우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 * *
남궁천은 침상에 드러누운 채로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중얼거렸다.
“거참, 이상하네.”
잠룡관주는 정말로 남궁천과 적랑단을 환대해 주었다. 푸짐한 저녁상을 일사천리로 만들어내더니 이후에는 다과와 비싼 차까지 후식으로 제공했다.
이백 명이나 되는 적랑단원들을 이만큼이나 챙기려면 분명 상당한 자금을 사용했으리라.
그럼에도 일절 돈을 받지 않았다. 남궁천까지 나서서 합당한 금액을 지불해 주겠다고 했지만, 관주는 한사코 사양했다.
그렇게 객실로 들어온 남궁천은 침상에서 한차례 운기행공을 한 후 벌러덩 드러누워서 육포만 씹는 중이었다.
백묘는 침상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포박된 채로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상태.
어차피 마혈을 점한 상태였기에 쇠사슬은 그저 형식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었다.
백묘가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게 몸에 배였군. 아직 어린데 그렇게 세상을 각박하게만 보면 행복하지가 않단다.”
“행복 찾다가 빨리 뒈지면 말짱 헛것 아니겠어?”
“도대체 무슨 삶을 살았기에 그리 사람을 못 믿지?”
“왜? 사람 잘 믿으면? 마혈 좀 풀어달라고?”
“그럼 좋지. 이렇게 몸이 굳은 채로 장거리 이동을 하니 누나 몸이 안 좋아.”
“이것 봐. 틈만 나면 어떻게든 사람을 속여먹으려고 하지. 이런데 사람을 믿으라고? 닥치고 있어라. 뒈지고 싶지 않으면.”
남궁천이 살벌한 말을 쏟아내자 백묘도 더 이상은 수작을 부리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한참이나 지난 뒤에 불쑥 말을 꺼냈다.
“굳이 이런 곳에서 지내지 않고 차라리 야영을 했더라면 고민할 것도 없지 않나?”
“험한 일을 할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 법. 여기서 기본이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거야. 그래야 백옥현에 도착해서 진짜 싸움이 시작됐을 때, 다들 기운 빠져서 비실거리지 않지. 관주의 꿍꿍이에 대해서는 나 혼자 고민하면 되지만, 그게 번거롭다고 굳이 야영을 하면 단원 전체의 사기에 좋을 게 없지.”
“꼬마 주제에 꽤나 수장의 자질을 갖추고 있군.”
“그만큼 너희 마교를 얕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니 뿌듯하게 여기라고.”
남궁천이 육포 하나를 꺼내서 백묘에게 휙 집어 던졌다.
백묘는 마치 개 사료 주듯이 육포를 던지는 남궁천을 보며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여자 대하는 태도는 아직 멀었네. 애새끼는 애새끼인가 봐?”
“닥치고 처먹어. 먹기 싫으면 관두고.”
일순 남궁천이 지풍을 날리자, 백묘는 아혈을 점혈당하면서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도 백묘가 꿈쩍도 하지 않자 남궁천이 그제야 아차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혈을 점했다는 걸 깜빡했네. 그럼 좀 기다리고 있어. 나는 관주라는 인간이 무슨 꿍꿍이인지 살펴보고 올 테니.”
그러더니 백묘 근처에 떨어진 육포를 주워 들고 다시 제 입에 넣더니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버렸다.
홀로 남은 백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남궁천의 뒤통수만 노려보았다.
* * *
단정한 옷차림에 눈매가 유독 날카로운 노인이 술잔을 들었다. 그가 옆에서 엉겨 붙는 기녀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얌전히.”
묵직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에 콧소리를 내며 엉겨 붙던 기녀가 움찔 떨고는 스르르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장로원주 우위광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혹, 계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다른 아이로…….”
“됐소.”
마주 앉은 노인이 손을 들어 제지하자, 우위광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눈치만 살폈다.
‘북천금제(北天金帝)가 까다로운 성격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거만하군.’
북천금제 홍금호.
장강 이북으로 통용되는 모든 화폐의 진정한 주인이라 불린다.
장강을 중심으로 남쪽은 금왕의 자금력이 장악하고 있다면, 북쪽은 금제의 하늘 아래라고 봐야 한다.
이 둘은 황제도 만나보고 싶어 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이 귀한 자리를 헛되이 날려서는 안 될 일.
다소 빈정이 상하더라도 최대한 비위를 맞춰야 한다.
나이로만 따지면야 우위광이 더 어른 대접을 받아야겠지만, 이런 자리가 먹은 밥그릇 순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우위광은 비어 있는 북천금제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드시지요. 북녘의 하늘을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원주.”
“……?”
“내게 시간은 금이외다. 단도직입적으로 갑시다. 원주는 내게서 돈을 원할 것이오. 하면 내가 원주에게 투자할 가치가 있음을 알려주셔야 하지 않겠소?”
‘허…….’
확실히 북천금제는 금왕과 다르다.
금왕이 언중유골 형식이라면, 북천금제는 말 한마디가 칼날이다.
우위광은 차라리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속내가 복잡한 이보다는 화끈하게 드러내고 대화하는 게 그로서도 편했으니까.
우위광이 슬쩍 눈짓을 하자, 살짝 얼어붙어 있던 기녀들이 눈치껏 자리를 비웠다.
조용한 방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우위광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현재 무림맹이 변질되고 있습니다. 남궁가가 실권을 잡더니 미쳐 날뛰는 중이지요. 이대로 두면 강호 평화는 요원하고, 중원에 피바람이 불 수도 있습니다. 정사마가 혈전을 벌이게 되면, 중원의 경기는 얼어붙을 것입니다. 그럼 금제께서도 여러모로 피해를 입지 않겠습니까?”
“원주, 우리 솔직해집시다. 원주께서 원하는 건 불변의 권력, 내가 원하는 것은 자금 아니겠소? 무림의 평화가 어쩌고, 중원의 경기가 어쩌고는 접어두잔 말이오. 자, 그래서 원주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찌하실 작정이오?”
생각보다 날것 그대로의 대화에 우위광이 조금은 당황했으나, 이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림맹이 이렇게 된 데에는 남궁천이 중심에 있습니다. 현재 천우당주가 누군지 아십니까?”
“들었소. 금왕의 여식이라지.”
우위광이 내심 웃음을 머금었다.
당연히 들었을 것이다.
시간을 금으로 여기는 북천금제가 자신에게 이런 자리를 내어준 것 또한 그 때문일 테니까.
무림맹과 연결이 되면 여러 사업에서 이점을 누릴 수 있다.
다만 지금까지 무림맹은 북천금제나 만금진인 양쪽 어느 곳과도 완벽하게 연결되진 않았다.
거기에는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있었는데, 이번에 남궁검이 맹주가 되면서 균형이 깨진 것이다.
진소홍이 천우당주가 되면서 금왕이 확실히 무림맹과 가까워진 것.
이 소식에 자존심이 강한 북천금제는 분명 속을 앓았을 터다.
그런 차에 장로원주가 만남을 청했으니 대략의 사정 파악도 끝냈을 터다.
“금제께서도 이젠 북쪽 하늘에만 머물기엔 터가 좁지 않으십니까?”
“흐음.”
북천금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가 우위광을 뜯어내다시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해서, 원주께서는 방도가 있소?”
“남궁천이 맹을 이리 흔들고 있는데 두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마침 남궁천이 둥지를 떠나 지금 적랑단을 이끌고 백옥현으로 가는 중입니다.”
“남궁천을 제거할 생각이오? 가는 길목에 사람이라도 심어두었소?”
북천금제의 말에 우위광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갈 필요 있겠습니까?”
“하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디까지나 중요한 건 무림맹입니다. 남궁천 따위가 아니지요.”
“……!”
“변질되고 있다면 정화시켜야겠지요.”
“무림맹을……?”
“남궁천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은 여유가 있습니다. 금제께서 도와주신다면 철저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우위광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