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 정화 작업
우위광은 모처럼 자신을 찾아온 팔옥각주 탁붕호와 너른 후원을 거닐었다.
탁붕호가 봄꽃이 만발하기 시작한 경관을 둘러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난양원(暖陽院)은 언제 봐도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시커먼 뇌옥만 바라보다가 이런 곳에 오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입니다.”
“이 평화로움을 지키기 위해서 때론 더러운 피도 묻혀야 하는 법일세.”
“명심하겠습니다.”
“남궁천이 적랑단을 이끌고 직접 사천으로 간다지?”
“그렇습니다. 당 가주가 실종된 만큼 맹에서도 두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인 듯합니다.”
“흐음.”
침음을 흘린 우위광이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는 돌아섰다.
탁붕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자네, 내게는 사실대로 말해보게. 그간 왜 죄수들의 시신을 백옥현으로 보낸 건가?”
“원주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단지 백옥지단주가 전서를 보내왔고, 당시 묵 맹주님이 그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대신 망자를 함부로 다룬다는 소문이 날 수 있으니, 형식상으로는 갱생지로 보낸 것으로 처리하라 하였습니다.”
“흐음.”
우위광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탁붕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오래 쳐다본다고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딱히 탁붕호가 거짓말을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도 오랜 세월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어느 정도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하면 백옥현에 간 남궁천이 뭘 들고 오게 될지도 알 수 없다는 말이군.”
“사실 그래서 저도 불안합니다. 만약 이게 정말 마교와 연관이라도 있다면……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그저 묵천악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 아닌가?
우위광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중얼거렸다.
“우선은 지켜보세. 어쩌면 남궁천이 뭔가를 들고 오는 일 자체가 없을 수도 있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전에 한 가지만 묻지. 자네는 지금의 무림맹에 만족하는가?”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큰 파장을 몰고 올 질문.
탁붕호 역시 그 정도 눈치는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하루에도 수십 번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입니다. 다만 또 언제 세상이 바뀔지 알 수 없으니 참고 견딜 뿐이지요.”
“그렇지. 세상은 변하게 마련일세. 섣부른 행동은 삼가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는데 마침 저만치 한 무리의 장로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대여섯 명의 장로들이 한 명을 에워싼 채로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치들이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무심히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우위광이 순간 딱딱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우뚝 멈췄다.
무심히 뒤를 따르던 탁붕호가 얼른 멈춰 서고는 물었다.
“원주님?”
“…….”
우위광이 대답 대신 어금니를 꾹 씹은 표정으로 장로들이 모인 곳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곳의 중심에는 다름 아닌 천무류가 있었다. 그제야 탁붕호도 천무류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천 각주님이 장로가 되셨지요? 늘 남문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머무시던 분을 장로원에서 뵙게 되니 기분이 묘하군요.”
“기분이 묘할 수밖에.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자가 갑자기 저리 사람들을 몰고 다닌다면, 누구라도 묘하게 보일 수밖에.”
우위광이 차갑게 내뱉는 말에는 분명 가시가 돋쳐 있었다.
대략의 분위기를 눈치챈 탁붕호도 더 이상은 입을 놀리지 않았다.
그들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와중에 마침 천무류와 우위광이 눈을 마주쳤다.
천무류가 먼저 부드러운 표정으로 가볍게 목례 했다. 우위광도 답례를 하는 사이 다른 장로들도 이쪽을 돌아보았다.
몇몇 장로들은 우위광의 눈매가 매섭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렸다.
‘한심한 작자들. 그저 명성에 이끌려 몰려다니는 꼴이라니.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물론 패력궁의 별호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우위광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필 이런 시기에 천무류가 장로원을 휘젓고 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어도 장로원만큼은 자신만의 세상이었다.
원주의 한마디가 규율처럼 여겨지는 세상.
맹주가 무림맹을 꽉 틀어쥐고 있었어도, 장로원만큼은 영향력 밖이었다.
바로 우위광 자신이 꽉 틀어쥐고 있었으니까.
한데 지금 묘한 균열이 생기는 것만 같다.
‘이 모든 게 그 남궁천 녀석 때문이겠지.’
남궁천이 갑자기 두각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모든 균형의 추가 무너지고 있었다.
무림맹만 흔든 게 아니라, 장로원까지 놈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다.
마침 옆에 선 탁붕호가 모처럼 마음에 드는 소리를 했다.
“어쨌거나 적랑단주가 백옥현으로 떠난다면 한동안 그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속 시원합니다. 그동안 어찌나 본 각을 들들 볶았는지.”
“후후. 이참에 아예 돌아오지 않아도 좋겠군.”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탁붕호가 농담처럼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그게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위광은 자신을 보고도 여전히 천무류 주변에 맴돌며 담소를 나누는 장로들을 한 차례 쏘아보고는 걸음을 돌렸다.
“정검당주가 잘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정검당주님에게 따로 내린 지시가 있습니까?”
“누굴 좀 만나보라 일렀네.”
“그게 누굽니까?”
“차차 알게 될 걸세. 앞으로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줄 사람이지.”
우위광의 말에 탁붕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팔옥각 역시 정검당 소속이었으니, 정검당주와 탁붕호는 결코 먼 사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검당주가 자신에게 말없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 기밀이라는 뜻일 터.
그런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만치 정검당주가 나타나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원주님을 뵙습니다.”
정검당주가 포권을 하며 말하자, 우위광이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그래, 어찌 되었는가?”
“죄송합니다. 완전히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흐음. 완전히가 아니면?”
“그자가 원주님을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호오. 구미는 당기는 모양이로군.”
우위광이 희미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그거면 됐네. 자네 식구들은 잘 관리하고 있을 테지?”
“예, 다만…….”
“뭔가?”
“정검대주가 좀 꽉 막힌 성격이긴 합니다.”
“정검대주라면…….”
“계두식이라고, 일전에 남궁천이 견습생 시절 함께 광서 지역을 다녀온 적이 있지요.”
“그렇군. 우선은 잘 타일러 보게. 그래도 한 지붕 식구가 아닌가?”
“알겠습니다, 원주님.”
“하면 그자는 언제 어디에서 보면 좋겠나?”
우위광의 질문에 정검당주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 * *
“오늘 떠날 겁니다.”
남궁천의 말에 유백랑이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갑자기 남문각을 찾아와서 다짜고짜 적랑단을 이끌고 떠나겠다고 말하는 남궁천이었다.
그게 자신에게 보고까지 할 일인가?
뭐, 환대라도 해주길 바라는 건가?
유백랑이 속내를 삼키고는 헛기침을 하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었다.
“커흠, 몸 조심히 잘 다녀오시오.”
“감사합니다.”
“…….”
“…….”
아, 뭐? 떠난다며? 왜 안 가는 건데?
유백랑은 짜증이 솟구쳤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차만 따라 마셨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남궁천도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찻잔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꽤 먼 길입니다.”
“그렇겠구려. 사천까지 가야 할 테니까.”
“그렇죠. 본 맹의 일을 대신하다가 당가가 위험에 처했으니 빨리 가야 하죠.”
그래,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것 아닌가? 어서 가라고. 훠이, 훠이!
하지만 역시나 속내를 삼킨 유백랑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단주께서 고생이 많소. 한데 흑무련 무인들은 함께 가지 않소?”
“예, 그들은 볼모니까 여기에 남아야죠.”
“허허, 그렇소?”
“흐음. 돈이 많이 필요하겠죠?”
“그렇지. 아무래도 이젠 적랑단의 총원이 이백 명으로 늘었으니 그들 모두 이끌고 간다면…….”
말을 꺼내던 유백랑이 흠칫거리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잠깐, 이 새끼. 설마……?
아니나 다를까, 남궁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씨익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제가 이래서 인원을 좀 줄이려고 했는데, 맹주님이 대외적인 임무를 소화하는 조직인 만큼 최소한 이백 명은 채워야 한다고 해서요. 우리 애들 먼 길 가면서 잠 잘 자고, 밥도 잘 먹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끄응. 얼마나…… 필요할 것 같소?”
유백랑이 그제야 눈치를 보며 묻자, 남궁천이 손사래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유, 혹시나 도움이라도 주시려고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도 이백 명이니까 임무 수행 중 다칠 수도 있고, 뭐 이래저래 왕복으로 따지면 오백만 냥은 넉넉하게 있어야겠죠?”
“오, 오백……?”
유백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을 떨었다.
“어? 왜요? 너무 적다고 생각하십니까? 역시 한 백만 냥은 더 필요할까요?”
“아, 아니오! 오백이면 충분할 것 같소!”
“역시 그렇죠?”
“언제 떠나오?”
“정오가 되면 떠날 겁니다. 그때까지 적랑단원 모두가 채비를 꾸려서 집합할 테니까요.”
“내 그때까지 오백만 냥을 준비해보리다.”
“어이쿠, 이렇게 감사할 데가! 역시 유 각주님이십니다! 유 각주님의 맹에 대한 충성심은 제가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 일은 반드시 제가 맹주님께 아뢰겠습니다!”
“뭐…… 그런 말을 듣자고 하는 건 아니지만…….”
“에이, 그래도 좋은 건 널리 알려야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각주님!”
“백묘라는 여인을 이송한다고 들었소. 부디 조심하시오.”
“물론입니다. 이제 보니 남문각주님이야말로 본 맹에 꼭 필요한 인재군요. 전 사실…… 남문각이 굳이 있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너무나 한가한 자리다 보니. 그런데 절대로 없애면 안 되겠습니다.”
“허허. 그래도 남문을 지켜야 할 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역시 그렇지요? 하긴. 이렇게 충성심이 깊은 남문각주님이 계시니까요. 남문각주님이 안 계시는 무림맹은 상상도 할 수 없군요. 남문각주님은 본 맹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그러니 건강하십시오.”
마지막 말을 내뱉는 남궁천의 얼굴이 어딘지 서늘했다.
분명 웃고 있었지만, 마냥 호의만은 아닌.
유백랑 역시 남궁천의 말 속에 뼈가 들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라도 효용가치가 없다면 언제든 자신을 없애겠다는 뜻이지 않은가?
유백랑이 속없는 사람처럼 웃어 보였다.
‘그래, 이 나쁜 새끼야. 마음대로 빼먹어라.’
‘나의 현금 보관소. 필요할 때마다 잘 써먹겠소.’
볼일을 마친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돈이 마련되면 대연무장으로 와주십시오.”
‘이젠 아주 대놓고 요구하는구나.’
유백랑이 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잠시 후에 봅시다.”